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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전 2화 (157/161)

외전 2화

이안과의 계약에서 내가 내걸었던 조건은 다음과 같았다.

첫째. 내가 제국에서 사라질 수 있도록 도울 것.

둘째. 이안을 포함해, 나를 알던 모든 이가 나를 찾지 못하도록 도울 것.

당당히 그 요구들을 읊던 내 모습을 떠올리자 슬며시 헛웃음이 나왔다.

‘그래. 잘한 일이었지. 그때는.’

혼란스러운 와중에도 내 살길 마련해 보겠다고 머리를 쥐 나도록 많이도 굴렸었다.

그래, 그때의 나를 칭찬하기는 한다. 칭찬하긴 하는데…….

‘일이 이렇게 될 줄은 몰랐지.’

갑자기 엘룬 신께서 신답게 선한 일을 하고 싶어져 날 일 년 전 과거로 돌려보내 주신다 해도, 달라질 건 없을 거다.

그때의 내게 ‘일 년 뒤 넌 성기사단장과 그렇고 그런 사이가 될 거야. 아, 황후 자리까지 꿰찰 테니 계약 조건대로 제국에서 실종됐다간 아주 아주 큰일일걸?’ 하고 말해 봐야 미래에서 온 날 삿된 악마 취급했을 테니.

‘뭐, 아무튼.’

첫 번째 조건을 달성하는 건 쉬웠다. 그냥 제국을 떠나기만 하면 되는 거였으니까. 이웃 나라에 잠시 여행이라도 다녀온다고 생각하면 별일도 아니었다.

문제는 두 번째.

그 이웃 나라 여행에 이안은 포함될 수 없다는 점이었다.

이안은 물론, 그가 믿고 아끼는 부하인 조안 경, 요즘 무서울 만큼 성장세를 보이고 있는 엘리엇, 그 외 어떤 엘리트 기사도 날 호위할 수 없었다. 그게 계약 조건이었으니까.

대신 이안은 내게 3인으로 된 소규모 용병대를 붙여 주었다. 말이 3인이지, 용병대장 말로는 개개인이 한 대대의 무력 역할은 충분히 해낼 수 있다고 했다. 그렇게 귀한 인력들의 인건비가 얼마나 비쌀지는 내 정신 건강을 위해 묻지 않았다. 타고나길 소시민으로 태어난 내 심장은 아직 그리 많은 성장을 이루지 못했다.

“여기부턴 제국 땅이 아닙니다. 고객님.”

용병 3인 중의 한 명, 앨리샤가 무뚝뚝한 표정으로 말했다.

“용병 계약서에 명시되었던 조건은 이것으로 끝났습니다만, 계약 종료 기간이 4일 남아 있군요. 이 이후의 일정은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으음.”

나는 골똘히 생각에 잠긴 채 계약석을 내려다보았다.

계약석은 회색으로 변해 있었지만, 이전의 자줏빛이 완전히 사라진 건 아니었다.

나는 돌의 군데군데 움푹 팬 부분을 의심스레 노려보았다.

그림자 때문인지 저 부분들이 묘하게 자줏빛을 띠고 있었다. 이게 원래 이 돌이 가지고 있는 외관인지, 아니면 계약의 여파가 남아 있는 건지는 확신할 수 없었다.

‘계약 조건을 달성한 건 틀림없지만…… 혹시 모르는 일이긴 해.’

불변의 계약석이라는 엄청난 고가의 물건을 사용한 것치고, 나와 이안은 굉장히 편법으로 계약을 마무리한 셈이었다.

그걸 잘 알고 있기에 마음 한구석이 괜스레 찔려 왔다.

‘바로 돌아가는 건, 역시 좀 찝찝한걸.’

아무래도 국경을 나갔다가 곧바로 돌아가는 건 좀 불안한 구석이 있었다.

잠시 고민하던 나는 국경 밖에서 시간을 조금만 더 지체하기로 했다.

“반나절 뒤 국경 안으로 다시 들어가죠.”

나는 하늘 꼭대기에 걸려 있는 태양을 확인하며 말했다. 지금으로부터 반나절 뒤면 저녁 시간 즈음이 되겠지.

“그때면 시간이 늦었을 테니 오늘은 국경 도시에서 자고 가고, 내일 아침 일찍 수도로 돌아가는 것으로 해요.”

“알겠습니다.”

