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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8화 (148/161)

148화

“미친 건가?”

스릉, 곁에서 섬뜩한 소리가 들렸다.

이안이 4번을 노려보며 검을 뽑아 들고 있었다.

“꺄아악!”

난데없는 발도에 여유로이 거리를 걷던 사람들이 비명을 지르며 달아났다.

그러나 4번만은 꼼짝 않고 나만을 바라보았다.

“안 그래도 꼭 뵙고 싶었습니다.”

“정신이 단단히 나갔군.”

이안이 나를 제 뒤로 숨기곤 4번에게 검을 겨눴다.

“성녀께서 너그러이 네놈을 용서하셨으면 죽은 듯 살 것이지, 감히 접근해 오다니.”

이안의 목소리에는 분노가 묻어 있었다.

나는 그의 어깨 너머로 4번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세뇌당한 것을 참작해 나는 4번을 석방해 줄 것을 요청했었다. 그 역시 나인에게 당한 피해자에 불과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아이린 님, 제 이야기를 잠시만!”

“꿇어라.”

이안의 말과 함께 4번이 털썩 바닥에 무릎을 꿇었다. 4번의 팔에 매인 팔찌가 빛을 발하고 있었다.

저 팔찌는 4번이 처벌 없이 석방되는 대신 차게 된 구속구였다.

평소에는 아무런 효과가 없으나, 엘룬 교단에 속한 성기사나 성녀의 명령에는 무조건 따르게 되는 효력이 있었다.

강제로 무릎 꿇린 채로도 4번이 고개 들어 나를 올려다보았다.

“아이린 님, 17번은!”

절절한 외침에 나는 깜짝 놀라 눈을 크게 떴다.

단단히 화가 난 듯 이안이 4번에게로 걸음을 옮기려 했지만, 나는 나도 모르게 팔을 들어 그를 가로막았다.

“부인?”

“잠시만. 잠시만요.”

이전부터 찜찜했었다. 4번이 ‘진짜 17번’을 알고 있는 듯한 낌새를 보일 때마다.

“진짜 그 사람은 어디로 간 겁니까?”

“…….”

나는 꾹 입을 다물었다.

대비한 적 없는 추궁을 받자 머릿속이 새하얘졌다.

말 없는 내게 4번이 재차 외쳤다.

“4번은 대체 어디로 간 것이고, 왜 당신이 그 사람 모습을 뒤집어쓰고 있는 겁니까! 대답해 주십시오!”

“닥쳐라.”

이안이 분노한 목소리로 말했다. 다시금 팔찌가 빛을 발하고 4번의 입이 조개처럼 다물렸으나, 그의 눈빛만은 형형히 빛나며 여전히 나를 향했다.

“지금 제압하겠습니다. 말리지 마십시오.”

“아니, 아니에요. 이안 님.”

나는 멍하니 고개를 흔들었다.

4번에게로 다가가는 나를 이안이 당황한 목소리로 붙잡았다.

“부인!”

“저 사람과 해야 할 이야기가 있어요.”

“…….”

이안은 더 나를 잡지 못했다.

4번 앞까지 다가간 나는 무릎 꿇은 그의 눈높이에 맞춰 몸을 숙였다.

“그분…… ‘진짜 17번’과 아는 사이인가요?”

내 말에 4번의 눈이 찢어질 듯 커졌다. 나는 아직 다물려 있는 그의 입을 발견하곤 말했다.

“이제 말해도 좋아요.”

“역시, 당신은 그 사람이 아니었군요. 알고는 있었지만-”

“내 질문에 대답해 줘요.”

“……우린 어린 시절부터 함께해 왔습니다. 나는 나인의 실험을 일찌감치 성공적으로 ‘졸업’해 훨씬 먼저 실전에 투입되었고, 17번은 저보다 늦되었죠.”

4번은 고통스러운 목소리로 이야기를 꺼냈다.

과거에 대해 누군가에게 털어놓는 것이 처음인 듯, 그의 목소리는 어딘가 부자연스러웠다.

