외전 3화
“네? 그야, 이런 물건들을 좋아하는 마니아층 고객님들이 계시고…….”
“이런 게 돈이 되냐고 물은 게 아니에요.”
나는 어렵게 화를 억누르며 말했다.
“다른 사람의 삶을 착취한 이런 도구들을 흥미 본위로 판매하는 게, 도덕적으로 맞는 일이냐고 여쭌 겁니다.”
“어…… 그러니까, 그건.”
“역사적 가치가 매겨질 만큼 오래된 물건도 아닙니다. 그 범죄 길드가 해체된 건 고작해야 올해 일인데요. 아직 피해자들이 두 눈을 시퍼렇게 뜨고 살아 있어요.”
“어, 그게, 손님, 음…….”
생각도 못 해 본 질문을 들었는지 상인이 입술을 더듬거렸다.
나는 주먹을 꼭 쥐었다. 사실 알고 있다. 여기서 상인에게 분풀이를 해 봐야 달라지는 건 없다는 걸.
나는 더 이상의 추궁은 멈추기로 하고 한숨을 내쉬었다.
“이 물건은 회수하도록 하겠어요.”
“예에? 손님께서 무슨 권한으로!”
나는 대답 대신 품속에서 정교하게 조각된 배지를 내밀었다.
엘룬 신의 얼굴이 성스럽게 조각된 배지는, 대성당에서 고위 인사들의 신분 보증을 위해 발급해 준 것이었다. 엘룬 교단의 역사가 오래된 만큼 이 배지 역시 꽤 유명해서, 아무리 외국인이라 해도 알아볼 확률이 높았다.
“헉, 교단에서 나오신……!”
“쉿.”
입술에 검지를 댄 나는 상인에게 이어 말했다.
“그리고, 이 물건을 구한 곳이 어딘지도 알아야겠어요.”
“주, 주교님. 그것은…….”
상인이 우물쭈물했다. 이런 물건을 구할 곳이라 봐야 암거래상뿐일 테니 섣불리 털어놓기가 곤란하겠지.
그런 상인의 입장은 알 바 아니었다. 나는 짧은 취조를 통해 상인에게서 물건의 출처를 알아내었다. 황궁에 돌아가는 대로 처리할 생각이었다.
가판대를 떠나가기 전, 나는 마지막으로 고문 도구를 돌아보았다.
“……읏.”
고문 도구에 새겨진 문양을 보는 순간 심장에 아릿한 통증이 일었다.
문양은 눈에 익었다. 내 허벅지에 새겨져 있던 낙인과 정확히 같은 모양이었으니까.
‘잔당들을, 완전히 처리하진 못했다고 했어.’
나인의 규모가 규모였으니만큼 그 범죄자 놈들을 모두 잡아넣진 못했다.
잔당 중 몇몇은 아직도 멀쩡히 하늘 아래를 배회하고 있겠지.
그렇게 생각하자 절로 심기가 불편해졌다.
“이만 떠나죠.”
나는 미련 없이 등을 돌려 용병들을 돌아보았다.
앨리샤가 살짝 벌린 입을 하곤 감탄하듯 나를 쳐다보더니, 곧 고개를 끄덕였다.
“넵. 모시겠습니다.”
* * *
다시 제국 국경 안으로 돌아와도 계약석에는 변함이 없었다.
여전히 잿빛으로 죽어 있는 돌을 확인하며 나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남은 건 수도로 돌아가는 일뿐이었다.
돌아갈 때는 워프 게이트를 이용할 계획이었다. 그러니 최소한 게이트가 설치되어 있는 도시까지는 이동해야 했다.
“게이트가 있는 케넬까지는 반나절을 달려야 합니다.”
국경 도시에서 하룻밤을 지샌 뒤, 여관 앞에서 다시 만난 앨리샤가 내게 말했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처음 이곳으로 올 때는 게이트를 이용하지 못했다. 게이트 이용 기록에 내 신원을 남길 수 없었으니까.
“좋아요. 출발하죠!”
나는 기운차게 외쳤다.
여행은 물론 나름대로 즐거웠다. 수도와는 다른 느낌의 도시들을 구경하는 것도 재밌었고, 격식 가득한 황궁에서 벗어나 있는 것에도 약간의 해방감이 들었다.
하지만 아무리 그래도 사랑하는 사람들이 있는 내 집에 비할 수는 없었다.