“명대로 하겠습니다.”

앨리샤를 비롯한 용병들이 곧장 대답해왔다.

반나절 동안 무엇을 하며 시간을 보낼까 고민할 필요는 없었다. 국경 지대인 만큼 대로가 상인과 여행객들로 바글바글했으니까.

“염통구이가 단돈 3쿠퍼! 싸다, 싸, 3쿠퍼!”

“초상화 그려드립니다. 잊지 못할 추억을 만들어 보세요.”

“혀 위에서 녹는 젤리 팝니다! 온갖 맛이 다 있어요!”

국경 통과 심사를 기다리는 기나긴 줄 양옆에서 행상인들이 경쟁적으로 호객 행위를 벌이고 있었다.

길거리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불량식품 상인들과 길거리 예술가, 풍선 상인 등등. 거리 축제를 방불케 할 만큼 휘황찬란하고 시끄러운 광경이었다.

줄을 거슬러 올라가며 그 모습을 구경하자, 몇몇이 호기심 어린 눈으로 나를 흘긋거렸다. 젊은 여자가 척 봐도 용병처럼 보이는 일행을 셋이나 데리고 다니니 신기할 만도 했다.

‘날 알아보는 사람은, 없겠지.’

나는 나도 모르게 변장한 내 갈색 머리카락을 만지작거렸다. 리젤로가 보증하고 또 보증한 제품답게, 며칠이 지났는데도 들인 물이 빠질 줄 몰랐다.

하긴. 황제 옆을 지키고 있어야 할 황후가 이런 곳을 떠돌아다니고 있을 줄 누가 알까.

한가로이 국경 앞을 거닐며 시끌벅적한 광경을 구경하는데, 문득 눈에 띄는 것이 있었다.

“세상에. 저 천막들은 뭐지?”

줄 저 뒤편에, 왼편 공터를 거의 다 차지하다시피 한 천막촌이 있었다. 사람들이 하도 바글거려 그 안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 건지 보이지도 않았다.

“카라반의 천막이군요.”

내 혼잣말을 들은 앨리샤가 대답해 주었다.

“잠깐 멈춰 물건을 팔고 있나 봅니다.”

“와, 잔뜩 사 버렸네. 후회 없는 탕진이었다.”

“이 보석함 좀 봐. 일주일 치 식비를 다 썼는데, 일주일 동안 안 먹어도 배부를 것 같아.”

“희귀한 물건 판다는 상점 다 돌아다녀 봤지만, 저 카라반에는 상대도 안 되네.”

천막촌에서 나오는 사람들의 입에서 연신 감탄하는 소리가 들렸다. 내 귀가 절로 쫑긋거렸다.

‘흐음, 아직 이렇다 할 기념품을 못 샀는데.’

지구에서의 마지막 여행 때, 구조적인 문제로 기념품을 사 들고 오지 못한 것을 이번 기회에 만회하고 싶었다.

좋아, 들르자.

짧은 고민을 끝낸 나는 세 용병을 이끌고 카라반의 천막으로 향했다.

인파를 비집고 들어간 천막촌은, 휘황찬란한 물건으로 가득 차 있었다.

“우와…….”

여기저기 간이 가판대가 널려 있었다. 나는 그중 제일 번쩍번쩍한 것들로 가득 찬 가판대를 발견했다. 척 봐도 고가의 물건들만 모인 것 같았는데, 그 때문인지 멀찍이서 구경하는 사람만 많았지 제법 한산했다.

그 가판대 위에서 나는 익숙한 형상의 물건을 발견했다.

‘저건…….’

“착용자의 신변을 보호해 주는 고급 아티팩트입니다. 이 물건을 알아보시다니 안목이 좋으시군요.”

가판대의 주인으로 보이는 터번 쓴 상인이 웃으며 걸어 나왔다.

“팔찌 형태군요, 이것도.”

나는 혼잣말처럼 중얼거리며 그 아티팩트를 내려다보았다.

내가 이안에게 선물받은 것보다 보석의 크기가 훨씬 작긴 했지만, 전체적인 디자인은 비슷했다.

‘망가져 버렸지만.’

그 아티팩트는 정작 중요할 때 나를 지키지 못했다. 착용자인 내가 지니고 있는 성력이 너무 커서 아티팩트가 지닌 마력이 틀어지고 말았다나.

