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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전 1화 (156/161)

외전 1화

레하트 제국에 유례없는 생기가 넘실거렸다.

제국민들은 아침마다 신문을 붙잡고 새로운 소식에 감탄하기 바빴다.

놀라운 변혁이 매일매일 쉼 없이 이루어졌다. 폐황제 라시드의 재위 동안 야금야금 올랐던 세율이 대폭 줄어들었고, 불평등하던 제도의 많은 부분이 개선되었다. 무역 정책 역시 합리적으로 변해 제국을 찾는 외국 상인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았다.

체셔 역시 그런 상인 중 하나였다.

‘이야, 선진국은 다르구만.’

체셔는 막 도착한 레하트 제국의 수도를 두리번거리며 연신 감탄했다.

시장통 같은 활기와 고대 유적지 같은 우아함. 수도는 신기하게도 그 둘이 공존하는 곳이었다. 대륙 각지에서 찾아온 무역 상인들 덕에 이국적인 멋까지 가득했다. 아름다우면서도 활력 넘치는 이 도시의 매력에 체셔는 푹 빠져 버렸다.

‘이게 고작 새 황제 즉위 두 달 만에 일어난 변화라 이거지.’

작년만 해도 수도가 이렇게까지 북적거리지는 않았다고 한다. 이건 모두 새롭게 황좌에 앉게 된 이들, 이안과 그의 황후가 일궈 낸 성과였다.

체셔는 부푼 마음으로 황궁으로 향했다. 대륙에서 가장 호화롭다는 궁전은 역시 눈을 황홀하게 했다. 이곳저곳으로 돌아가려는 고개를 간신히 억누르며 체셔는 접견실 앞 대기실에 도착했다.

대기실은 이미 황제를 만나러 온 사람들로 가득했다. 한 명 한 명 접견실 안으로 들어가는 것을 보며, 곧 자기 차례가 돌아온다는 생각에 가슴이 두근거렸다.

‘드디어 만나 뵙는구나.’

레하트 제국으로의 파견 일정이 잡혔을 때 체셔가 가장 기대했던 건, 그렇게 번화한 수도 구경이 아니었다. 그보다도 대륙에는 아름다운 황제 부부에 대한 칭찬이 자자했다.

대륙 이곳저곳 안 다녀 본 곳이 없는 체셔인데도 유명인들을 만난다는 생각에 가슴이 뛰었다.

“체셔 프린스 님. 접견실로 이동하십시오.”

드디어 이름을 불린 체셔는 가슴을 쭉 펴고 접견실로 입장했다. 머릿속으로 온갖 레하트 제국 예법을 떠올리며.

안으로 들어서자마자 체셔는 예법에 맞게 머리를 조아렸다. 예의 있어 보이기 충분한 시간 동안 고개를 숙인 체셔가 다시 시선을 든 순간, 그의 심장이 덜컥 움직였다.

‘헉.’

황좌 위, 달처럼 아름다운 미남이 체셔를 쏘아보고 있었다.

건드리면 그대로 베일 듯 날카로운 시선으로.

‘무, 무서워.’

체셔가 마물이라도 되는 듯 쏘아보는 시선에 절로 소름이 오소소 돋았다. 눈빛이 하도 냉랭하고 무서워서 그렇게 기대했던 황제의 미모에 감탄할 여유조차도 남지 않았다.

왜, 왜 사람을 저렇게 무섭게 노려보는 걸까. 몸을 떨던 체셔는 곧 이상한 것을 발견했다.

‘어라, 그러고 보니 황후께선 어디 계시지?’

황좌 바로 옆, 채워져 있어야 할 황후의 자리에 아무도 없었다.

잠시 외출하신 걸까 싶었지만, 접견이 끝날 때까지 황후는 돌아오지 않았다.

황제만큼이나 황후를 만나는 것을 고대하고 있었던 체셔이기에 실망감은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다행히 황제는 눈빛만 무섭지, 체셔의 말을 신중하게 들어 주었다. 무역 수수료 감면을 이룩해 낸 체셔는 황제에게 몇 번이고 감사의 말을 고한 뒤 접견실에서 물러났다.

‘해냈군. 해냈어!’

