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4화
* * *
설명은 상당히 조잡하고 난해했다.
어쩔 수 없었다. 한 번도 내 세계에 대해서 이쪽 사람에게 설명한다는 선택지를 상상해 본 적이 없었으니까.
내가 간신히 풀어놓은 이야기를 들은 이안은, 또다시 멍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오늘따라 자주 보여 주는 표정이었다.
“……그러니까.”
미간을 지그시 누르며 이안이 말했다.
“그대의 고향이, 여기와 다른 별이고.”
“네. 지구요. 지구.”
“지구. 그래요.”
이안이 복잡한 표정으로 내 말을 되풀이했다.
낮게 신음한 그가 어딘지 체념한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거기까지는 그렇다 칩시다. 마계에서 마물이 쏟아져 나오는 세상인데 다른 별에서 온 외계인이라고 있으면 안 될 이유는 없지.”
“제 입장에서는 이안 님이 외계인이거든요.”
이안은 내 볼멘소리가 들리지 않는 듯했다.
그가 곤혹스레 이마를 문지르며 말했다.
“하지만 여기가 책 속 세계라는 말은 도무지 이해가 안 되는군요.”
“저라고 이해가 된 건 아니에요. 어떻게 그런 일이 가능했는지는 저도 아직 전혀 파악하지 못했는걸요. 하지만 확실한 건, 제가 이안 님의 이야기를 책 속에서 이미 읽은 적이 있다는 거예요.”
“가십지 같은 것을 말하는 건 아닙니까? 나에 대한 소문이 그런 곳에 적혀 있다는 건 들은 적이 있습니다.”
“그런 게 아니에요. 주인공과 서사가 있는, 완벽한 이야기책이었어요.”
“하.”
이안이 기가 찬 한숨을 뱉었다.
“그래요. 이해가 되지는 않지만, 그렇다 칩시다. 그래서 내 역할은 뭐였습니까?”
“으음…….”
나는 슬쩍 이안의 눈치를 보았다.
“일단 주인공은 아니셨고요.”
묘하게 뜸을 들이자, 내 상태를 알아챈 듯 이안이 비뚜름히 한쪽 눈썹을 치켜 올렸다.
“좋은 역할은 아니었나 보군.”
“네. 사실은…….”
에이, 모르겠다.
여기까지 온 이상 뭘 더 숨길까. 나는 그냥 솔직해지기로 했다.
“악당이셨어요. 그것도 엄청 센.”
“악당? 내가?”
이안이 황당하다는 듯 미간을 찡그렸다.
“착각한 것 아닙니까? 이래 봬도 전 엘룬 신을 모시는 교단의 2인자입니다만.”
“……병권 때문에 올라간 자리잖아요. 신앙심은 별로 없으신 것 다 알아요.”
이안이 눈을 가느스름하게 떴다.
“방금 그 발언, 성기사단장에 대한 모욕으로 큰일 날 여지가 다분하군요.”
“예, 예. 알아요. 그뿐인가요? 황족모독죄까지 추가되겠죠. 하지만 사실이잖아요?”
나는 어깨를 으쓱였다.
“발뺌하실 필요 없어요. 부부 사이에 비밀은 없는 법이라잖아요.”
“그대가 헌신짝처럼 버리고 가려 했던 그 부부의 연 말입니까.”
“……은근히 뒤끝이 기시네요. 아무튼.”
나는 얼른 화제를 제자리로 돌렸다.
“제가 이런 내용을 어디서 알아냈겠어요. 가십지가 감히 그런 소문을 적었을까요?”
“……책 속에 그런 이야기까지 적혀 있었다, 그 말씀입니까?”
“네. 바로 그 얘기예요.”
이안은 가벼운 두통이 이는 듯 이마를 툭툭 두드렸다.
잠시 뒤 그가 와인 잔에 와인을 콸콸 따르더니 말했다.
“이왕 이야기하신 거, 자세히 말씀해 보시죠. 그 괴상한 책에도 주인공은 있었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내가 아니었다면 누구였습니까? 제가 알고 있는 사람입니까?”
“네. 알고 계시죠.”
나는 미묘한 표정으로 말했다.
가면 갈수록 더 기묘한 기분이 들었다. 다른 사람도 아니고 이안과 이런 화제로 대화하게 될 줄은 정말 꿈에도 몰랐으니까.