“노예 신분으로는 자유로이 대화 한 번 나눌 수 없었지만, 전 항상 그 사람을 지켜봐 왔습니다. 지켜 주고 싶었습니다. ……항상 실패해 왔지만.”

그랬구나.

나는 복잡한 눈으로 4번을 바라보았다.

예상하기는 했다. 내게 접촉해 오던 때의 4번은 에드워드와 달리 고압적이지도, 잔인하지도 않았으니까.

“솔직히 얘기해 주셨으니 저도 솔직하게 대답할게요.”

4번이 희망에 찬 눈으로 나를 올려다보았다.

그러나 나는 무참히 그 희망을 짓밟을 수밖에 없었다.

“진짜 17번이 어디에 있는지는, 저도 몰라요.”

“…….”

4번의 눈에 절망이 깃들었다.

나는 한숨과 함께 말을 이었다.

“믿지 못할지 모르겠지만, 사실이에요. 저도 알지 못해요. 하지만, 저 역시 그분의 행방을 찾기 위해 노력하고 있어요.”

4번이 다시금 눈을 크게 떴다.

진짜 17번이 어디 있는지, 짐작가는 바가 없는 건 아니었다.

가장 가능성 높은 건 지구였다. 내가 17번의 몸을 차지했듯이, 그 사람 역시 지구의 이서연이 되어 있을 확률이 높았다.

“……정말입니까, 아이린 님?”

“당연하죠. 제가 이런 걸로 거짓말을 할까요.”

“그렇다면, 약속해 주실 수 있나요?”

4번이 간절한 눈으로 나를 올려다보았다.

“그 사람을 찾을 때까지, 지금 하고 계시는 노력을 멈추지 말아 주십시오. ……부디.”

그렇게 말하며 4번이 푹 고개를 숙였다.

‘이 사람에게 나는, 소중한 사람의 몸을 빼앗은 강도나 다름없이 보일까.’

그런데도 내게 고개 숙여 부탁할 만큼 애타는 심정인 것이 분명했다.

나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네. 약속할게요.”

진짜 17번의 행방에 대해서는, 나 역시 죽 찾아야만 할 것 같은 책임감을 느끼고 있는 상태였다.

우리의 몸을 이렇게 뒤바꿔 놓은 것이 내가 아님에도 불구하고.

애초에, 대체 왜 이런 현상이 우리에게 벌어진 걸까?

답답함을 느끼며 나는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만약 정말 저 위 어딘가에 있을 엘룬 신이 이런 짓을 저지른 거라면, 도대체 무슨 생각이었냐고 따져 묻고 싶었다.

* * *

“아이린 님! 생각보다 빨리 오셨군요!”

성당에 도착하자마자 아네트 양이 버선발로 나와 나를 반겨 주었다.

그녀가 의아한 얼굴로 내 곁을 살폈다.

“단장님은 만나셨나요? 아이린 님을 찾으러 가셨는데!”

“그럼요. 함께 왔어요.”

함께 왔다뿐일까.

돌아오는 마차에서 나눈 입맞춤을 떠올린 나는 나도 모르게 입술을 매만졌다. 아직도 부어 있을 것만 같았다.

“저 때문에 이안 님이 이틀이나 자리를 비웠잖아요. 더 독점했다간 루시안 씨가 울어 버릴 것 같아서 얼른 보내 줬어요. 아, 그나저나!”

나는 활짝 웃으며 아네트에게 선물을 건넸다.

“이건 아네트 양 선물이에요.”

“저한테요? 어머나!”

선물을 열어 본 아네트가 눈을 커다랗게 떴다.

아네트를 위해 준비한 선물은 메이우드 특산 스노우 볼, 그리고 진주로 엮은 팔찌였다. 언젠가 함께 길거리를 걸었을 때, 가게 창문 너머로 비슷한 디자인의 팔찌를 뚫어져라 쳐다보던 모습이 기억나 구매했었다.

“아이린 님! 이렇게 귀한 걸 어떻게……!”

“얼른 받아요. 잘 어울리겠죠?”

“하지만 아무리 그래도!”

“어허.”

강경히 눈에 힘을 주자 아네트가 마지못해 선물을 받아들었다.

