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5화
‘성녀님께서는, 대체 어디에 계신 거지.’
한 달간 여행을 다녀오겠다는 발언을 들었을 때는, 루시안도 납득했었다.
갑작스레 사라져 버린 지난 여행과는 달리 이번에는 미리 말씀해 주셔서 다행이라는 생각까지 했었다.
많은 일을 겪은 뒤였기에, 아이린에겐 기나긴 휴식이 필요한 것이 사실이었다.
휴양지를 추천해 드리고 싶었지만 아이린은 웃으며 이미 정해진 곳이 있다고 했다.
‘단장님께선, 아니. 폐하께선 아이린 님의 행선지를 알고 계시겠지?’
그렇다 해도 이상했다.
돌아오기로 한 약속 날짜가 지난 뒤임에도, 이안은 아이린을 되찾아오려는 노력을 하지 않았다.
아니, 할 수 없는 것 같았다.
마치 그녀가 닿을 수 없을 만큼 먼 곳에라도 가 버린 것처럼.
‘오늘은, 제발 돌아오셔야 할 텐데.’
오늘은 이안의 대관식.
이날부로 황후가 될 그녀가 빠져서는 안 될 자리였다.
바쁘디바쁜 사용인들과 달리, 황후궁에 배정된 시녀들은 주어진 일이 없어 울상인 상태였다.
‘원래대로라면 황제궁 사용인들보다도 바빠야 할 사람들인데.’
루시안은 초조히 다시금 시계를 바라보았다.
대관식까지 앞으로 세 시간. 평민들에게도 모두 개방되는 의식인 만큼 미룰 수는 없었다.
대관식이 가까워질수록, 이안의 표정은 시시각각 어두워졌다.
이제는 마치 차가운 검날처럼, 만지면 그대로 베일 듯 날이 서 있었다.
어젯밤, 아이린의 행방을 걱정하는 루시안에게 이안은 짧게 내뱉었었다.
‘돌아오실 거다.’
내일까지는, 무슨 일이 있어도.
그렇게 약속했었으니까.
이안이 삼킨 말까지 루시안이 알지는 못했지만, 그럼에도 그 역시 아이린을 믿는 수밖에 없었다.
설마 대관식 날 황제를 홀로 두시지는 않을 거라고.
애타는 마음과 달리 시곗바늘은 속절없이 흘러갔다.
“폐하.”
루시안이 조심스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이제 슬슬, 그랜드 홀로 이동하셔야 할 것 같습니다.”
이미 그랜드 홀은 대관식에 참관하기 위해 몰려든 사람들로 만선인 상태였다. 이안의 안색을 살피며 루시안이 말을 이었다.
“자리를 옮기시는 것이…….”
“침실에 다녀오겠다.”
“폐하?”
당황으로 루시안의 눈이 커졌다.
“갑자기 침실은 어째서…….”
“여기서 기다려. 들어오지 말고.”
강경한 이안의 태도에 루시안은 아무런 말도 할 수 없었다.
한 달 전부터, 이안은 자신의 침실에 아무도 들이지 않았다. 딱 한 명, 소년 시절부터 알아 온 치유사를 제외하고는.
왜 침실에 종종 치유사를 부르시는 걸까. 아픈 곳이 있으신 걸까. 그런 걱정에 치유사를 캐물어 보기도 했지만, 그는 조개처럼 입을 다물고 침실 안의 일에 대해 일언반구도 하지 않았다.
“알겠습니다, 폐하.”
결국 루시안은 고개를 숙일 수밖에 없었다. 주군의 말에 거스르는 건 불가능했다.
부산스러운 황궁 복도를 한참이나 지나, 가장 깊은 곳에 다다른 이안은 침실 문을 열어젖혔다.
커튼을 쳐 어둑한 방 안 저편에는 거대한 침대가 놓여 있었다.
침대의 베일을 걷자, 그 안에 고요히 잠들어 있는 인영이 보였다.
“……서연.”
이안이 나지막이 속삭였다.
잠들어 있는 얼굴은 미동도 하지 않았다. 그저 숨만 쉴 줄 아는 인형처럼.
아이린이 떠난 지 한 달 하고도 3일, 그리고 15시간째.
의식을 치른 직후 아이린의 육체에는 다른 존재가 깃들었었다.
‘……다시 돌아왔어.’
아이린의 모습을 한, 그러나 아이린이 아닌.
생경한 존재는 움츠러든 표정으로 주위를 둘러보았다. 갑자기 몸이 바뀌었는데도 당황하지 않는 것으로 보아 대강의 상황은 이미 알고 있는 듯했다.