“얼른 돌아갑시다!”
“좋습니다. 고객님 기세라면 순식간에 도착하겠군요.”
빙그레 웃은 앨리샤가 선두에 서 일행을 이끌었다.
말에 올라탄 나는 긴장한 눈으로 앞을 쏘아보았다. 빨리 돌아가기 위해선 마차보다 말이 나은 선택이다. 그동안 교양으로 갈고닦아 온 승마 실력이 빛을 발해야 할 참이었다.
다행히 내가 탄 말은 순했고 영리했다. 우리는 함께 바람을 가로지르며 대로를 질주했다.
‘여긴 별로 사람이 없네.’
한참 달리던 중, 우리는 다소 한적한 길로 접어들었다. 용병 중 한 명인 켄이 보증한 지름길이었다.
사람이 없어 막히지 않으니 확실히 훨씬 빠르게 달릴 수 있었다.
말에 조금 더 박차를 가하려던 순간이었다.
휙!
날카로운 바람 소리와 함께, 둔중한 감각이 나를 덮쳤다.
“윽!”
히히힝!
놀란 말이 요란한 울음소리를 냈다.
나는 사태를 파악하기 위해 황급히 놀란 마음을 추슬렀다. 뒤를 돌아보자마자 내 눈이 커다래졌다.
“칼리 씨!”
내 뒤를 따라 달리고 있던 용병 칼리가 어깨에서 피를 흘리고 있었다.
커다란 화살이 그의 어깨에 처박혀 있는 모습에 가쁜 숨이 흘렀다.
“이, 이게 무슨…….”
누군가 칼리를 공격했다. 왜? 어째서?
칼리를 노린 것일까, 아니면 나를 노린 것일까? 아니, 그보다는 칼리의 상처를 치유하는 게 우선이야. 하지만 내겐 전 황후와 달리 치유의 권능이 없는데…… 두서없는 생각들이 어지러이 뇌를 휩쓸었다.
“고객님! 서둘러 몸을 피하십시오!”
칼리가 어깨에 꽂힌 화살을 잡아뽑으며 말했다. 그의 미간이 주름이 어렸다.
“고객님! 이리로!”
앞서가고 있던 앨리샤가 빠르게 말에서 내려 나를 들쳐 업었다. 곁에선 켄이 방패를 든 채 그녀와 나를 호위했다.
“꽉 잡으십시오!”
제 말에 다시금 올라탄 앨리샤가 나를 뒷자리에 태웠다. 곧장 말이 쏜살처럼 튀어 나가기 시작했다. 나는 숨을 집어삼키며 앨리샤의 어깨를 꽉 붙잡았다.
휙, 휘휙!
말이 달려나가는 자리마다 우수수 화살 비가 내렸다. 화살촉이 바람을 찢는 소리가 귓가를 파고들었다. 그때마다 몸이 절로 움츠러들었다.
“훈련이 잘된 자들이군요. 누구일 것 같습니까?”
“적이 있으신가요?”
앨리샤와 켄이 내게 외치듯 물었다. 나는 황급히 머리를 굴렸다.
내게 적…… 적이 있다고?
폐황제의 얼굴이 떠올랐다. 하지만 그는 확실히 목숨을 잃었다. 그에게 남은 세력이 있다 해도, 중심이 되어야 할 라시드가 죽어 버린 이상 이런 짓을 하면서까지 날 해치고 얻을 메리트는 없을 거다.
그러면 또, 누가 있지.
나를 죽이고 싶을 만큼 증오하는 사람…….
‘아.’
그 순간, 어제 보았던 고문 도구가 떠올랐다. 정확히는 거기 찍혀 있었던 나인의 노예 낙인이.
“나인…….”
“예?”
“나인의 잔당들일지도 몰라요. 암흑 길드 나인이요!”
“아, 이번에 소탕된 그놈들 말입니까?!”
말에 박차를 가하며 켄이 말했다. 앨리샤가 혀를 찼다.
“일이 좀 짜증 나게 됐군요.”
“그놈들은 손속이 무자비하기로 유명하죠. 정확히는 그놈들이 부리는 노예가.”
“…….”
노예라는 단어에 가슴이 덜컥 뛰었다. 켄이 방패로 화살들을 내치며 외쳤다.
