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7화
그 자국을 제외하면 이안의 등은 눈부시도록 하얗고 깨끗했다.
흉터가 눈에 띄는 팔이나 가슴과는 달리, 등에만큼은 아무런 결점도 없었다. 그가 등을 보인 적 없는 검사임을 증명하듯이.
‘깨끗한 등은 전사의 자랑이라고 했던가.’
그러나, 지금 그 자랑은 무참히 더럽혀져 있었다.
다름 아닌 내 손톱자국 때문에.
민망함과 미안함을 삼키고 있는데 이안이 아침 식사거리를 들고 돌아왔다.
“연어를 얹은 에그 베네딕트와 갓 짜낸 오렌지 주스라고 합니다. 상태가 괜찮은 것 같군요.”
메뉴를 설명하는 이안은 마치 일류 레스토랑의 지배인 같았다.
이 사람은 어째서 뭘 해도 능숙해 보이는 걸까.
그러고 보니, 어젯밤도……
어젯밤을 떠올린 나는 눈을 가느스름하게 떴다.
그때 당시에는 벅차하기 바빠 다른 생각은 해 보지 못했는데, 돌이켜보니 그랬다. 나만 모든 걸 생경해했고, 이안은 그런 나를 시종일관 달래고 살펴 주었다. 같은 초보자라기엔 믿을 수 없을 만큼 성숙한 모습이었다.
‘이상해!’
아무리 타고났다 해도, 그렇게까지 처음 해 보는 일에 능숙할 수 있는 걸까?
내가 계속해서 게슴츠레 뜬 눈으로 이안을 노려보자, 시선을 느낀 그가 꿀꺽 침을 삼켰다.
“왜 그렇게 보십니까.”
“흐음…….”
“더 사과드릴까요.”
긴장한 얼굴로 이안이 내게 다가왔다. 나는 침대맡을 가리켰다.
“이안 님. 이리 앉아 봐요.”
“예.”
잘 훈련된 군인답게 이안이 절도 있는 동작으로 내가 가리킨 자리에 앉았다.
나는 그를 향해 날카롭게 물었다.
“처음 아니었죠?”
“……예?”
“어제, 흐흠. 어젯밤 말이에요. 생각해 보니 이안 님은 아무래도 처음이 아니셨던 것 같아서요.”
“…….”
“아니, 추궁하는 건 당연히 아니에요. 저희 나이가 있는데, 과거가 있다고 이상한 일이라 할 순 없잖아요?”
“이런 말 죄송합니다만…….”
굳은 얼굴로 내 말을 듣고 있던 이안이 한숨을 내뱉었다.
눈을 치켜뜬 그가 청량한 벽안으로 나를 노려보듯 마주했다.
“황당하기 그지없군요. 어떻게 그런 말씀을 하십니까. 엘룬 신께 바치기로 했던 순결을 앗아가 놓고선.”
“제, 제가 언제, 콜록. 앗, 앗아가다니. 제가 언제 그랬어요!”
“부인하시는 겁니까?”
이안이 눈을 크게 뜨더니, 곧 속눈썹을 내리깔았다.
“바로 다음 날 아침 부정당할 줄은 몰랐는데.”
눈을 내리깔며 그렇게 말하는 이안은 누가 봐도 날 당황시키기 위한 연기 중이었다.
‘뻔뻔하기는!’
그런데 그렇게 생각하면서도 내 눈엔 이안의 저 모습이 영악하게 연기 중인 사기꾼이 아닌, 비 맞은 대형견처럼 처량해 보였다.
아무래도 시력이 단단히 맛이 간 게 분명했다.
“그게 아니라.”
생각과 달리 입이 멋대로 열렸다.
“부정한 게 아니잖아요. 저는 그냥, 이안 님이 너무 능숙했던 것 같아서, 한번 물어본 거죠.”
“능숙했습니까, 제가?”
정말 모르겠다는 듯 고개를 든 이안이 물었다.
어라. 어쩐지 내 발로 내 함정을 판 듯한 기분이 들었다. 나는 슬며시 고개를 옆으로 돌렸다.
“으음, 아마도…….”
“그런데 능숙했다는 게 어떤 의미입니까?”
이안이 계속해서 물어왔다. 그의 목소리는 정말 의구심에 가득 찬 학생처럼 들렸다.
“그대 기분을 좋게 해 드렸습니까, 제가?”
“그, 나쁘지는 않았는데…….”
내 입으로 이런 말을 하려니 얼굴이 불붙은 듯 화끈거렸다.
웅얼거리자 이안이 다시 속눈썹을 내리깔곤 말했다.
“만약 별로셨다면, 제 배려는 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저도 현실을 직시하고 앞으로 더 노력해야 할 테니까요.”
“아뇨! 별로인 건 정말 아니었고요!”
나는 황급히 대답했다.
또 말려들고 있다는 것을 직감하면서도.
“그러면, 혹 기분이 괜찮으셨습니까?”
“……좋았어요.”
나는 질끈 눈을 감고 실토하듯 대답했다.
