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3화
나는 긴장한 채 목소리의 대답을 기다렸다. 아무래도 당돌한 물음이라는 자각이 없진 않았다.
‘그리스 로마 신화 속 신들은 잘해 주다가도 수틀리면 벼락을 내리치던데…….’
꿀꺽, 침을 삼키는데 목소리가 다시금 들려왔다.
‘나는 네게 해를 끼치지 않는단다. 이 세계를 위해 힘써 준 네게 왜 그러겠니.’
아차. 내 생각이 전부 들리고 있었지.
나는 흠, 헛기침을 하고는 공손히 사과했다.
‘불경한 생각 죄송해요. 제가 드리고 싶은 요구를 일단 말씀드려도 될까요?’
‘말해 보렴.’
‘저를 원래 제 세계로 돌려보내 주세요.’
내내 생각하고 있던 것을 전함과 동시에 몸에 맥이 탁 풀렸다.
나는 후, 심호흡을 하고는 다시금 생각했다.
‘오래는 아니어도 좋아요. 한 달, 아니. 일주일만이라도 좋을 것 같아요. 이곳에 남기 전에, 원래 세계로 돌아가 그곳에서의 삶을 정리하는 시간을 가지고 싶어요.’
별러 왔던 것을 와르르 쏟아 내듯 전하자, 목소리가 조용히 대답했다.
‘그게 네 결정이니? 이곳에 남겠다는 것.’
‘네.’
간단히 대답한 나는 긴장하며 침묵을 지켰다. 이후는 목소리의 결정에 달려 있었다.
‘두 번 다시 번복할 수 없는 결정이야. 나라고 해도 세계에 매인 존재의 인과를 이리저리 뒤바꿀 수는 없단다.’
‘알고 있습니다.’
‘후회하지 않을 자신이 있냐고 묻는 것은 의미 없겠지?’
나는 엷게 웃었다.
후회하지 않을 자신이, 과연 내게 있을까?
‘아니. 그런 자신은 없어.’
이쪽 세계에 있으면서 어떻게 좋은 일만이 있을까.
싫고 슬픈 일도 있을 것이고, 지구가 그리울 날도 얼마든지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럼에도 나는 이 세계가 남은 내 날들에 가져다줄 기쁨에 가능성을 걸고 싶었다. 그게 내가 내린 결론이었다.
‘마음을 정했구나.’
목소리에 부드러운 웃음기가 서렸다.
‘좋아. 그렇다면 나도 네 결정을 돕겠다. 하지만 그 전에, 원래 세계로 돌아갔다 오고 싶다고 했니?’
‘네. 정리하고 싶은 것들이 많아요. 아무래도 갑작스레 오게 되어 버렸으니까요.’
신의 책임감을 자극하기 위해 꾹꾹 힘주어 전하자, 목소리가 말했다.
‘그래.’
‘네?’
‘들어주겠다고 했다.’
‘……감사합니다. 감사해요!’
나는 환희에 차 눈을 반짝 떠 신상을 올려다보았다.
신이 들어줄지에 대한 확신은 그리 크지 않았다.
아무리 신이라고 해도 세계를 왔다 갔다 하게 만드는 것이 쉬울 리 없었다. 이전에 독대했을 때도 한 번 머물 세계를 정하고 나면 돌이킬 수 없다는 경고를 들었기에 더더욱 자신 없었다.
하지만 걱정한 것과 달리 신의 대답은 간결하고 명료했다. 안도감이 가슴을 쓸어내렸다.
‘다음 붉은 날이 뜨는 밤, 준비하렴.’
‘알겠습니다!’
나는 열렬히 고개를 끄덕였다.
이전에 알아본 바로는, 다음 붉은 달은 불과 보름 뒤에 뜰 예정이었다.
‘준비하겠습니다. 걱정 마세요!’
‘기뻐 보이니 좋구나.’
나는 고개를 빠르게 끄덕였다.
기쁘지 않을 리가 없었다. 이 세계에 남기로 했다 하더라도 원래 세계에 대한 미련이 눈 녹듯 사라지는 건 아니었다. 무엇보다 소연이와 다시 만나 제대로 작별 인사를 할 수 있다는 점이 기뻤다.
기도를 마무리한 나는 신상에 경건히 인사한 뒤 기도실을 나섰다.
“벌써 끝나셨습니까, 성녀님!”
“네. 수고가 많으세요.”
입구를 지키던 기사들이 반가이 나를 맞았다.
‘벌써’라고 말하는 걸 보니, 이번엔 저번 기도와 달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은 모양이었다.
복도를 걸어 나가려던 나는, 저 너머에서 기다란 그림자를 맞닥뜨렸다.
이안이 커다란 보폭으로 성큼성큼 내게 다가왔다.
“부인.”
“이안 님?”
뜻밖의 등장에 나는 눈을 깜빡거렸다.
햇살 찬란한 오후에 봐서 그런지 이안은 오늘따라 몹시 빛이 났다.
