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6화
나는 푹 고개를 숙였다. 갑작스레 해일처럼 몰려드는 부끄러움에 그의 얼굴을 제대로 마주할 수 없었다.
이마가 이안의 가슴에 닿은 바람에, 그가 걸음걸이를 옮길 때마다 이마가 콩콩 부딪혔다. 그 때문인지 머리 위에서 낮은 웃음소리가 들렸다.
머지않아 등 뒤로 푹신한 시트의 감촉이 와 닿았다. 나는 눈을 질끈 감았다.
‘어떡해.’
내가 지금 누워 있는 곳이 어딘지 생각하면 도무지 눈을 뜰 수 없었다.
왜 이럴까. 이상했다. 생각해 보면 이안과 한 침대에 누운 건 하루 이틀 일이 아니었다. 심지어 피부를 맞댄 채 잠을 청했던 적도 있었다.
그런데도 오늘은 이상하리만큼 모든 것이 부끄러웠다. 얼굴이 너무 화끈거려서 손을 댔다간 델 것 같을 정도였다.
나를 침대 위에 눕혀 놓은 이안이 몸을 떨어뜨리려 했다. 나는 나도 모르게 팔을 뻗었다.
“가, 가지 마세요.”
다급히 요청하자 내게 붙잡힌 이안의 팔이 멈칫했다.
“아직 안 돼요! 잠시만요.”
“뭐가 안 되는 겁니까?”
그렇게 묻는 이안의 목소리엔, 열받게도 웃음기가 서려 있었다.
‘난 이렇게 부끄러워 죽겠는데 자긴 웃고 있단 말이지.’
바짝 약이 올랐다.
이 상황에 이렇게 몸 둘 바 모르겠는 건 나뿐이란 말인가?
나도 저도 처음인 건 마찬가진데, 왜 저 인간만 저렇게 시종일관 웃음소리를 흘리고 있는 걸까? 여유 넘치는 카사노바라도 되는 것처럼 말이다.
억울해진 나는 반짝 눈을 떴다. 그러자 곧장 푸른 눈과 시선이 마주쳤다.
“…….”
따지려던 말은 모두 입술 안으로 사라져 버렸다.
이 순간의 이안은 너무할 만큼 아름다웠다. 이마 위에서 반짝이는 은발과, 보석보다 영롱한 벽안. 웃음기를 머금어 옅게 호선을 그리고 있는 입매. 아무 경계 없이 부드럽게 풀어져 웃고 있는 눈꼬리.
‘누구세요.’
그렇게 묻고 싶을 만큼, 지금의 이안은 낯설었다.
얼마나 그의 얼굴을 뚫어져라 쳐다보고 있었을까. 이안의 눈빛에 서서히 의아함이 서렸다.
“……부인?”
“그렇게 부르지 말아요.”
작게 입을 연 내가 투정처럼 속삭였다. 이안이 항의하듯 물었다.
“왜 안 됩니까? 엘룬 신 앞에서 부부의 연을 맹세한 사이이지 않나요.”
“그, 그건. 조금 다르죠.”
“뭐가 다릅니까?”
이안의 뻔뻔함에 황당해진 나는 눈을 크게 떴다.
“가짜였잖아요, 그 결혼식은. 맹세의 키스도 안 했으면서.”
그때 나와 이안은 키스하는 척 고개를 겹쳤지만 정말 입술이 닿지는 않았었다.
그 이야기를 꺼내자 이안이 눈을 몇 번 깜빡이더니, 빙그레 미소를 지었다.
“생각해 보니 그렇군요. 그렇다면 그 맹세의 키스, 지금 해도 될까요?”
장난스러운 미소와 함께 이안의 눈이 반짝였다.
나는 기가 막혀 그를 올려다보았다. 이안이 속삭이듯 말을 이었다.
“제 생각엔 지금이라도 늦지 않은 것 같은데. 의식을 마저 진행해 볼까요?”
“늦지 않긴 뭐가 늦지 않아요! 한참 늦었지. 이제 거의 일 년이 다 되어 가는데?”
“안 됩니까?”
“……안 된다는 말은, 아닌데-”
말이 채 끝나기도 전 입술이 겹쳐졌다.
나는 황당함을 느끼면서도 꼭 눈을 감았다. 뭔가 이상했다. 내 위에 있는 게 내가 알고 있던 이안이 맞는 걸까? 아무래도 어디 사는 능구렁이가 이안을 홀랑 잡아먹고 이안 행세를 하는 것 같았다.
“……흣.”
