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4화
침실로 들어서자 하녀들이 동그래진 눈으로 우릴 돌아보았다. 오늘 오후까지 기도실에서 돌아오지 않을 거라던 내가 금세 되돌아오자 놀란 모양이었다.
“나가 있어라.”
이안이 그들에게 축객령을 내렸다. 단호한 어조로 그가 덧붙였다.
“아무도 방해하는 이 없도록 하고.”
하녀들이 일제히 빠르게 침실을 빠져나갔다.
탁, 마지막 하녀가 방을 나서며 문 닫는 소리가 들렸다. 동시에 허리가 끌어안겼다.
“읏…….”
순식간에 목을 파고드는 입술에 몸이 파드득 떨렸다. 나는 대형견처럼 달려드는 이안의 머리채 사이로 손가락을 얽었다.
“간지러워요…….”
“지금 내 기쁨은, 서연.”
내 뺨에 입 맞추며 이안이 속삭였다.
“어떻게 미사여구를 덧붙여도 표현이 안 될 겁니다.”
내 머리칼을 한 아름 손에 올린 이안이 이번엔 그 위에 입을 맞췄다.
“세상을 발밑에 깔아 드려도 그대가 두고 온 것에 대한 보상은 안 되겠지만…….”
“흐읏.”
“최선을 다해 어떤 방식으로든 봉사하겠습니다.”
평생.
그렇게 속닥거리며 이안이 입술과 입술을 겹쳐왔다. 달콤한 숨결에 온몸에서 힘이 풀어져 내렸다.
사뿐히 나를 안아 든 이안이 침대로 향했다. 창밖이 너무 환해 나는 안긴 채로 얼굴을 가렸다.
“너무 밝아요.”
나를 침대 위에 내려놓은 이안이 능숙하게 손을 뻗어 커튼 줄을 당겼다. 침실이 그럭저럭 어둠 속에 가라앉았다.
그의 목 뒤로 손을 두른 나는 다시금 덮쳐 오는 이안을 맞이했다. 드레스의 단추를 푸는 손길, 사락거리며 옷자락이 내려가는 소리에 얼굴이 화끈거렸다.
드러난 쇄골에 입술이 닿자 파르르 몸이 떨려왔다. 이안이 주는 감각에는 아직도 익숙해지지 않았다. 이렇게 강렬한 감각에도 언젠가는 익숙해질 날이 오긴 할까? 의심스러웠다.
“만약에, 내가 돌아간다고 하면.”
그 말에 내 어깨를 감싸 안던 이안의 손길이 허공에서 멎었다.
나는 흐려진 눈으로 그를 올려다보았다.
“정말, 저랑 같이 떠날 생각이셨어요?”
“제위를 물려줄 사람을 알아보고 있었다는 건 농이 아니었습니다.”
달콤히 귓가를 간지럽히는 속삭임에 반사적으로 웃음이 나왔다. 나는 간지럽다고 투덜거리며 대답했다.
“그것도…… 읏, 재미있었을 것 같긴 하네요.”
제국이나 교단의 혼란 같은 걸 모두 차치하고 생각해 보면, 지구로 이안을 데리고 온다는 상상 자체는 재미있었다.
현대 문물을 보여 주면 눈이 휘둥그레졌을까. 그런 모습을 상상하니 나도 모르게 웃음이 나왔다. 그게 불만스러웠던 듯 곧장 클레임이 제기되었다.
“무슨 생각을 하시는 겁니까?”
“당신 생각요.”
“저는 눈앞에 있는데.”
“알아요.”
나는 이안의 목을 끌어안으며 미소 지었다.
구태여 일깨워 줄 필요가 없었다. 눈앞이, 마음속이 이안이라는 사람으로 온통 채워져 있었으니까.
‘터져 버릴 것 같아.’
한 사람이 갖는 존재감이 너무 거대해서 그걸 담고 있는 심장이 이대로 펑 터질 듯한 착각이 들었다.
평생이 지나도, 이 존재감에는 익숙해지지 못할 것 같았다. 아니, 그럴 것이 분명했다.
“서연.”
이안이 내 피부 사이에 묻고 있던 고개를 들었다. 짙푸른 시선이 나를 내려다보았다. 나는 바다를 닮은 그 아름다운 눈빛을 가만히 마주했다.
“사랑합니다.”
나는 살며시 미소를 지었다.
이안의 고백이 음성을 타고 전해져 가슴을 적셨다. 눈을 감은 나는 우러나오는 감정을 그대로 언어에 담았다.
