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0화
‘그건…….’
나는 찬찬히 과거를 되짚어 보았다.
사실 나는 기억력이 그렇게까지 좋은 편은 아니었다.
나쁜 편은 아니었지만, 어느 페이지의 몇 번째 문단에 어떤 내용이 있는지까지 기억하는 수준은 절대 못 되었다.
하지만, 원작에 대해서만큼은 달랐다.
‘이상하다고 생각한 적도 몇 번 있었지.’
아무리 내가 원작을 좋아해서 닳도록 읽었다지만, 그것만으로는 설명되지 않을 만큼 생생한 기억에 당황한 적도 꽤 있었다.
그때마다 극한의 상황에서 내 뇌가 빛을 발한 모양이라고 납득하고 넘어갔었는데.
‘그게 전부, 내 뇌가 한 일이 아니었다고?’
‘내 도움을 스스로의 두뇌 능력으로 착각하고 있었던 건 아그네스와 똑같구나.’
목소리가 관찰하듯 말했다.
아그네스.
그 이름을 듣는 순간 떠오르는 본론이 있었다.
‘아그네스 님께서는, 원래 있던 세계로 무사히 돌아가셨던 게 맞나요?’
‘그래.’
목소리가 담담히 대답했다.
‘그곳에서 명을 다했지, 그 아이는.’
‘저 역시도, 돌아갈 수 있는 건가요?’
의도치 않게 수많은 이야기를 듣게 되었지만, 이 기도의 진짜 본론은 이것이었다.
나는 긴장하며 목소리의 대답을 기다렸다.
대답은 조금의 틈도 없이 곧바로 돌아왔다.
‘물론이지. 그 아이가 한 일을 너라고 왜 하지 못할까.’
‘…….’
긍정의 답이었다.
순간 탁, 온몸에서 힘이 풀렸다.
그토록 고대했던 귀향의 길이 드디어 눈앞에 펼쳐지려 하고 있었다.
그것도 신이라는 절대자의 허락 속에서.
‘지구에서의 제 몸은, 무사한가요?’
하지만 마냥 안심할 수만은 없었다.
막상 정말 돌아갈 수 있다고 생각하니, 걱정되는 게 한두 가지가 아니었다.
일단 일 년 가까이 방치되었을 내 몸이 걱정스러웠다. 살아 있기는 한 걸까?
‘보고 싶으니?’
‘네?’
‘로즈안나도 꽤 잘해 나가고 있는 듯하더구나. 너만큼은 아니지만 말이다.’
로즈안나가, 뭘 잘해 나가?
이해가 되지 않아 멍하니 조각상을 올려다보자, 목소리가 웃음기를 띠었다.
‘직접 보는 것보다 이해가 빠른 게 없지. 자, 눈을 감아 보렴.’
나는 혼란스러운 가운데에서도 시키는 대로 곧잘 눈을 감았다.
머지않아 새까맣던 시야가 일렁거리기 시작했다.
당황할 새도 없이 또렷한 영상이 내 눈 앞에 펼쳐졌다.
‘여긴.’
지구였다.
내가 한평생을 살아온 바로 그곳.
현대적인 복장들과, 도로를 지나다니는 자동차. 사람들이 들고 다니는 휴대폰.
익숙하면서 조금은 낯설어진 풍경들이 가득했다. 총천연색 꿈을 꾸고 있는 기분이었다.
‘세상에. 저 시리즈는 아직도 방영 중이네.’
빌딩에서 즐겨 보던 드라마 광고를 발견한 나는 입을 떡 벌렸다.
기억 속 마지막은 시즌 2였는데, 어느새 5가 예고되고 있었다.
‘저 정도면 주인공이 아니라 주인공 손주들이 나오는 거 아냐?’
그 외에도, 일 년 만에 보는 지구는 새삼스러운 것투성이였다.
넋 놓은 채 시야에 들어오는 모든 것을 구경하던 나는 문득 숨을 멈췄다.
‘저건.’
나였다.
평생 봐 온 내 모습을 못 알아볼 리 없었다.