한참 동안 이어진 접촉 이후 입술이 떨어졌다. 겨우 생긴 틈으로 가쁘게 숨을 몰아쉬며 나는 가까스로 눈을 떴다. 아주 가까운 곳에서 이안이 마주 보였다.
“서연.”
낮게 속삭이는 목소리에 오싹 소름이 끼쳤다.
그의 목소리에서는 어느새 웃음기가 사라져 있었다. 나는 빠듯하게 호흡하느라 대꾸도 하지 못하고 그의 팔만을 꼭 쥐었다.
이안의 손이 다시금 내 턱을 감싸 쥐었다. 미소가 완전히 사라진 그의 얼굴에서는 이제 여유 한 조각조차도 찾아볼 수 없었다.
내 허락을 구하듯 이안의 시선이 내 얼굴 구석구석을 살폈다. 나는 허락의 말 대신 그의 팔을 끌어당기듯 더 꼭 쥐었다. 그러자 마치 신호가 떨어진 것처럼 그가 내 입술을 물어왔다.
타인의 체온이 내 옷자락 사이로 스며들어 왔다. 이안의 손바닥이 내 맨피부를 조심스레 어루만질 때마다 전류가 흐른 것처럼 몸이 튀었다.
“읏!”
입술이 떨어지고 이안이 마치 관찰하듯 내 모습을 눈에 담았다. 노골적으로 떨어지는 시선에 얼굴이 화끈거렸다.
“보, 지 마요.”
나는 원망하듯 말했다.
“그리고, 조금만 천천히…….”
“여기서 더?”
이안이 내 이마에 입 맞추며 속삭였다.
“일 년을 기다린 초야인데.”
“아까부터 자꾸 무슨 소릴 하시는 거예요! 그때 결혼은 가짜였고…… 흡.”
나는 채 말을 마치지 못하고 질끈 눈을 감았다. 이안의 입술이 깃털처럼 내 목선에 내려앉았다가, 조금씩 더 욕심을 띠고 질척하게 달라붙어 왔다.
“그랬죠.”
귓가에서 낮게 가라앉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하지만 이제 그대를 원하는 제 마음은 진심입니다.”
“…….”
나는 꼭 입술을 깨물었다. 너무 부끄러워서 도저히 눈을 뜰 수가 없었다.
도대체 이안 에스테반이 언제부터 저런 직설적인 화법을 쓸 줄 알게 된 거지. 그것도 다름 아닌 이성에게.
내 위에 있는 당신은 대체 누구냐고 외쳐 묻고 싶었다. 하지만 코끝으로 닿아 오는 체향은 분명 내가 잘 알고 있는 이안의 것이었다.
“……괜찮겠습니까?”
내 옷자락 끝에 손을 댄 채 이안이 물어 왔다. 그의 목소리에 묻은 긴장을 느끼며 나는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모든 것이 정신없고 급박하게 돌아갔다.
이론만큼은 어느 고수 무섭지 않다 떵떵거렸던 것과 달리 나는 손짓 하나하나가 한없이 어설펐다.
손을 어디다 놔야 할지조차도 몰라 허우적대던 내 팔을 이안이 제 등 뒤로 얹어 주었다. 나는 그의 등과 어깨를 꼭 끌어안은 채 그가 주는 모든 감각들을 감내하기 바빴다.
“이안, 이안. 좀 더 천천히…….”
가쁘게 숨을 내쉬며 내가 말했다.
이안이 걱정스레 내 입술을 쓰다듬으며 물었다.
“힘드십니까, 부인?”
침착한 말의 내용과 달리 이안의 목소리에서는 한 톨의 여유도 찾아볼 수 없었다. 그런 주제에 이안이 최대한 신사적인 체하며 물어 왔다.
나는 도리질을 쳤다.
“아뇨, 아뇨. 그게 아니라…….”
힘이 드는 게 아니라, 그만두고 싶은 게 아니라, 그냥 이 모든 것이 너무 벅찼다. 생경한 곳에 타인의 체온이 와 닿는 감각도. 좋아하는 사람과 이어져 있다는 이 기분도.
“이안……!”
그가 깊은 곳을 파고들어 올 때마다 나는 속절없이 그의 어깨만을 꽉 끌어안았다.
눈꼬리에 자꾸 눈물이 배어 나왔다. 너무 기쁘고 좋으면 눈물이 나기도 한다는 걸 처음 알았다.
“윽…… 서연.”