‘내게 성력이 있었다니. 내가 진짜 성녀였다니…… 아직도 별로 믿기진 않는 진실이야.’

“이것도……? 이전에도 아티팩트를 착용하신 적이 있으신가 보군요.”

상인의 눈이 반짝였다. 나를 대단한 재력가로 인식한 듯했다.

“마침 귀한 손님께 보여 드릴 물건이 많이 들어왔습니다. 여기 이 물건은 어떠신가요?”

상인이 아주 고풍스러워 보이는 금빛 나침반을 가리켰다.

“고대 아누비스 제국의 왕릉에서 출토된 나침반입니다. 방향 대신 사람의 운명을 가리킨다고 하죠. 고대 제국의 황제가 사랑하는 황후를 위해―”

상인이 물건에 얽힌 비극적 사연을 줄줄 읊기 시작했다.

‘이안이 좋아할지도 몰라.’

돈으론 부족한 게 없는 사람이지만, 이렇게 특별한 사연을 지닌 물건이라면 이안의 메마른 마음도 조금은 감동할…….

‘아니, 아니. 또 습관처럼 이안을 헐뜯어 버렸군.’

지난 일 년간의 오랜 습관으로 인하여 나는 나도 모르게 이안에게 삐죽이는 경향이 있었다. 그에게 끌리는 마음을 부정하기 위해 오랜 시간 청개구리처럼 굴었던 여파였다.

나침반은 마음에 들었지만, 문제는 크기였다. 손바닥만 한 보통의 나침반과 달리 이건 생각보다 컸다.

‘이걸 사면, 나머지 사람들의 선물은 어떻게 들고 가지.’

“짐 운반 서비스도 계약서에 포함되어 있습니다.”

“정말요? 고맙습니다!”

내 마음을 읽은 듯 앨리샤가 대답했다.

그 발언은 내 리미트를 해제했다. 나는 천막들을 돌아다니며 기념품 쇼핑에 열을 올렸다.

보석 박힌 깃털 펜, 예술품처럼 아름다운 검집, 이국적인 허리띠와 두건 등등.

쇼핑도 쉬운 일이 아니었다. 고작 천막 몇 개 돌았다고 진이 빠진 나는, 끝이 없이 이어져 있는 천막 행렬을 보며 멍하니 말했다.

“이 기다란 행렬이 다 상품일까요?”

“가판대가 없는 저 뒤쪽부터는 아닐 겁니다. 이런 대형 카라반은 보통 여행객을 호위하는 일을 겸하기도 합니다.”

“그렇군요.”

명확한 대답에 나는 금방 뒤편 천막에서 관심을 껐다.

새로 들른 가판대는 조금 특이했다. 예쁘다기보다는 투박하고 녹슨 물건들이 가득했다.

‘이건……?’

그 중, 뱀처럼 기묘하게 생긴 사슬 더미를 발견한 나는 눈을 찌푸렸다. 상인이 얼른 다가오더니 설명을 시작했다.

“아, 그건 전신 구속구입니다.”

“전신 구속구……?”

“전설적인 범죄 길드에서 사용하던 물건이라더군요. 그 길드는 새 황제 폐하께서 척결을 내리셔서 와해됐지만, 길드가 남긴 흔적들은 이렇게 암암리에 거래되고 있습니다.”

상인이 비밀 이야기를 말하듯 속닥거렸다.

전설적인 범죄 길드. 그리고 새 황제 폐하.

기분 나쁜 예감에 등골로 식은땀이 솟았다.

“이 전신 구속구는…….”

“그 범죄 길드에서 노예들을 길들이기 위해 사용한 물건입니다. 전기가 잘 통하는 재질이라 전기 고문에도 용이했다는군요.”

“이런 걸, 어째서.”

호흡이 조금씩 가빠져왔다.

나는 눈을 질끈 감았다. 내가 아닌 나의 기억들이, 몸이 기억하고 있는 감각들이 벌레처럼 정신을 갉아먹었다.

‘괜찮아. 이젠 괜찮아.’

나는 숨을 내쉬며 나를, 아니. 내 몸 안 어딘가에 숨어 있을 17번의 잔재를 다독였다.

‘이제 너는 안전해.’

“이런 걸, 어째서 버젓이 판매하고 있는 거죠?”

나는 숨을 가다듬고 상인을 똑바로 노려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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