뛸 듯이 신나는 마음으로 체셔는 황궁을 거닐었다. 큰 짐을 해결하고 나니 훨씬 가벼운 마음으로 황궁의 아름다움을 감상할 수 있었다.

“정말 걱정이에요.”

“그러게요. 오늘 아침도 드시지 않은 것 같던데…….”

“그런 건 황후 폐하께서도 바라시지 않을 거예요. 건강부터 챙기셔야 할 텐데요. 휴…….”

기분 좋게 황궁을 거닐던 체셔의 귀에 이상한 수군거림이 들렸다. 그는 저도 모르게 걸음을 멈추고 대화를 마저 엿들었다.

“황후 폐하께서 안 계시니, 황궁 전체가 시들어 버린 것 같네요…….”

‘뭐지. 황후께서 정말 사라지신 건가?’

황좌 옆에 황후가 없었다는 사실이 다시금 떠올랐다.

혼란에 빠져 멍하니 허공을 바라보던 체셔는, 문득 저 높은 테라스에서 빛나는 무언가를 발견했다. 난간에 팔을 괸 채 아래를 내려다보고 있는 한 남자의 옆모습이었다.

백수정 같은 은발과 수려한 옆선. 무료하고 권태로운 눈빛. 착각할 수가 없었다. 분명 조금 전 알현했던 황제였다.

멀리서도 빛이 나는 미모를 때아니게 감상하던 체셔는 문득 이상한 점을 느꼈다.

‘내 눈이 잘못됐나. 황제께서 왜 저렇게…….’

슬퍼 보이시지?

수심으로 가라앉은 얼굴은 구름 사이로 숨은 달처럼 흐릿했다. 이렇게 멀리서 바라보고 있는데도 절로 안타까운 마음이 들 만큼.

방금 막 시한부 선고를 들은 황자처럼 황제의 표정은 어둡기 그지없었다.

저분께 무슨 사연이 있는 걸까.

애달픔 섞인 궁금증이 절로 차올랐다.

언뜻 서리처럼 냉랭해 보이는 표정이지만, 감정에 민감하기로 유명한 사막 나라 출신인 체셔는 느낄 수 있었다. 지금 황제가 무척이나 슬픈 상태라는 것을.

무언가 아주 어둡고 끔찍한 사연이 현재 이안 황제에게 닥쳐 있는 것이 틀림없었다.

‘설마, 정말 황후께 변고가……?!’

아니, 아니. 무서운 생각에 체셔는 고개를 저었다.

그런 크나큰 소식이 있었다면 제국까지 오는 동안 분명 체셔의 귀에도 들어왔을 것이다.

하지만 그게 아니고서는 황후의 부재와 황제의 슬픈 표정을 설명할 길이 없었다.

‘정말 황후께 변고가 닥쳤는데, 나라가 너무 혼란스러워질까 봐 일단 비밀에 부쳐 둔 것은 아닐까?’

황제나 황후의 죽음같이 큰일은 그런 식으로 국민들에게 바로 알리지 않는 일도 많았다.

체셔의 머릿속에서 점점 퍼즐이 맞춰졌다. 퍼즐의 제목은 황후의 변고였다.

‘말도 안 돼. 아이린 님께서…….’

아이린 그레이스는 체셔의 나라에까지도 소문이 닿을 만큼 유명한 성녀였다.

그녀가 성마석에 노출되어 있던 마을을 구한 일, 게이트의 폭발을 예지한 일, 현 황제와 힘을 합쳐 폐황제를 물리친 일은 대륙에 모르는 이가 없었다.

그렇게 뛰어나고 현숙한 성녀께서 변고를 당하셨다니.

이건 비단 레하트 제국뿐만 아니라 전 대륙의 상실이었다.

그런 생각을 하고 보니 황제의 저 옆모습이 더더욱 다르게 보였다.

‘아아, 얼마나 힘이 드실까…….’

반려를 잃은 남자의 모습이라고 생각하자, 절로 눈시울이 붉어질 만큼 황제의 얼굴이 애달프게 느껴졌다.

‘그런데, 나 너무 대놓고 훔쳐보는 거 아닌가?’

문득 그런 걱정이 든 체셔는 귀를 쫑긋 세웠다. 근처에서 이야기를 나누던 무리가 아직 떠나지 않았는지 대화가 들려왔다.