이게 서연이 말한, ‘진짜 17번’인가.
이안은 기묘한 기분에 잠겨 알지 못하는 누군가가 아이린의 육체를 조종하는 광경을 바라보았다.
의식이 이루어진 평원을 멍한 눈으로 살펴보던 그녀는, 이안을 올려다보더니 눈가를 찡그렸다.
‘……이렇게 다시 뵙게 되니 묘하네요. 그쪽 침대로 몰래 파고들었던 게 마지막 기억인데.’
그렇게 말하는 목소리는 꽤나 당돌했다.
이안은 헛웃음을 지었다. 서연의 말에 따르면, 서연과 이 17번의 영혼은 같다고 한다. 즉, 똑같은 사람이라는 이야기였다.
묘하게 뻔뻔한 저 태도를 보면 확실히, 둘은 그리 다른 개체 같지는 않았다.
하지만 그래도 이안은 17번의 눈빛 속에서 생소함을 느꼈다. 같은 육체에 같은 영혼임에도 불구하고, 눈앞의 여자는 그가 아는 사람이 아니었다. 그의 서연이 아니었다.
‘이야기는 대충 들었어요. 여기까지 따라오신 걸 보니, 정말 내가, 아니. 진짜 서연이 그쪽과 그렇고 그런 사이가 된 게 맞나 보네요.’
‘…….’
‘설마 했는데, 정말 성기사단장이랑…… 와. 나 진짜 인생 폈네.’
17번이 힘없는 목소리로 킥킥 웃었다.
‘뭐, 이제는 나와 상관없는 이야기지만.’
그렇게 말한 17번이 굳은 얼굴로 주변을 노려보았다.
‘이쪽 공기는, 변함없이…… 혐오스럽네요.’
소름이 끼쳐 오는 듯 17번이 제 어깨를 감싸 안았다.
‘한 달이나 다시, 이곳에 있어야 한다니…….’
저주를 받은 것처럼 17번은 절망적인 표정이었다. 안 그래도 흰빛이던 피부가 유령처럼 새하얗게 질렸다. 악몽을 꾸고 있는 사람처럼.
‘저, 성기사단장님.’
‘……뭐지.’
‘부탁이 있어요. 진짜 서연이와 달리 저는 그쪽과 아무런 사이도 아니지만, 그래도 꼭 들어주셨으면 좋겠어요.’
17번이 간절한 표정으로 애원했다.
‘진짜 서연이가 돌아오기 전까지, 제 의식을 없애 주세요.’
‘…….’
‘이곳에서는 단 일 분도 더 숨 쉬고 싶지 않아요. 공기 한 줌, 흙 한 톨에조차 역겨운 기억만 가득한…… 이곳에서는.’
괴로운 과거를 떠올리는 듯 17번의 어깨가 떨렸다.
실험용 노예로 고문을 당했다고 했었나.
17번의 과거를 떠올린 이안은 눈가를 좁혔다. 17번에게 이 세계는 그저 지옥 그 자체인 듯했다.
‘마탑의 마법을 이용하면 가능하잖아요. 진짜 서연이가 돌아올 때까지, 제가 아무 꿈도 꾸지 않고 죽은 듯 잘 수 있게 해 주세요. 부탁드립니다.’
서연의 얼굴이 고통스러운 얼굴로 애절히 부탁해 왔다. 이안은 심장이 무섭게 조여드는 것을 느꼈다. 서연의 얼굴로 저런 표정을 짓는 것은 더 이상 보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이안은 자기도 모르게 말했다.
‘이곳에, 널 찾고 있는 사람이 있다.’
‘……네?’
‘나인에서 부여받은 번호는 4번이라더군.’
‘그 사람이…….’
17번의 눈이 커다래졌다. 곧 그 눈빛에 슬픔이 깃들었다.
‘들었어요. 나인의 노예들이 전부 자유를 찾았다는 것. 그 사람도, 마찬가지인가요?’
‘그래.’
‘아…….’
17번이 깊은 한숨을 뱉었다.
‘다행이네요. 정말 다행이야. ……하지만, 그 사람을 다시 만나고 싶지는 않아요.’
‘왜지?’
‘상처 입은 짐승들끼리 만나 봐야, 서로를 핥아주는 것밖엔 못 하니까…… 그건 아무런 소용도 없으니까요.’
그저 과거에 매몰될 뿐이라며 17번이 고개를 저었다.
‘알겠다.’
이안은 고개를 끄덕였다. 이 이상 그녀를 설득할 이유도, 그럴 방법도 찾을 수 없었다.