“좋았어요, 기분. 엄청 좋았다고요.”
나는 푹 고개를 숙였다. 이안이 이 대답을 교묘히 끌어냈다는 생각을 지울 수 없었다.
여태까지 한 마리 여우처럼 내게서 살살 대답을 긁어 낸 주제에, 이안이 강아지라도 된 양 눈을 빛냈다.
“정말입니까?”
기분 좋은 듯 아래로 휘는 이안의 눈꼬리를 보자, 이젠 될 대로 되라 싶어졌다.
수치심도 내려놓은 나는 고개를 끄덕거렸다.
“네에. 처음이 아닌 거 아닐까 의심될 만큼요.”
“기쁩니다.”
대뜸 대답한 이안이 내게로 불쑥 가까워졌다.
생기로 반짝이는 벽안에 나는 흠칫 몸을 굳혔다. 어제 오늘, 이안은 처음 보는 생경한 모습만을 보여 주고 있었다.
“저만큼은 아니겠지만, 그대 역시 저로 인해 기쁨을 얻었던 것 같아서.”
“…….”
또 얼굴이 화륵 타올랐다. 나는 개미만 한 목소리로 웅얼거렸다.
“안 좋았으면, 그렇게 날 혹사하도록 내버려 뒀을까요…….”
“죄송합니다. 정말로.”
진지한 목소리로 사과해 온 이안이 정중히 물었다.
“지금부터는 모두 그대 허락을 받은 일만 하도록 하겠습니다.”
“……어젯밤에도 그러긴 하셨잖아요.”
이안이 부드러운 미소를 머금었다.
“입 맞춰도 될까요?”
또?
당황스러운 것과 달리 가슴이 쿵쿵 맥박쳤다. 나는 파르르 떨리는 속눈썹을 아래로 내리깔았다.
허락의 의미를 알아들은 이안이 내게 서서히 가까워졌다.
‘……아. 안 되는데.’
간밤의 숱한 경험을 통해, 나는 내 생각보다 내가 감각과 기쁨에 약한 인간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키스를 해 버리면, 이다음도 분명…….
그렇게 생각하면서도 나는 다가오는 이안의 입술을 저항 없이 맞아들였다.
한 시간 뒤, 이안은 식은 아침 식사 대신 새로 조리된 아침 식사를 가져와야 했다.
* * *
정오가 다 된 시간.
멍한 기분으로 차를 홀짝이고 있는데 이안이 뒤에서 살며시 나를 껴안아 왔다.
“안 돼.”
나도 모르게 반말이 흘러 나갔다.
“더는 안 돼요. 진짜.”
내가 아무리 본능에 굴복하기 쉬운 인간이라 해도 정도는 지킬 줄 알았다.
지끈거리는 온몸을 의식하며 나는 이안을 밀어냈다. 이안이 웃음을 흘리며 다시금 나를 끌어안았다.
“그게 아니라, 서연.”
내 이름을 부르는 목소리에 또 약하게 소름이 끼쳐왔다. 이젠 익숙해질 때도 되지 않았나 싶은데, 아직은 아닌 모양이었다.
“슬슬 돌아가실 생각이 있으신지, 물으려고 했습니다.”
그렇게 묻는 이안의 목소리에는 옅은 긴장이 배어 있었다.
‘……아. 그 얘기였군.’
괜히 지레 거절부터 했던 것이 부끄러워졌다. 나는 민망함을 감추기 위해 일부러 도도한 표정을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네. 그래야죠. 이 정도면 바깥바람은 다 쐰 것 같으니까.”
솔직히 말하면, 아직 가출을 감행했던 원흉이 해결된 것은 아니었다.
나는 아직까지도 지구로 돌아가는 문제에 대해 결론을 내리지 못했으니까.
어쩌면 문제가 더 심각해진 것 같기도 했다.
나는 날 감싸 안은 이안의 팔을 내려다보며 고민에 빠졌다.
어제와 오늘을 지내며, 나는 지구로 돌아가야겠다는 내 확신에 조금 더 자신이 없어졌다.
‘하지만, 이젠 알겠어. 회피하기만 한다고 해서 해결될 일이 아니라는 걸.’
일단 성당으로 돌아가자.
아늑한 내 공간에서 충분히 생각을 해 보고, 이안과도 많은 이야기를 나눠 볼 필요성이 느껴졌다.
“정말입니까.”
되묻는 이안의 목소리에서 약간의 기쁨이 느껴졌다.
“지금 바로 돌아가시겠습니까, 그럼? 마차는 대기 중입니다.”
“지금 바로…….”
나는 그의 말을 되풀이하며 나도 모르게 창밖을 돌아보았다.
단풍으로 얼룩진 메이우드의 거리는 낮에 보니 또 다른 아름다움이 있었다.
‘기껏 이곳까지 왔는데, 그냥 돌아가는 게 좀 아쉽기는 하네.’
“혹시, 조금 더 있다가 돌아가도 될까요?”