“저도, 사랑해요.”
내 마음을 전할 수 있는 단어가 있음에 감사하면서.
짙은 충족감이 마음을 메웠다. 아무리 시간이 흘러도 가슴 속에 고인 채 사라지지 않을 충족감이었다.
행복해.
이안의 어깨를 그러쥐며 나는 그런 생각을 했다. 그 상투적인 단어 외에는 지금 이 기분을 표현할 길이 없었다.
그러나 그날 오후를 넘어 밤까지, 나는 지나친 극상의 행복은 도리어 감당하기 힘들다는 진실을 똑똑히 배워야만 했다.
* * *
“아이린 님…… 정말 저희 없이 괜찮으시겠어요?”
아네트가 일렁이는 눈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조안 경 역시 나를 설득해 왔다.
“역시 저만이라도 데려가시는 게 어떠시겠습니까, 아이린 님. 혼자 가시는 건 제가 너무 걱정이 됩니다.”
“염려할 것 없다.”
이안이 딱 잘라 말했다.
“부인의 안전은 완벽히 보장되어 있으니.”
그 확답에 다들 더 이상 말을 보태지 못하고 입을 다물었다.
이안의 말은 사실이었다. 내 여행의 안전을 보장하는 건 다름 아닌 이 세계의 신이었으니까.
‘그보다 확실한 안전 보증은 없긴 하지.’
“한 달 동안, 너무 그리울 거예요.”
셀레나가 시무룩한 얼굴로 말했다.
“기념품 많이 사 올게요.”
나는 웃으며 말했다. 외계 물건이라는 것이 너무 티 나지 않는 기념품을 찾으려면 조금 고생스럽긴 할 것 같았다.
“아이린.”
이안이 나지막이 나를 불렀다. 나는 고개 돌려 그를 마주했다.
“몸조심하셔야 합니다.”
“물론이죠.”
활짝 웃으며 내가 대답했다.
“이안 님도 조심하셔야 해요. 과로하지 말고, 무리하지 말고. 떠넘길 수 있는 건 부하들에게 떠넘기고.”
“유의하겠습니다.”
나는 순순히 대답하는 이안의 머릿결을 쓰다듬었다. 일 년 전만 해도 내 목을 검으로 위협하던 남자가 이렇게 착해질 줄 누가 알았을까.
“그럼, 이 이후부터는 이안 님과 둘만 다녀올게요.”
나는 배웅하러 온 사람들에게 손을 흔들고는, 이안과 단둘이 마차에 올라탔다.
이윽고 마차가 사람들을 등지고 움직이기 시작했다. 의식이 진행될 장소를 향해서.
나는 두근거리는 심장을 누르며 이안의 손을 꼭 쥐었다.
일 년 만에 보는 고향은 어떨까.
소연이는 잘 지내고 있을까?
날 보면 과연 어떻게 반응할까.
그런 것들을 생각하면 절로 가슴이 뛰었다.
마차가 수도를 지나쳐 드넓은 평원에 도착했다. 의식이 이루어질 장소였다.
마차에서 내리지 않은 채 나는 이안을 돌아보았다.
“저 없이, 너무 즐겁게 지내시면 안 돼요.”
이안이 나를 빤히 바라보았다.
“부인이야말로 절 잊으면 안 됩니다.”
“하하, 설마요.”
어떻게 그럴까.
이안은 내가 인생을 통틀어 만난 사람 중 가장 존재감이 큰 인물이었다. 가장 나를 행복하게 만들어 준 사람이기도 했다. 그런 사람을 잊는다는 건 불가능한 일이었다.
“무사히 돌아올게요.”
“예.”
이안이 다가와 나를 끌어안았다.
“반드시 지켜 주셔야 합니다, 그 약속.”
“물론이죠.”
나는 그의 품속에서 고개를 들곤 배시시 웃었다.
“한 달 뒤에 뵈어요.”
이안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의 푸른 눈이 처음 볼 정도로 짙은 우수에 차 있어서, 죄책감이 쿡쿡 가슴을 찔러 왔다. 두고 가선 안 될 사람을 두고 가는 기분이었다.
“식사 잘 챙겨 먹고요.”
“그대야말로.”
“잠도 푹 자야 해요.”
“부인께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일도 꼭 조금만 하고…… 아, 이러다간 끝이 없겠네요.”
나는 질끈 눈을 감곤 크게 마음먹었다.