이안이 내 이름을 부를 때마다 몸 안쪽에서부터 오싹거리며 소름이 올라왔다. 앞으로 나를 더 찾아올 감각들에 대한 예감에, 긴장과 기대감이 섞여 나를 짓눌러 왔다.
새벽 별빛이 창문 너머로 스며들어 왔다. 밤은 아직 많이 남아 있었다.
* * *
눈부신 햇살이 눈을 콕콕 찔러 왔다.
‘도대체 지금이 몇 시지.’
어슴푸레 눈을 뜬 나는 대낮처럼 밝은 창밖을 바라보며 혼란에 빠졌다. 아무래도 제대로 늦잠을 잔 것이 틀림없었다.
‘오늘 일정이 뭐였…… 윽.’
생각하다 말고 나는 신음을 흘렸다.
온몸 구석구석, 뻐근하지 않은 곳이 없었다.
“일어났습니까?”
곁에서 들려오는 목소리에 나는 흠칫 몸을 굳혔다.
대답 없는 내가 의아했는지 이안이 다시 한번 물어 왔다.
“부인?”
아직 잠에 취해 있는 건지, 아니면 간밤의 흔적이 사그라지지 않은 건지, 이안의 목소리는 지독하도록 가라앉아 있었다.
안 그래도 낮은 미성이 더더욱 가라앉자 속삭이는 것만으로도 온몸으로 소름이 끼쳐 왔다.
나는 심각한 눈으로 내 배 위에 올라와 있는 이안의 팔을 바라보았다.
그제야 어젯밤 무슨 일이 있었는지, 장면들이 모두 머릿속에 펼쳐졌다.
‘저질렀다.’
그것도 다름 아닌 이 남자랑.
세상에나.
일 년 만에 정말 초야를 치러 버렸다는 생각에 나는 반쯤 넋이 나갔다.
내가 오징어처럼 흐늘거리자, 이안이 당황한 듯 상체를 일으켰다.
“서연. 정말 괜찮습니까?”
“……안 괜찮죠.”
나는 내 위로 드리워진 이안을 노려보며 말했다.
“진짜 힘들다고 했는데.”
“…….”
이안이 긴장한 듯 몸을 굳히곤 순순히 사과해 왔다.
“죄송합니다.”
“진짜 죽을 것 같다고 했는데.”
“……정말 죄송합니다.”
이안이 계속해서 사죄해 왔다.
그야 어젯밤을 생각해 보면 당연한 일이었다. 간밤의 이안을 생각해 보면 귀족 신사와 성기사라는 타이틀을 영구히 제거하는 것이 옳았다.
‘사람이 그렇게 힘들다고 했는데!’
물론 처음 힘드냐고 물어 오던 이안의 질문에 아니라고 대답한 건 나였다.
하지만 그건 그때였고.
아무리 기분 좋은 쾌락이라고 해도 정도 이상으로 주어지면 힘들고 버거운 법이었다. 나는 그 진리를 어젯밤에 몸서리치도록 절절히 깨달았다.
“서연. 정말 죄송합니다. 할 말이 없습니다.”
제 죄를 잘 알고 있는 남자가 무릎이라도 꿇을 기세로 사죄했다.
나는 그를 고까운 눈초리로 노려보다가 이내 슬며시 시선을 피했다.
어젯밤을 떠올릴수록 얼굴이 점점 더 화끈거려 왔다.
‘어떻게 이 사람 앞에서 그런 추태를.’
울고, 흐느끼고, 끌어안고…….
맙소사.
뚜렷이 떠오르는 기억에 나는 점점 더 고개를 깊숙이 숙였다.
솔직히 말하면 이안의 잘못만 있는 것은 아니었다.
사실 더 솔직히 말하면, 계속 말을 바꿔 댄 것은 다름 아닌 나였다.
그만하라고 했다가, 계속해 달랬다가, 또 그만두라 했다가……
‘으으윽.’
생생히 떠오르는 기억에 몸이 절로 흐느적거렸다. 이안이 다시금 당황해선 그런 나를 살피려 했다.
“서연?”
그때 맑은 종소리가 울렸다. 아침 식사가 준비되었다는 알림이었다.
이안의 고개가 문 쪽으로 돌아가고, 나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아침 식사로군요. 일단 받아 오겠습니다. 시장하실 테니.”
몸을 일으킨 이안이 침대 밖으로 걸어 나갔다.
그의 뒷모습을 보며 나는 눈을 휘둥그렇게 떴다.
‘……저걸 누가 저래 놨지.’
이안의 등에 마치 고양이가 할퀸 것 같은 붉은 자국이 죽죽 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