‘그러고 보니, 아네트 양에겐 제대로 된 사례를 아직 하지 못했지.’

이 세계에 온 지 얼마 되지 않은 시점, 나는 아네트에게 큰 빚을 진 적이 있었다.

이런저런 일에 정신없다는 핑계로 그때의 빚을 아직 제대로 갚지 못했는데, 아네트는 한 번도 종용해 온 적이 없었다.

아네트의 온후한 성품에 다시 한번 감명받으며, 나는 반드시 차고 넘치는 사례를 하리라 다짐했다.

조안 경과 다른 시녀들에게도 선물을 나눠 준 나는 아네트에게 물었다.

“셀레나 양은?”

“미사를 보고 계세요.”

바쁘구나.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미사라는 단어를 들으니, 나 역시 이곳에 오자마자 들르기로 했던 장소가 떠올랐다.

“여독을 푸셔야죠, 아이린 님. 마사지를 받으실래요? 받으시면서 드실 시원한 음료도 준비할까요?”

“그것도 좋지만, 나중에요.”

나는 웃으며 고개를 흔들었다.

“일단은 먼저, 기도실에 다녀올게요.”

“네에?”

아네트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기도실에요?”

성녀가 기도하러 가겠다는 게 저렇게 놀라울 일일까.

……하긴. 그간 내가 성녀로서의 의무를 좀 게을리하긴 했지. 특히 체력을 단련하는 미사는 참여율이 제로에 가까웠다.

아네트의 반응에 죄책감을 느끼며 나는 애써 미소를 지었다.

“기다리지 말아요. 오래 걸릴지도 모르니까.”

“넵, 아이린 님!”

기도하러 가겠다는 말에 아네트가 새삼 존경심 어린 눈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머쓱함을 느끼며 나는 기도실로 향했다. 아무리 나일론 성녀라지만, 성당에서 보낸 세월이 있으니 기도실의 위치 정도는 알고 있었다.

“어서 오십시오, 성녀님.”

기도실을 지키던 경비병들이 깍듯이 나를 맞이했다.

“안에 선객이 계신가요?”

“아무도 안 계십니다.”

“그렇구나. 감사해요.”

다행이었다. 내가 지금부터 안에 들어가서 올릴 기도는, 만에 하나라도 다른 이의 귀에 들어가선 안 되는 내용이었으니까.

기도실에 들어선 나는 조금 어색한 기분으로 안을 둘러보았다.

엘룬 신을 형상화한 순백색 조각상과, 그 아래 펼쳐진 하얀 꽃의 향연.

언제 봐도 절로 경건해지는 장소였다.

그 가운데에 무릎 꿇고 앉은 나는, 배운 대로 두 손을 모아 기도하는 자세를 취했다.

‘……음, 그러니까.’

막상 생전 해 본 적 없는 기도를 시작하려니 머리가 굳었다.

주기도문을 어떻게 시작하더라.

기도 시간에는 늘 눈을 감고 다른 생각만 하던 불량 성녀였기에, 주기도문을 떠올리는 것마저 쉽지 않았다.

‘에이. 그런 게 다 무슨 소용이야.’

나는 곧 생각을 고쳐먹었다.

주기도문이니 뭐니, 형식 같은 걸 중요시할 때가 아니었다.

나는 지금 신에게 따지기 위해 이 자리에 앉아 있는 거니까.

눈을 뜬 나는 커다란 엘룬 신의 조각상에게 말을 걸었다.

‘안녕하신가요, 엘룬 신이시여.’

“…….”

침묵이 이어졌다.

나는 당혹스러운 기분을 느끼며 눈을 깜빡거렸다.

때마침 주기도문 첫 구절이 떠올랐다. 어쩌면 최소한의 형식은 지켜야 하는 걸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나는 속으로 주기도문을 읊었다.

‘빛의 요람에서 태어나신 엘룬이시여. 당신의 어린양을 굽어살피어 주시옵소서.’

“…….”

여전히 돌아오는 답은 없었다. 나는 점점 더 당황스러운 기분에 잠겼다.

‘음. 여보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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