‘역광을 이렇게 받는 건 반칙이지. 너무 성스러워 보이잖아. 사람들 눈이 걱정되네.’
“……갑자기.”
급하게 온 듯, 늘 여유롭던 이안의 호흡이 살짝 거칠어져 있었다.
숨을 내뱉은 이안이 이어 말했다.
“갑자기 기도실로 가셨다고 들어서, 놀랐습니다.”
“놀라실 일인가요, 성녀가 기도하는 게?”
장난스레 웃으며 말하자 이안은 대꾸하지 않았다.
그저 내 안색을 살필 뿐이었다. 꼼꼼히, 어쩌면 집요한 시선으로.
“그분과, 또 대화하신 겁니까.”
“네.”
서슴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신과 이야기했다는 이야기에, 뒤에서 우리 대화를 숨죽여 관전하던 기사들이 깜짝 놀라 수군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나는 빙그레 웃으며 말을 이었다.
“이안 님 욕을 좀 했지요.”
“아이린.”
이안이 살짝 입술을 깨물고는 말했다.
“지금 절 놀리려 하지 마십시오.”
“안 놀려요.”
나는 웃음기를 지우곤 이안을 똑바로 마주했다.
“안 그래도 바로 찾아뵈려 했어요. 드릴 말씀이 있으니까.”
이안의 표정이 눈에 띄게 굳었다.
눈을 한 번 꾹 감았다 뜬 그가, 무겁게 고개를 주억거렸다.
“가시죠. 조용한 곳으로 안내하겠습니다.”
* * *
“아무도 들이지 마라.”
집무실로 나를 안내한 이안이 안에서 일하던 사용인들을 모조리 내보냈다.
커튼까지 쳐 어둑하고 적막해진 방에서 이안이 나를 돌아보았다.
“말씀하십시오, 이제.”
진지하다 못해 비장함까지 느껴지는 표정이었다.
그 모습에 조금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내 과거에 대해 털어놓은 이후, 우리는 한 번도 내 이후 거취에 대한 대화를 나눈 적이 없었다.
나는 일부러 이야기를 꺼내지 않았고, 이안은 애써 묻지 않고 있는 것 같았다.
‘만약 반대 입장이었더라면, 나 역시 엄청 마음이 닳았을 거야.’
더 일찍 결론을 내렸다면 좋았을 텐데.
사과 대신 나는 이안을 올려다보며 말했다.
“저, 결정을 내렸어요.”
이안은 대답조차 하지 않고 내 입술만을 뚫어지라 바라보았다.
“이곳에 남기로.”
“…….”
이안의 눈이 서서히 커졌다.
나는 짙푸른 눈에 내 모습이 온전히 담기는 것을 놓치지 않고 바라보았다.
“진심이십니까, 부인.”
이안이 여유 없는 목소리로 말했다. 나는 살며시 미소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고민이 늦어져서 미안해요. 아무튼 그렇게 결정했으니까, 절대, 절대 날 실망시키는 일은 없어야 할 거- 으앗!”
숨 막히는 압박감에 말을 잇지 못했다. 순식간에 나를 꽉 끌어안은 이안이 속삭였다.
“절대로. ……절대로, 그런 일은 없을 겁니다.”
나는 그의 품속에서 수줍게 눈을 깜빡거렸다.
좋아해 줄 거라고는 생각했지만, 막상 이렇게 기뻐하는 모습을 보니 약간 민망했다.
그 감정을 숨기기 위해 일부러 밝게 말했다.
“진짜죠?”
“그대가, 아무런 말이 없는 동안.”
여전히 나를 숨 막히도록 끌어안은 채 이안이 말했다.
“그대를 설득할 방법을 수백 가지 고안했습니다.”
나는 고개 숙인 채 얌전히 그의 품 안에 안겨 있었다.
이안의 말에 양심이 콕콕 찔려 왔다. 내가 늑장을 부리는 동안 마음이 꽤 많이 상한 모양이었다.
그 시간을 보상할 만큼 더 안심시켜 줘야지. 그렇게 생각하며 고개를 든 순간이었다. 안겨 있는 가슴이 울리며, 이안이 속삭이는 목소리가 들렸다.
“모르겠죠. 내가 어떤 생각까지 했는지.”
그의 품속에 갇혀 있기 때문일까?
들려오는 목소리가 이상하게 어둡고 낮도록 느껴졌다. 아무래도 내가 이안에게 죄책감을 느끼고 있긴 한 것 같았다.
나는 괜히 더 밝게 웃으며 이안을 올려다보았다.
“가둬 두기라도 할 생각이셨던 건 아니겠죠?”
그 말에 이안이 나를 빤히 내려다보았다.
어쩐지 당황스러워질 만큼, 아무런 말도 없이.
나도 모르게 입술을 더듬은 순간, 이안이 살며시 눈꼬리를 휘었다.
꽃잎처럼 매혹적인 미소를 입가에 매단 채 그가 말했다.
“설마요.”
싱거운 대답에 나는 잠자코 입을 다물었다.