하지만 반대로 속 시원한 기분도 들었다. 나는 묘한 감정을 느끼며 털어놓았다.
“엘리엇 군이에요. 주인공은.”
“엘리엇?”
처음 듣는 이름이라는 듯 이안이 고개를 갸웃했다. 몇 초 뒤 그가 탄성을 뱉었다.
“아. 조 말입니까?”
“원래 이름은 엘리엇이 맞다고요!”
나도 모르게 발끈하자 이안이 나를 빤히 응시하더니, 곧 픽 웃음을 흘렸다.
“어쩐지 이름에 예민하다 싶었습니다. 그나저나, 그 애송이가 주인공이라고?”
별소리를 다 들었다는 듯 이안이 눈썹을 추켜세웠다.
“읽어 보진 않았지만 희한한 책이군요. 그 녀석은 이제 검 쥐는 법이나 제대로 배운 햇병아리인데. 보통 소설책이라는 게 그런 초보도 주인공으로 써 줍니까?”
진심으로 의아해하는 듯한 목소리에, 내 안에 잠들어 있던 원작 팬으로서의 자아가 살짝 울컥했다.
“엘리엇 군은 성장형 캐릭터예요. 어쨌든 마지막엔 최종 악당을 물리칠 정도로 강해지거든요.”
“최종 악당은 누굽니까, 그럼?”
나는 살며시 입을 다물었다.
아무리 툭 터놓고 이야기하기로 했다 하지만, 여기까지 터놓기는 기분이 좀 그랬다.
내 침묵에 이안이 물었다.
“설마. 나입니까?”
나는 여전히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 모습에 이안은 확신을 얻은 것 같았다.
이안이 기묘하다는 듯 눈살을 찌푸렸다.
“이상하군요. 최종 악당이라는 건 주인공을 죽이려고 달려드는 존재 아닙니까?”
“…….”
“내가 왜 엘리엇을 죽이려 들지? 교습 중에 답답해서 폭발하는 거라면 몰라도.”
진심으로 의아하다는 듯 이안이 중얼거렸다.
나는 한 번 심호흡을 하고는 입을 열었다.
그래. 기왕 털어놓기로 한 것, 모두 알려 주자. 당사자인 이안은 들을 권리가 있었다.
“사술에 걸리셨었어요.”
뜻밖의 이야기인 듯 이안이 살짝 눈을 크게 떴다.
나는 최대한 담담히 사실관계만을 전하기 위해 노력했다.
사술의 종류가 무엇이었는지. 어떤 놈들이 걸었던 건지. 무엇보다, 사술에 걸린 이안이 그 이후로 어떤 일들을 저질렀는지.
이야기를 모두 들은 이안은 한동안 말이 없었다.
일 분 정도 지났을까.
와인 잔의 목을 쥔 이안이 붉은 액체를 마치 맥주처럼 한입에 털어 넣었다.
“솔직히 말하면, 믿기 힘들군요.”
와인 잔을 내려놓으며 이안이 말했다.
“내가 어느 세계에선 그렇게 형편없는 놈이었다니.”
“그렇지 않아요!”
나는 나도 모르게 목소리를 높였다.
“그놈들이 얼마나 치밀하게 그 함정을 준비했었는데요. 정말 비열한 수도 서슴지 않았어요. 이번에도 이안 님의 부인인 절 이용하려고 했잖아요!”
“이용? 구체적으로 어떻게?”
날카롭게 물어오는 목소리에 나는 입을 다물었다.
생각해 보니, 이안에게 아직 나인과의 일을 모두 털어놓은 적은 없었다.
나는 슬쩍 이안의 눈치를 보았다.
‘이제 와서 전부 이야기한다 해서, 날 어떻게 하진 않겠지.’
설마.
이안은 나를 좋아한다고 했다. 저렇게 무섭게 쳐다보는 표정을 봐선 아직 크게 와닿진 않지만, 아무튼 제 입으로 그렇게 말했다.
그런 대상에게 설마 과거의 일을 따지고 들 만큼 매몰차진 않겠지.
나는 헛기침을 한 번 하고는 조그만 목소리로 털어놓았다.