“그놈들이 어찌나 노예들을 꽉 잡고 있는지, 노예들이 그야말로 수단과 방법을 안 가리고 임무에 돌입한다는군요! 그래서 골치가 아픈 거죠!”
잘 알고 있었다. 그놈들이 17번을 어떻게 다뤘는지는 내 몸이 기억하고 있으니까.
“이 속도라면 따라잡히지 않을 수 있습니다. 가까운 마을까지 서두르죠! 꽉 잡으세요!”
앨리샤의 외침에 나는 그녀를 쥔 손에 더 꼭 힘을 주었다.
그 순간이었다.
끼이이익!
날카로운 소리와 함께 끔찍한 두통이 일었다.
“흐윽……!”
“고객님!”
온몸에서 힘이 풀렸다. 그 탓에 하마터면 앨리샤의 등에서 떨어질 뻔했지만, 그녀가 잽싸게 나를 고쳐 업었다.
“왜 그러십니까! 정신 차리십시오!”
“으, 으윽…….”
나는 두 귀를 틀어막았다. 손톱으로 칠판을 긁는 듯한 저 소리에 머리가 터질 것 같았다.
내가 계속해서 정신을 차리지 못하자 앨리샤가 당황하며 나를 타일렀다.
“이러다 낙마하십니다!”
힝! 히힝!
가뜩이나 화살 세례에 흥분해 있던 말이, 제 위에 타 있는 인간들의 불안을 느꼈는지 날뛰기 시작했다. 앨리샤가 이를 악물었다.
“젠장! 켄, 내리자! 전투태세에 돌입한다!”
“하지만 숫자에서 너무 밀려!”
“상관없어. 난전으로 이끌어. 그러면 승산이 있다!”
거칠게 외친 앨리샤가 나와 함께 말에서 내렸다. 말이 히힝거리며 미친 듯이 어디론가 달려 나갔다.
“칼리! 고객님을 호위해!”
검을 뽑아 들며 켄이 외쳤다. 여전히 어깨에서 피를 흘리고 있는 칼리가 나를 이끌었다.
“일단 저쪽으로 모시겠습― 컥!”
칼리가 또다시 팔에 화살에 맞았다. 정확히 말하면, 나를 겨냥한 화살에 몸을 던졌다.
“칼리 씨!”
“전 괜찮습니다. 다치는 것보다 의뢰 실패로 계약금 잃는 게 더 무서워요!”
진심이 담긴 외침에 조금이나마 정신이 들었다.
그래. 내가 여기서 할 수 있는 최선은 스스로를 지키는 거였다.
나는 칼리가 이끄는 대로 황급히 나무 뒤에 몸을 숨겼다. 나무 뒤에서 치열한 전투 소리가 들렸다.
“끄어억!”
비명은 대개 내가 모르는 목소리였다. 우리 쪽이 승기를 잡은 모양이었다.
그래. 제국에서 가장 뛰어나다는 용병단에서도 최고의 엘리트들로만 고용했다. 분명 괜찮을 거야. 모든 일이 끝날 때까지 얌전히 숨어 있는 것만이 나의 최선이었다.
그렇게 생각하며 몸을 잔뜩 수그리던 순간이었다.
끼이익!
또, 그 소리.
공기를 찢는 소음이 뇌를 뒤흔들었다.
또다시 온몸에 힘이 빠지고, 나는 아차 할 새도 없이 풀썩 땅에 쓰러졌다.
“역시 효과가 있군!”
저속한 환호 소리가 들렸다.
“이 소리에 반응하다니. 저건 역시 우리 노예 계집이었어!”
* * *
“……뭔가.”
물러나고 있는 외교관의 뒷모습을 노려보며 이안이 중얼거렸다. 막 다음 외교관을 부르려던 루시안이 의아한 눈빛을 했다.
“왜 그러십니까, 폐하?”
“뭔가, 기분이 더럽군.”
“예?”
놀란 표정을 지은 루시안이 곧 눈을 가늘게 떴다.
“알겠습니다, 폐하. 황후 폐하께서 벌써 닷새! 나 자리를 비우셔서 착잡하신 마음은 알겠지만, 우선 이 건부터―”
“루시안.”
허공을 쏘아보며 이안이 서릿발 같은 목소리로 명령했다.
“잠깐 귀빈들을 물려라.”
“예에?”
“용병 계약서를 봐야겠으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