갑자기 침묵은 왜 지키냐고 투정 부리고 싶었지만, 이안의 웃음에 시선을 빼앗긴 탓에 차마 그럴 정신이 들지 않았다.
홀린 듯 나는 그의 미소를 눈에 담았다. 이렇게 예쁘게 웃을 줄도 아는 사람일 줄, 처음 만날 때의 나는 미처 상상하지도 못했겠지.
“무서운 말씀을 하시는군요. 그보다, 실은.”
그 아름다운 미소를 그대로 매단 채 그가 내게 속삭였다.
“이번 주부터는 제위를 물려줄 만한 사람을 물색하고 있었습니다.”
“그러셨군요. 제위를…… 네?”
여상히 고개를 끄덕이던 나는 화들짝 놀라 눈을 끔뻑거렸다.
“방금 무슨 소릴 하신 거죠? 제위를 물려주다니. 설마 황제위를 내려놓으시겠다고요?”
“고려 중인 방안들의 하나였습니다.”
이안이 순순히 대답했다.
기가 막혀 나는 그를 멍하니 올려다보았다. 아직 황관을 머리 위에 써 보지도 못한 사람이, 제위를 남에게 물려줄 생각부터 하고 있었다고?
“안 될 말이죠! 이제 막 겨우 손에 넣으신 걸 벌써 내던지시다니요!”
황제위는 이안이 십 년간의 싸움 끝에 마침내 거머쥔 승리의 증표였다.
그뿐일까? 제국 정점의 권력 그 자체이기도 했다. 아무리 권력욕이 없는 사람이라 해도 레하트 제국 황제위에 눈이 돌아가지 않을 리는 없었다.
“제가 황관을 갖고 싶어서 복수한 게 아니라는 건 부인께서도 잘 알고 계시지 않습니까?”
이안이 의아하다는 듯 물었다.
“그, 그건…… 그렇죠.”
순수한 의문을 담은 그 물음에 민망한 기분이 들었다.
그래. 그랬지. 이안은 그저 부모에 대한 복수를 하기 위해 라시드를 벌한 것이 전부였다. 그에게 황제위는 안중에도 없었을 것이다.
아무래도 이 방 안에서 속물은 나뿐인 모양이었다. 약간 부끄러워진 내가 어물거렸다.
“그래도, 곧장 다른 이에게 넘겨도 됐을 황관을 굳이 쓰기로 하신 건…….”
“아시지 않습니까. 책임감 때문이란 걸.”
이안이 자연스레 내 말을 받았다. 그 말에 수긍하면서도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
“그런데, 왜 방금은 벌써 제위를 넘기시겠다고……?”
“생각해 보니 의미가 없겠더군요. 책임을 다했다고 칭찬해 줄 존재가 곁에서 사라진다면.”
담백한 대답에 나는 잠시 말을 잃었다.
내가 아는 이안은 복수에 미쳤지만 기본적으로 내재된 도덕성이 강한 인물이었다. 제국민들을 위해 원하지 않는 제위를 짊어지겠다고 결정한 책임감만 봐도 그랬다.
그랬던 사람이, 방금 무어라고 내게 속삭인 거지?
‘내가 알던 이안과, 조금 다른 것 같은데…….’
나는 멍하니 이안을 올려다보았다. 내가 읽어 온 이안과 지금 내 눈앞에 있는 이안은 다른 사람이었다. 어디선가부터 달라졌다.
“제가 지금 얼마나 기쁜지 그대는 상상하지 못할 겁니다.”
천사보다 달콤하게 미소 지으며 이안이 말했다.
“제 십 분의 일만이라도 그대가 행복해진다면 더할 나위 없을 것 같습니다.”
나는 볼을 붉혔다. 내가 곁에 남기로 한 것이 행복하다고, 이안은 노골적이고 적나라하게 밝히고 있었다. 아무리 내가 뻔뻔한 사람이라고 해도 조금 민망할 수밖에 없었다.
“어느새 날이 어두워졌군요.”
이안의 목소리가 낮게 귓가를 간지럽혔다.
나는 황당한 얼굴로 그를 올려다보았다.
“저렇게 두꺼운 커튼을 쳐 두셨으니까요. 걷어 보면 아주 환할걸요?”
내 타당한 지적에 수긍하는 대신, 이안이 더 기가 찬 소리를 해 왔다.
“어두워서 그런지 벌써 피곤한 것 같습니다.”
“…….”
“이르게 침실에 들고 싶은데. 부인 생각은 어떻습니까?”
가당치 않은 말로 유혹하는 목소리가 아교처럼 귓가에 달라붙었다.
‘아직 더 전할 말이 있는데.’
지구에 돌아갔다 오겠다는 말도 아직 하지 못했다.
용건을 모두 전한 게 아니라는 사실을 상기하면서도, 가쁘게 뛰기 시작하는 심장 탓에 멀쩡한 생각을 하기 힘들었다.
나는 마시멜로를 앞에 두고 참지 못하는 아이처럼 그의 품에 몸을 맡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