내 얼굴, 내 몸이 휴대폰을 들여다보며 바삐 어딘가를 향해 걷고 있었다.
나는 믿을 수 없어 커다래진 눈으로 그 광경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그리고, 그 옆에는.
“지도 앱 보는 걸 아직도 헤매면 어떡해. 자, 여기야. 이쪽으로 쭉 가면 돼.”
내 휴대폰을 함께 들여다보며 누군가가 잔소리를 했다.
“잘해. 알겠어? 서연이 얼굴에 먹칠하지 말고!”
소연아.
친구의 얼굴을 본 순간 온몸에서 맥이 풀렸다.
단지 이름이 비슷하다는 이유로 친해졌던 내 친구.
소연이는 그대로였다. 연한 갈색 단발부터, 피부처럼 항상 입던 슬랙스까지 전부.
이마에 점은 뺀다더니 아직도 마음을 못 먹은 모양이었다.
소연이를 이리저리 뜯어보고 있자니 나도 모르게 눈가에 물기가 고였다.
소연이의 말에 내 얼굴을 한 누군가가 대답했다.
“고마워.”
“필요 없어. 누누이 말했듯이, 난 네가 아니라 서연이 커리어가 걱정돼서 도와주고 있는 거니까.”
‘소연아, 나한테 커리어가 어디 있어.’
이제 대학교를 막 졸업한 내게 커리어라 할만한 것은 쥐뿔도 없었다.
나를 상당히 올려쳐 주는 발언에 나도 모르게 피식 웃음이 나왔다. 뻔뻔스러운 매력은 여전한 모양이었다.
그런데 저렇게 말하는 걸 보니, 소연이는 내 몸 안에 있는 것이 내가 아니라는 걸 알고 있는 듯했다.
‘저 안에 있는 건…… 로즈안나겠지.’
내가 로즈안나의 몸에 들어왔듯, 그녀 역시 내가 되어 생활하고 있는 거였다.
생각해 보면 퍽 당연한 일이었다.
17번은 어디 있냐는 4번의 물음에 왜 대답해 주지 못했을까 의아할 만큼.
이서연 안에 있는 게 이서연이 아니라는 걸, 소연이는 언제쯤 깨달았을까? 알게 된 순간에는 또 얼마나 놀랐을까.
그래도 지금은 알맹이 바뀐 내게도 어느 정도 적응하고 있는 모양이었다. 저렇게 잔소리까지 하면서도 함께 다니는 걸 보면.
‘그런데, 둘이 어딜 가고 있는 거지.’
머지않아 로즈안나와 소연이가 한 빌딩 안으로 들어섰다.
빌딩 이름을 확인한 나는 눈을 크게 떴다.
T&G 그룹. 대학교 1학년, 취업 오리엔테이션을 들을 때부터 내 꿈의 회사였던 곳이었다.
‘저길 왜 들어가지? 잠깐. 잘하라는 소리가, 설마!’
로즈안나, 지금 면접을 보러 간 거야?
생각지도 못한 전개에 당황하고 있는데, 장면이 빨리감기하듯 빠르게 재생되었다.
잠시 뒤 새로운 장소가 펼쳐졌다. 내 자취방이었다. 어떻게인지는 몰라도 아직 월세를 유지하고 있는 모양이었다.
익숙한 방 속에서 로즈안나와 소연이가 함께 심각한 표정으로 모니터를 들여다보고 있었다.
그리고, 잠시 후.
“헉. 됐다! 됐어!”
소연이가 팔짝 뛰었다.
“합격했다고!”
나는 깜짝 놀라 함께 모니터를 들여다보았다.
그 안엔 ‘인턴 합격’이라는 글자가 선명한 푸른빛으로 적혀 있었다.
세상에. 지금 내가, 아니. 로즈안나가 T&G 인턴에 합격했다는 거야?
나는 너무 당황해서 모니터를 한 번, 그리고 로즈안나를 한 번 바라보았다.
