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9화
뭐지.
나는 고개를 갸웃했다.
아그네스의 일대기에는 분명, 그녀가 돌아가는 의식을 행하기 전 매일 기도실에 틀어박혀 있었다는 대목이 있었다.
그 뒤 이루어진 의식이 워낙 구체적이어서, 나는 그녀가 엘룬 신에게 자세한 지침을 직접 전달받은 게 아니었을까 의심했었다.
‘꽤 합리적인 의심이라고 생각했는데…….’
물론 신과 일대일로 대화한다는 가정이 썩 합리적으로 보이진 않지만, 그렇게 따지면 내가 처한 상황 자체가 불합리의 극치이지 않은가.
하지만, 내가 잘못 짚었던 걸까?
‘그러면 아그네스는 그 구체적인 의식 절차를 어떻게 생각해 낸 거지?’
그 수많은 재료와 복잡한 절차는 아무리 생각해도 누군가 명확히 지시해 준 것이라고밖엔 여겨지지 않았다.
아무튼, 이 방법으로는 안 되는 건가.
그렇게 생각하며 자리를 털고 일어나려던 때였다.
‘……앙심이…… 없어도 너무 없구나.’
어라?
나는 눈을 커다랗게 떴다.
방금 분명, 무슨 소리가 들렸는데?
‘……가 먹은 건지, 원…….’
맙소사!
나는 입을 틀어막았다.
정말 누군가의 목소리가 내 머릿속을 통해 들려오고 있었다.
소름이 쫙 끼치는 것을 느끼며 나는 스스로의 팔을 감싸 안았다. 굉장히 으스스한 기분이 들었다.
‘나를 마치 삿된 유령 취급…… 는구나.’
‘에, 엘룬 신님이세요?’
‘……렇다.’
이럴 수가.
나는 입을 쩍 벌렸다. 머릿속에서 들려오는 목소리는 너무나 근엄하면서도 인자해서, 신의 음성 그 자체라고밖에는 생각할 수 없었다.
이게 진짜 되는구나.
나는 믿을 수 없는 기분을 느끼며 계속해서 머릿속 신의 목소리에 말을 걸었다.
‘무례를 범했습니다. 정말 대화가 되리라고는 저도 반쯤 믿고 있지 않았어요.’
‘……일론…… 같으니.’
그런데 문제가 있었다.
신의 목소리가 거의 주파수 잘못 잡은 라디오처럼 흐릿하게 들려왔다. 지직거리는 듯한 잡음은 덤이었다.
‘그런데 왜 이렇게 소리가 잘 안 들리지?’
‘그건 네 신앙심이 턱없이 부족하기 때문이다.’
헉.
그냥 속으로 의문을 가진 것뿐인데, 신의 대답이 또렷이 돌아왔다.
내 생각까지 저쪽에서는 모두 읽고 있는 모양이었다.
하긴, 정말 신이라면 그 정도는 가뿐하겠지. 새삼 굉장한 긴장감이 들었다.
‘신앙심, 이요?’
‘그래. 이제야 좀 목소리가 전달되는 걸 보니, 대화하는 동안 실시간으로 나를 믿게 되고 있는 모양이구나.’
그야 당연했다.
이렇게 직통으로 머릿속에 신의 목소리가 들려오는데, 믿지 않을 수가 없었다.
정말 신과 대화하고 있다는 확신이 들자 나도 모르게 본론이 튀어나왔다.
‘저를 이 세계로 보낸 건 엘룬 님의 의도인가요?’
‘그래.’
변명조차 없는 깔끔한 단답에 기가 막혔다.
나는 황당한 눈으로 엘룬 신의 조각상을 쏘아보았다. 신이고 뭐고 이 순간만큼은 고운 눈초리가 나가지 않았다.
‘그렇게 보지 말거라. 나로서도 어쩔 수 없는 안배였으니.’
‘어쩔 수 없는 안배라니요? 그게 무슨 말씀이시죠?’
신에게도 ‘어쩔 수 없는’ 것이 있단 말인가?
그게 무슨 신……
아, 참. 생각이 읽히고 있지. 나는 얼른 머릿속을 가다듬었다.