그날 이후, 17번은 잠에 빠져들었다.
그녀를 침실에 고이 눕혀 놓은 이안은, 아무런 영양도 섭취할 수 없는 서연에게 밤낮으로 성력을 주입했다.
그녀의 건강에 이상이 없는지 검사하기 위해 들르는 치유사 외에, 서연의 몸이 이 침실에 잠들어 있다는 것을 아는 자는 아무도 없었다.
이안은 그렇게 한 달 내내 서연 곁에 나란히 누우며 잠든 그녀와 함께했다.
때때로, 영영 뜨이지 않을 것처럼 굳게 닫힌 눈꺼풀을 하염없이 바라보면서.
“이제, 돌아올 때가 되지 않았습니까.”
나지막한 중얼거림이 흘러나왔다.
이안은 손을 뻗어 서연의 뺨을 만져 보았다. 부드럽고 따뜻했다. 단잠에 빠진 아기처럼.
“약속한 시일이 지난 것은 괜찮습니다. 나는 참을성이 많으니까.”
듣는 이 없는 속삭임이 공허한 침실을 울렸다.
“대관식 레드카펫을 혼자 밟게 해도 괜찮습니다. 기다림에 끝만 있다면 무엇이든 괜찮습니다. 그러니까.”
천천히 고개 숙인 이안이 서연의 입술에 제 것을 맞대고 속삭였다.
“돌아오셔야 합니다. 반드시.”
부드러운 입술 감촉을 느끼며 이안은 지그시 눈을 감았다.
사실은 모두 거짓말이었다. 참을성이 많다는 것도, 언젠가 돌아오기만 한다면 전부 괜찮다는 것도.
사실은 지금 당장 눈을 뜬 서연을 만나지 못한다면 미칠 것 같았다.
제게 있는 것이 그녀의 빈 껍데기뿐이라는 사실이 숨쉬기 힘들 만큼 가슴을 조여 왔다.
“서연…… 부디.”
이안이 아프게 중얼거렸다.
그의 신부가 눈을 떠 주길 바랐다. 그 외엔 아무것도 상관없었다. 황관도. 저 밖에서 자신만을 기다리고 있을 사람들도.
신을 만나러 가자.
이안은 그렇게 결심했다. 서연과는 그리도 자주 대화한다는 엘룬 신은, 이안에게는 한 번도 응답해 준 적 없었다. 이 건으로는 이안에게 해 줄 수 있는 말이 없다는 듯이.
그래도 오늘은 어떻게든 응답을 들어내고 말리라. 그렇게 생각하며 이안은 한 번 더 살포시 입술을 겹쳤다. 그녀가 살아 있음을 알리는 이 말캉한 체온만이 그의 위안이었다.
이윽고 눈을 뜬 이안은 그대로 심장이 멎는 것을 느꼈다.
“…….”
이안은 숨도 쉬지 못하고 눈앞을 바라보았다.
달콤한 벌꿀 같은 색채가 눈꺼풀 사이로, 서서히 나타났다 사라졌다를 반복했다.
“으음…….”
익숙하면서도 듣기 좋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꿈을 꾸고 있는 걸까. 이안은 현실 감각을 의심했다.
서연이 천천히 눈을 깜빡이며 초점을 찾아갔다. 이안의 얼굴 위로 시선을 맞춘 서연이 눈꼬리를 크게 휘었다.
“깜짝이야…….”
서연이 배시시, 졸린 미소를 지었다.
“일어나자마자 만날 줄은 몰랐는데요. 기분 좋네요.”
잠기운 가득한 목소리로 속삭인 서연이 팔을 뻗어 이안의 목을 끌어안았다.
“많이 보고 싶었어.”
이안은 여전히 굳은 채로, 아무런 대답도 하지 못했다.
아무래도 꿈을 꾸고 있는 것이 아닌 듯했다.
서연이 정말, 기나긴 여행을 끝내고 마침내 돌아온 것이다.
천천히 손을 든 이안은 서연을 꽉 끌어안았다.
따스한 체온이, 희미하게 전해져 오는 심장 박동이 그녀가 살아 있음을 온몸으로 느끼게 했다.
“윽, 숨, 숨 막혀요.”
“왜, 이렇게.”
쏟아 내듯 이안이 말했다.
“왜 이렇게 늦었습니까.”
“미안해요.”
서연이 순순히 사과해 왔다.
“정리할 게 생각보다 더 많았어요. 소연이랑 나눌 이야기도 너무 많았고…… 세상에, 고작 일 년 만에 양쪽 세계에 얼마나 많은 일이 있었는지요.”