나는 이안을 돌아보며 물었다.
“여기까지 왔는데, 친한 사람들 기념품 정도는 사다 주고 싶어서요. 아네트 양도 이 도시를 되게 좋아하는 것 같았- 아.”
문득 무언가를 떠올린 나는 말을 멈췄다.
“그러고 보니, 이안 님은 바쁘신데 저 때문에 여기 와 계시는 거였죠.”
나는 고개를 내저었다.
“제 말은 잊어 주세요. 그냥 지금 바로 같이 돌아가는 편이-”
“아뇨.”
이번엔 이안이 내 말을 끊었다.
“함께 가시죠. 저 때문에 이곳 관광도 못 해 보신 것 아닙니까.”
“으음, 제안은 감사하지만, 제 관광에 따라오시기엔 지금 많이 바쁘신 상태 아니에요?”
“전혀 아닙니다.”
이안이 단칼에 대답했다.
어쩐지 이 대화를 루시안이 듣는다면 눈물을 훔칠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미안, 루시안 씨.’
하지만 솔직히 이안과 이 도시의 거리를 걷고 싶은 기분이 크기는 했다.
나는 눈 딱 감고, 이안을 딱 몇 시간만 더 독점하기로 했다.
“좋아요. 그럼 가시죠!”
“잘 생각하셨습니다.”
이안이 씩 미소를 지었다.
* * *
“와아아.”
기념품점 매대를 구경하며 나는 탄성을 흘렸다.
메이우드의 야경을 고스란히 담은 스노우 볼이 현란하게 반짝이며 내 마음을 앗아갔다.
‘아네트가 좋아하겠다. 이거.’
“마음에 드십니까?”
“네! 너무 예뻐요.”
이안이 주인장에게 눈짓하자, 주인장이 싱글벙글 웃으며 스노우 볼을 포장해 주었다.
“자, 잠깐. 더 사면 짐 들기가 힘들어질걸요?”
“제가 이런 것 몇 개도 못 들 정도로 연약해 보이십니까?”
자존심 상한다는 듯한 목소리에 나는 풋 웃음을 흘렸다.
“아뇨, 그건 아니지만, 그래도 한계라는 게 있잖아요. 이미 너무 많이 샀다고요.”
“정 무리라면 아공간을 쓰죠.”
그 대단한 능력을 고작 기념품 보관하는 데에 쓰겠다고?
나는 기가 막혀 이안을 쳐다보았다. 이안이 달콤한 미소를 지었다.
“거기라면 이 상점을 통째로 담을 수도 있습니다.”
이안의 속삭임을 들었는지, 기념품점 상인이 굉장히 설레하는 얼굴을 했다.
나는 살래살래 손을 내저었다.
“됐어요. 어디 보자, 이제 엘리엇 군 선물만 사면 될 것 같네요.”
가지고 온 메모를 체크하며 내가 말했다.
아네트 양, 조안 경, 셀레나를 비롯한 지인 대부분의 선물은 이미 이안의 손에 들려 있었다.
엘리엇은 뭘 좋아하려나. 고민하며 상점 거리를 걷자 곁에서 이안이 제안해 왔다.
“그 녀석 선물이라면, 이 단풍잎은 어떨까요. 꽤 예뻐 보이는데.”
“무슨 길가 나뭇잎을 선물로 주워요!”
고개를 내저으며 나는 웃음을 터뜨렸다. 이안이 엘리엇 이야기만 나오면 박하게 나오는 것이 웃겼다.
말은 저렇게 하지만, 엘리엇의 교습을 지금까지도 게을리하고 있지 않다는 걸 잘 알고 있었다. 둘은 나름대로 괜찮은 사제관계를 유지하고 있는 듯했다.
“날씨가 되게 좋네요.”
산들거리는 바람을 느끼며 나는 중얼거리듯 말했다.
이안과 나란히 걷고 있자니,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이거 데이트, 인가?’
생각해 보면 이안과 나는 한 번도 이런 시간을 가진 적이 없었다.
데이트…….
그 단어를 떠올리니 괜히 손바닥이 간질거려 왔다.
그 순간, 거짓말처럼 손등과 손등이 맞닿았다.
‘아.’
나는 흠칫 몸을 굳혔다.
실수로 스친 두 손등은 서로 떨어지지 않고 맞닿아 있었다. 나도 모르게 손바닥으로 땀이 배었다.
‘잡으려나.’
손을, 잡아 오려는 걸까.
두근두근 심장이 맥박쳤다. 당장이라도 이안의 손이 내 손을 휘감아 올 것 같았다.
온 신경이 손바닥으로 향해 있던 그 순간이었다.
“당신은!”
경악한 목소리에 나는 앞을 바라보았다.
내 눈이 삽시간에 커다래졌다.
몇 걸음 앞에, 익숙한 얼굴이 나를 마주하며 찢어질 듯 눈을 크게 뜨고 있었다.
‘4번.’
지하 감옥에서 마주한 적 있는 얼굴에, 손끝이 차게 식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