“나인은 저한테 꽤 많은 것을 요구했었어요. 주로 이안 님께 저주를 걸라는 내용이었죠.”
“접선은 어디서 이루어졌습니까.”
이안의 말은 한 마디 한 마디가 날카롭기 그지없었다. 괜히 심문의 달인이라고 불리는 게 아닌 모양이었다.
나는 식은땀이 흐르는 것을 느끼며 곧이곧대로 대답했다.
“……성당 안이요. 침실 테라스에 침입한 적도 있었고요.”
“그놈들이 그대의 보금자리에서 그대를 겁박했다, 이 말입니까.”
이안이 와인 잔을 꽉 쥐었다.
“다행이군요. 그놈들을 아직 살려 둬서. 하마터면 죗값을 한 겹 가볍게 치르도록 내버려 둘 뻔했습니다.”
서늘한 목소리에 나는 괜히 내 손등을 쓰다듬었다.
이안의 화난 목소리에 파블로프의 개처럼 덜컥 겁이 나면서도, 나를 위해 분노하는 모습을 보니 마음 한편이 따뜻해지기도 했다.
“아. 전 한 번도 그놈들 말대로 한 적 없어요. 단 한 번도요!”
기회를 놓치지 않고 생색내자, 이안이 나를 빤히 바라보더니 작게 웃음을 흘렸다.
“그래요. 고맙습니다. 사실 그대가 내게 저주를 걸었다 한들 딱히 내가 큰 해를 입진 않았을 것 같지만.”
그렇게 말한 이안이 잠시 뒤 미간을 좁히며 덧붙였다.
“아니. 이런 말은 오만이겠군요. 그 책 속의 나는 속절없이 음모에 당해 눈먼 검이나 휘두르다 조 녀석에게 처단됐다고 하니.”
나는 이안의 안색을 살폈다.
아무리 다른 ‘만약’ 속의 가정이라곤 해도, 자기 자신이 그런 최후를 맞는다는 이야기를 들으면 결코 기분이 좋지 않을 것 같았다.
생각에 잠긴 듯 이안은 한동안 말이 없었다. 잠깐의 침묵 뒤, 시선을 든 이안이 나를 마주 보았다.
“그대는 말 그대로, 내 운명을 바꾸었군요.”
지그시 내게 닿아 오는 시선에, 뺨이 몹시도 간질거렸다.
괜스레 고개 숙인 나는 조그맣게 입을 열었다.
“……크게 한 것은 없어요.”
아니다. 거짓말이었다. 내가 이안 에스테반이라는 인물의 엔딩을 바꾸기 위해 얼마나 발품을 팔았는지는 나 스스로가 제일 잘 알고 있었다.
이안이 고개를 내저었다.
“아니. 전부 그대 덕분이라는 걸 이제는 압니다. 내가 지금 멀쩡히 숨 쉬고 살아 있는 것 자체가, 그대 없인 불가능한 일이었다는 것 역시.”
“……흠.”
나는 헛기침을 했다.
아까는 갑자기 부끄러워지는 바람에 반사적으로 겸양을 떨었지만, 이안의 공치사가 듣기 좋은 건 사실이었다. 더 듣고 싶었다.
“솔직히 말씀드리면, 틀린 말은 아니네요.”
도도히 눈을 내리깔며 내가 말했다.
“저도 그냥 겸손을 떨어 본 거예요. 한국인의 어쩔 수 없는 특성이죠.”
“한국?”
이안이 살짝 고개를 갸웃했다.
그 모습에 나는 풋 웃음을 터뜨렸다. 가르쳐야 할 것이 아직 많고도 많았다.
“뭔가 놀림 받는 기분이 드는데.”
이안이 눈썹을 찡그리며 와인 잔을 내려놓고는 나를 돌아보았다.
“같이 웃죠. 뭐가 그렇게 재밌습니까?”
물음과 함께 빤한 시선이 내 뺨에 닿아 왔다.
서서히 내 웃음이 잦아들었다.
나는 시선을 들어 이안을 마주 보았다.
그리고, 생각보다 우리 둘의 위치가 가깝다는 것을 깨달았다.
“…….”
“…….”
마치 유령이라도 지나간 것처럼, 순식간에 우리 사이로 정적이 감돌았다.
귓가로 들리는 것은 오직 내 심장 소리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