T&G 인턴은 졸업반 내내 준비해 온 내 첫 번째 목표였다. 그걸 로즈안나가 이 세계에 온지 일 년 만에 이루었다고?
‘도대체 어떤 일 년을 보내온 거야……!’
나도 숨 가쁜 일 년을 보냈고, 성공적이었다고 자부할 수 있었지만, 로즈안나 역시 나름대로 피 튀기는 시간을 보내고 있었던 모양이었다.
“고마워요. 정말. 축하해 줘서.”
소연이에게 그렇게 말하는 로즈안나의 눈가가 발갛게 물들어 있었다.
거기까지 본 순간, 시야가 다시금 까맣게 물들었다.
‘이 정도면 궁금증이 해결되었니?’
더 보고 싶었는데.
아쉬움을 누르며 나는 이마를 감싸쥐었다. 아직 머리가 많이 혼란스러웠다.
‘으음, 해결은 충분히 됐는데…… 같은 영혼인 것, 정말 맞나요? 저 친구가 저보다 훨씬 똑똑한 거 같은데…….’
‘재밌는 소릴 하는구나. 스스로를 질투할 줄도 알다니, 이 점은 아그네스와 다르군.’
나는 지끈거리는 머리를 꾹꾹 눌렀다.
단기간 내에 너무 많은 정보를 받아들였더니 두통이 일었다.
‘피곤해 보이는구나. 조금 쉬겠니?’
‘다시 오면, 또 저와 대화해 주실 건가요?’
‘언제든지.’
나는 한동안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돌려보내 달라고 한마디만 하면, 신은 곧바로 날 다시금 내 자리로 돌려보내 줄 것 같았다.
그러면 나는 소연이도 다시 보고, T&G 인턴 자리까지 날로 먹게 되는 것이다.
그런데, 입술이…….
좀처럼 쉽사리 떨어지지 않았다.
“…….”
한참 동안 침묵하던 내게 목소리가 말을 걸었다.
‘붉은 보름달이 뜨는 날을 기억하렴.’
‘네?’
‘그 밤에만 나는 너를 저쪽 세계로 돌려보내 줄 수 있으니.’
‘……아.’
나는 멍하니 고개를 끄덕였다.
신이라고 해서 어느 때고 자유롭게 나를 옮겨 줄 수 있는 것은 아닌 모양이었다.
붉은 보름달이 뜨는 날.
정확히 언제인지는 알 수 없지만, 그날까지는 아직 생각할 수 있는 시간이 남아 있다는 뜻이었다.
“하아…….”
나는 나도 모르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 한숨에 왜 안도의 기운이 섞여 있는지에 대해서는, 지금은 생각할 겨를이 없었다.
머릿속이 너무 복잡해서 터져버릴 것 같았다.
목소리에게 작별 인사를 건넨 나는 몸을 일으켰다. 오랫동안 무릎 꿇고 있던 다리가 찌르르 고통을 호소했다.
절뚝거리며 기도실 문을 연 순간이었다.
“괜찮으십니까?”
놀란 목소리가 나를 맞이했다.
나는 나를 부축하는 이안을 멍하니 올려다보았다.
“언제부터, 계셨어요?”
“그대가 저녁도 거르고 기도실에 들어 있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부터.”
저녁을 걸렀다고, 내가?
나는 깜짝 놀라 창밖을 내다보았다. 정말 하늘이 먹물처럼 새까맸다.
‘세상에. 도대체 시간이 언제 이렇게 지났지?’
기껏해야 한 시간 정도 흐른 줄 알았는데, 그런 수준이 아니었던 모양이었다.
“그렇게 오래 있었던 줄, 몰랐어요.”
멍하니 말하자 이안이 조용히 물어왔다.
“신께 기도를 올리셨습니까?”
“……네.”
“그분께서 응답하시던가요.”
나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이안은 잠시 말없이 나를 바라보기만 했다. 몇 초간의 공백 뒤, 그가 나지막이 입을 열었다.
“돌아갈 방법에 대해, 그분께 여쭈셨습니까.”
“…….”
나는 커다래진 눈으로 그를 올려다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