“이제 정말 가 볼게요. 걱정 마요. 정말 안전하게 돌아올 테니까.”
그제야 나는 이안과 함께 마차에서 내렸다.
붉은 달이 밤하늘을 오묘하게 물들이고 있었다.
그 아래에서 보는 이안은 평소보다도 비현실적으로 아름다워 보였다.
‘한 달 동안, 참을 수 있을까.’
아마 참기 힘들겠지.
한 달 내내 밤마다 그리움에 몸서리칠 나날이 눈에 보이듯 선했다.
“이젠 정말 가 봐야…… 읏.”
이안의 손이 내 목을 그러쥐었다. 순식간에 다가오는 입맞춤을 나는 눈 감고 맞아들였다.
내내 이 순간에 박제되어 있고 싶을 만큼 길고 달콤한 입맞춤이었다.
* * *
수도의 공기가 어수선하게 달아올라 있었다.
국가 공휴일을 맞은 수도인들, 타지에서 온 여행객들까지 가세하여 거리가 온통 북적거렸다.
길거리에 나부끼는 신문은 어느 신문사든 같은 사람의 얼굴을 1면에 수놓은 채 비슷비슷한 타이틀을 내세웠다.
「제국에 새로운 태양이 뜨다!」
오늘은 이안 에스테반이 공식적으로 레하트 제국의 새로운 주인이 되는 날이었다.
한 달이나 공석이었던 제위에 드디어 주인이 들어서는 날. 오늘만을 기다린 제국민들은 설렘 가득한 속닥거림을 이곳저곳에서 나누었다.
하지만 시장통처럼 부산스러운 거리도 오늘의 황궁만큼 바쁘지는 않았다.
황궁은 오랜만에 돋아난 활력과 생기로 가득했다. 라시드의 폭정 아래 얼어붙었던 시절과는 비교할 수 없는 광경이었다.
“다들 아직도 여기서 뭐 해?”
“응? 여기 꽃장식이 아직 덜 붙어서…….”
“어휴, 이럴 때니. 지금 충성 서약식이 시작된대! 얼른 따라와!”
“어머나!”
하녀들이 부산스레 하던 일을 내버려 두고 어딘가로 향했다. 지금만큼은 하녀장도 그들을 채근하지 않았다.
황궁 사람들의 발걸음이 한 곳을 향했다. 넓디넓은 제1 연무장이 금세 인파로 가득 찼다.
연무장 한가운데에서는 황궁 기사들이 정복을 완벽히 차려입은 채 도열하고 있었다.
엘룬 교단의 성기사들을 제외하면, 제국 최강이라 일컬어지는 기사들이 줄지어 늘어선 채 한 곳만을 바라보고 있었다.
시선의 중심에는 한 남자가 서 있었다.
찬란한 은발을 반듯이 넘긴 남자가, 완벽한 제왕의 차림새를 한 채 연무장을 내려다보았다.
모두 숨죽여 그를 관찰하고 구경했다. 제국의 주인이 되는 영광스러운 날임에도 불구하고, 이안 에스테반의 표정에는 어떤 환희나 만족감도 떠올라 있지 않았다. 새벽녘 달과 같이 차디찬 표정에 아무도 쉽사리 입을 열지 못했다.
신호가 떨어지자, 기사들이 일제히 검을 치켜들고는 그 손잡이를 심장 부근에 가져다 대었다. 자신들의 검을 영원히 새로운 황제에게 바치겠다는 맹세였다.
극도로 일사불란하고 장엄한 광경에 몰려든 구경꾼들이 감동에 사로잡혔다.
최고의 기사들과 그들의 맹세를 받는 아름답고 강한 황제. 제국의 앞날에 밝은 미래만이 도래할 것이 틀림없다며 점치는 이들의 속닥거림이 여기저기서 들려왔다.
그러나 정작 황제의 얼굴에는 여전히 아무런 변화도 일지 않았다.
이제 황제의 보좌관이 된 루시안은, 그런 이안의 옆모습을 바라보며 남몰래 한숨을 내쉬었다.
‘벌써…… 열두 시.’
시간을 확인하자 루시안의 수심은 더더욱 깊어졌다.
오늘은, 성녀 아이린 그레이스가 떠나간 지 정확히 33일째가 되는 날.
그리고 한 달 뒤 돌아오겠다던 그녀가 약속을 지키지 않은 지 꼭 3일하고도 15시간이 지난 시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