‘세계가 차고 기우는 명운은 나로서도 크게 개입할 수 없단다.’
‘세계가 차고 기울어……?’
세계가 기운다는 건, 즉 멸망을 뜻하는 것일까?
내 당황을 읽었는지 엘룬 신이 설명을 시작했다.
내용은 처음부터 끝까지, 모조리 충격적이었다.
‘너의 세계에서 이곳에 대한 이야기를 읽은 적이 있겠지.’
‘네! 역시 알고 계시는군요.’
‘그 이야기 뒤에는 이어지는 결말이 있다.’
나는 눈을 크게 떴다.
원작은 제국을 구한 엘리엇과 셀레나가 평화롭게 나라를 다스리는 것으로 끝난다.
그게 결말이 아니었다고?
인자한 머릿속 목소리가 마치 동화책을 읽듯 설명을 이었다.
이안을 죽이는 데 성공한 원작 속 엘리엇과 셀레나는, 그의 시신을 전사들의 안식처에 안치했다.
문제는 이안의 사체가 머금고 있던 치명적인 독이었다.
이안을 꼭두각시로 만드는 데 성공한 나인 놈들은 그를 지상 최대의 생체 병기로 만들겠다는 야심에 사로잡혔다.
노예들에게 일삼던 온갖 실험의 정수를 이안에게 쏟아부은 결과, 그는 마물이나 다름없는 상태가 되었다.
결국 이안은 주인공 커플과 전 제국군이 달라붙어도 처리하기 힘든 괴물이 되어 버렸다.
마왕급 마물보다도 강해졌으나, 그 속은 썩어 문드러질 대로 문드러져 살짝만 건드려도 폭발할 수 있는 화약고 같은 상태였다고 한다.
생명을 빼앗긴 뒤에도 그 육체가 가진 위험성은 그대로였다. 육신이 머금고 있던 마기는 이안이 죽으면서 그의 성력이라는 마지막 바리케이드마저 사라지자 미쳐 날뛰며 대륙을 잠식했다.
이안의 사체로부터 흘러나온 마기가 순식간에 전 대륙의 마물들을 자극했고, 이안과 나인을 상대하느라 전력이 많이 소모되어 있던 제국군과 성기사단은 거기 대비할 여력이 남아 있지 않았다.
거짓말처럼 순식간에, 그렇게 레하트 제국은 멸망의 길을 걸었다고 한다.
가장 큰 나라를 무너뜨린 마물들은 파죽지세로 그 외 소국들도 집어삼켜 나갔다. 머지않아 전 대륙이 마물에게 짓밟혔고, 대지는 잿빛으로 죽어 버렸다.
여기까지가, 엘룬 신에게 전달받은 원작 이후의 이야기였다.
‘말도 안 돼.’
도무지 믿을 수가 없었다.
내가 제일 좋아하는 캐릭터였던 이안을 잃었지만, 그래도 주인공 커플과 등장인물들이 행복하게 마무리되었던 엔딩만큼은 좋아했었는데.
그 엔딩이 사실은 거짓이었다고?
‘그게, 그게 정말 사실이라면…… 왜 책에는 전부 적혀 있지 않았던 건가요?’
‘네가 이해할 수 있는 단어로 표현하자면, 그래. 용량이 초과되었다고 할 수 있겠구나.’
‘네?’
눈을 끔뻑이자 목소리가 설명을 이었다.
‘너무 많은 정보를 전달했다가는 형평성의 저울이 기울어지지. 저 너머에 이 세계의 이야기를 전해야만 했으나, 전부 담을 수는 없었단다.’
목소리는 마치 자신에게도 지켜야 할 규칙이 있다는 것처럼 이야기하고 있었다.
신에게도 그런 제한이 있나?
의문스러웠지만, 생각해 보니 그랬다. 만약 신이라 해서 전혀 제한이 없었다면 애당초 원작 속 후일담에서 세계가 멸망할 일도 없었겠지.
가까스로 납득하며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아직 가장 이해가 안 되는 대목이 있어요.’
‘무엇이니?’
‘왜 저였죠?’
이야기를 전부 듣고 보니, 내가 이 세계로 떨어진 건 결코 우연이 아니었다.
운명의 흐름대로라면 이 세계는 멸망했어야 했다.