“아무튼, 정말 염려스럽네요. 폐하께서 부디 잘 떨치고 일어나셔야 할 텐데…….”

“그러게 말입니다.”

불쑥 튀어나온 남자 목소리에 체셔는 저도 모르게 그리로 시선을 향했다.

‘저 사람은.’

새로 등장한 남자의 인상착의를 알아본 체셔는 눈을 크게 떴다.

일 잘하기로 타국에까지 소문난 천재 보좌관, 루시안이 틀림없었다.

루시안이 짙은 한숨을 내뱉었다.

“적당히 좀 하셔야 할 텐데요.”

‘적당히 좀……?’

체셔는 귀를 의심했다.

황제에게 충성스럽기로 소문이 자자한 저 보좌관의 입에서 방금 무슨 말이 나온 거지?

“제 주군이시지만, 정말, 하, 솔직히…… 유난도 이런 유난이 없습니다.”

“아아…….”

“대체 폐하께서 언제부터 저렇게까지 여린 성정이셨습니까? 저는 정말 이해가 안 되고 이 상황이 피곤합니다.”

루시안의 우아한 입매에서 연달아 튀어나오는 과격한 발언에 체셔는 깜짝깜짝 놀랐다.

그러고 보니 루시안의 눈 아래가 짙은 그림자로 덮여 있었다.

‘피곤이 심해 보이는데, 그것 때문에 잠깐 돌아 버리고 만 걸까?’

아무리 그래도 저런 발언을 공개된 장소에서 저렇게 내뱉다가 잘못 걸리면 황제께서 경을 칠 텐데!

체셔가 경악하건 말건 루시안은 말을 이었다.

“황후 폐하께서 자리를 비우신 지 고작 사흘째인데, 벌써 이러시면 남은 나흘은 어떻게 버티실는지…….”

‘사흘?’

체셔는 또다시 제 귀를 의심했다. 방금 들은 말이 잘 이해되지 않았다.

‘황후께서 사라지신 지, 고작 사흘?’

“어쩔 수 없지요. 폐하께서 아이린 님을 얼마나 귀애하시는지는 세상이 다 알잖아요.”

“아니, 아무리 그래도 저건 병입니다. 고작 사흘이라고요. 사흘! 저렇게까지 죽을상을 하실 일은 아니란 말입니다!”

루시안이 급기야 저 멀리 보이는 황제의 옆모습에 손가락질을 했다.

당황스러운 하극상이었으나, 체셔는 내심 그 마음이 이해되었다.

체셔도 레하트 제국으로의 파견 일정 때문에 가족과 헤어졌다. 눈에 넣어도 안 아플 여섯 살배기 딸을 놓고 와야 했다.

그래도 체셔는 울지 않았다. 황제만큼 시름에 잠기지도 않았다.

물론 슬프긴 했지만, 저 옆모습처럼 죽을병에라도 걸린 듯 수심에 잠기진 않았다.

‘그런데, 고작 사흘?’

게다가 나흘 뒤면 황후께서 돌아오실 예정이라고?

체셔는 주먹을 꾹 쥐었다.

‘내 연민 돌려줘.’

짧은 시간 동안 강렬하게 쏟은 연민이 아까워질 지경이었다.

사흘과 나흘을 합치면 황후의 부재는 고작 일주일짜리였다.

‘레하트 제국의 황제 폐하가 엄살쟁이였다니!’

거기 휘둘린 자신이 하찮아서 체셔는 제 이마를 퍽퍽 치고 싶었다.

* * *

‘됐다.’

국경을 벗어난 순간, 품속을 들여다본 나는 환희로 눈을 반짝였다.

제국에 속해 있던 내내 붉게 달아올라 있던 돌이, 길거리를 굴러다니는 평범한 돌멩이처럼 잿빛으로 죽어 있었다.

이 돌은 지난 일 년 내내 자줏빛을 내뿜고 있었다. 제가 지키고 있는 맹세를 잊지 않겠다는 듯.

하지만 그것도 조금 전까지였다. 완전히 힘을 잃은 계약석을 이리저리 돌려보며 나는 환히 미소 지었다.

‘드디어 풀렸어!’

일 년 전. 내가 불변의 계약석에 대고 이안과 나누었던 계약.

그 계약이 조금 전, 마침내 종지부를 맺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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