혀를 내두른 서연이 살며시 물었다.
“많이 기다렸어요?”
“말이라고 하십니까.”
“어어…… 화 난 것 같은데. 미안해요.”
이안은 대답 대신 서연의 목에 고개를 묻고 숨을 들이마셨다. 폐부를 가득히 채우는 그녀의 체취에 정신이 몽롱해졌다.
“진짜, 진짜 많이 보고 싶었어요.”
서연이 속삭였다.
“밤마다 이안 생각을 얼마나 했는지 상상도 못 할 거예요. ……저기, 얼굴 좀 보여 줄래요? 아직 제대로 못 봤는데.”
그러나 이안은 여전히 아무런 말이 없었다. 서연은 서서히 이상을 감지하고 이안의 어깨를 톡톡 두드려 보았다.
“……이안?”
고개를 갸웃거린 서연이 이안을 억지로 떼어 내었다. 이안의 얼굴을 확인한 서연은 눈을 커다랗게 떴다.
“울었어요?!”
이안은 다시금 서연을 끌어안았다. 퍼즐처럼 꼭 맞는 몸이 기분 좋았다.
“대관식 날 사라진 최초의 황제가 될 뻔했습니다.”
서연은 그 속삭임에 푸스스 웃어버렸다.
“정말 미안해요, 늦어서. ……다시는, 약속 어기는 일 없을 거예요.”
“상관없습니다.”
이안이 단칼에 대답했다.
“앞으로는 아예, 그대를 혼자 떠나보내는 일 자체가 없을 테니.”
“세상에.”
서연이 장난스레 속삭였다.
“집착적인데요.”
“병이 생겼습니다.”
이안이 순순히 인정했다.
“치유가 될지는 모르겠군요.”
“치유, 안 해도 될 것 같은데요.”
이안의 코에 제 코끝을 부딪히며 서연이 말했다.
“적어도 지금은요.”
이안은 응답 대신, 다소 다급히 서연에 입술에 제 것을 겹쳤다. 집어삼킬 듯한 키스가 숨 가쁘게 이어졌다.
뎅, 뎅, 뎅.
그때 시계탑이 크게 존재감을 알렸다. 서연이 나른히 눈을 뜨며 물었다.
“그런데, 오늘이 이곳에선 며칠인가요? 시간의 흐름이 약간 다른 것 같더라고요.”
“11월 7일입니다.”
흘리듯 대답한 이안이 다시금 입술을 겹치려 했다.
서연의 눈이 서서히 커다래졌다.
“7일…… 7일. 잠깐만. 대관식 날이잖아요?!”
짧은 비명이 침실을 울렸다.
“이러고 있을 때가 아니네요. 어서 일어나죠! 황제가 되러 가셔야 하잖아요!”
서연의 호들갑에 이안이 흐트러진 머리칼을 쓸어넘기며 한숨 쉬듯 웃었다.
“알겠습니다. 가시죠. 나의 황후.”
그 호칭에, 아직 익숙하지 않은 듯 서연의 뺨이 붉어졌다.
이안은 부드럽게 그녀의 손을 쥐고 에스코트했다.
* * *
대관식은 그 어느 때보다도 화려하게 이루어졌다.
구름처럼 몰려든 인파의 시선을 한 몸에 받으며, 이안 에스테반은 황관을 머리 위에 썼다. 그 뒤 아이린 그레이스의 머리 위에 제 비라는 증거의 황관을 얹어 주었다. 우레와 같은 함성이 뒤따랐다.
서로를 바라본 채, 황제와 황후는 결혼식 때처럼 서로의 고개를 가까이했다. 일 년 전과 달리, 이번엔 정말로 둘의 입술이 맞닿았다.
폭죽처럼 터져 나오는 함성을 뒤로하고 이안이 속삭였다.
“사랑합니다, 서연. 그리고 고맙습니다.”
“뭐가요?”
입술이 맞닿은 채로 서연이 장난스레 되물었다.
“그날 내 침대에 떨어져 주어서.”
서연은 참지 못하고 웃음을 터뜨렸다.
황후의 환한 웃음에 사람들이 더 크게 환성을 질렀다.
황제와 황후는 손을 맞잡은 채 백성들을 돌아보았다. 그들만을 향하는 눈동자 하나하나가 신뢰와 희망의 빛으로 반짝였다. 손을 흔들자 엄청난 함성이 뒤따라왔다.
그들의 머리 위에서 햇살이 빛났다. 유난히, 어느 날보다 더욱더 아름답게 반짝이는 햇살이었다.
<가짜 성녀의 화려한 사기 결혼> Fi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