하지만 신이 제 권능으로 시간을 되돌렸고, 직접적으로 개입하지 못하는 대신 운명의 흐름을 뒤바꿀 누군가를 투입했다.
여기서 그 ‘누군가’의 역할이 바로 나였다.
‘엄청나게 어마어마한 역할이잖아.’
내게 이 세계를 구원해야 하는 사명이 있었다니.
이안의 침대에 떨어질 당시에는 전혀, 꿈에도 예상치 못한 사항이었다.
‘저보다 훨씬 똑똑하고 용감한 사람이 지구에도 널렸을 텐데요. 왜 하필 저였나요?’
‘몇 가지 조건이 필요했지. 먼저, 이 세계의 이야기를 읽은 사람일 것. 그리고, 이 세계에 존재하는 영혼과 파장이 맞는 사람일 것.’
‘파장이 맞는 사람……?’
‘로즈안나 말이다.’
로즈안나?
처음 듣는 이름에 나는 눈을 끔뻑였다. 머릿속 목소리가 설명을 이었다.
‘네가 17번이라고 알고 있는 아이. 그 아이가 태어났을 적 어머니에게 받았던 이름이다.’
‘……아.’
로즈안나. 아마 17번 자신도 평생 몰랐을 그녀의 진짜 이름이겠지. 그렇게 생각하자 기분이 몹시 묘해졌다.
그나저나, 잠깐. 내가 17번과 영혼의 파장이 어떻다고?
‘그 말씀은, 제가 로즈안나와 사는 세계가 다를 뿐 같은 영혼, 그러니까 같은 사람이라는 이야기로 들리는데요…….’
‘이해를 잘하는구나.’
담담한 인정에 머릿속이 멍해졌다.
내가 17번과, 아니. 로즈안나와 같은 사람이라고? 내가 로즈안나라고?
‘마침 그 아이는 이 세계를 떠나길 간절히 기도했었지. 그 기도 덕분에 나는 그 아이의 존재를 또렷이 인지했고, 다른 세계선 속 그 아이인 네 존재 역시 알아낼 수 있었단다.’
‘…….’
머리가 지끈거려왔다.
신의 이야기는 지나치게 추상적이었고, 고차원적이었다. 평범한 인간인 나로서는 이해하려 들면 곧잘 머리가 아파 올 만큼.
그래도 대충, 내 식으로 어떻게든 납득이 되지 않는 건 아니었다.
즉 나와 로즈안나는 동일 인물이고, 마침 내가 이 세계의 이야기인 원작을 읽은 덕에 이곳으로 끌려올 안성맞춤 인재가 되었다는 이야기, 맞겠지?
혼란스럽긴 하지만 얼추 정리는 되었다.
하지만 아직 억울한 부분이 있었다.
‘말씀을 듣자 하니, 제가 굉장히 중요한 역할을 수행하기 위해 여기 온 건 확실한 것 같은데요. 왜 저를 그냥 덜렁 던져 놓기만 하셨죠? 제 임무의 막중함을 생각하면, 도움의 손길을 주실 만도 하셨는데요.’
그렇잖아.
소설이나 영화를 보면, 세계를 구하기 위해 파견된 용사들은 다양한 특전을 갖던데. 가령 초능력이라거나, 인맥이라거나.
하지만 내겐 아무것도 없었다. 있기는커녕 이 세계에 떨어진 그 순간부터 목숨을 위협받기 바빴지. 그 뒤로도 목이 달아날 뻔한 적이 수차례였다.
‘도움의 손길이 왜 없었다고 생각하니?’
목소리가 진심으로 의아하다는 듯 말했다.
아. 그러고 보니 아무것도 없었던 건 아니었지.나는 겸연쩍은 표정으로 정정했다.
‘물론 언령은 놀라운 능력이기는 했어요. 그것 덕분에 헤쳐 나갔던 어려움이 많았죠.’
‘내가 이야기한 도움은 그것이 아닌데.’
응?
나는 다소 멍청히 되물었다.
‘……예?’
‘생각해 보렴. 네가 중요한 예지를 해야 했을 때, 한 번이라도 기억력의 막힘이 있었던 적이 존재했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