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2화
“일어나라.”
이안이 말했다. 심기 불편한 목소리에 루시안이 어깨를 움찔했다.
“빌어도 내가 빌 테니.”
‘뭘 자꾸 빌겠다는 거야, 이 사람들? 소름 끼치게!’
루시안에 이어 이안까지 내 앞에 무릎 꿇는 상상을 하자 절로 몸서리가 쳐졌다. 신종 괴롭힘이 아닐까 싶을 정도였다.
나는 황급히 루시안에게 말했다.
“저, 이안 님도 일어나라고 하시잖아요. 어서 일어나세요.”
“아이린 님…….”
“얼른요! 기사가 이렇게 쉽게 무릎을 내놓는 게 아니에요.”
내 말에 루시안이 감격 섞인 눈으로 나를 올려다보았다.
“알겠습니다, 아이린 님.”
그제야 루시안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절로 안도의 한숨이 나왔다.
몸을 일으킨 루시안이 활짝 미소 지었다.
“단장님과 잘 화해하신 것 같아 정말 다행입니다. 이 루시안, 한시름 놓았습니다.”
‘아직 놓으면 안 될 것 같은데요.’
나는 루시안이 오기 전 나누고 있던 대화를 떠올리며 뺨을 긁적였다.
나와 이안 사이의 갈등은 아직 해결되지 않은 상태였다.
“성당으로 돌아와 주시는 거지요, 아이린 님? 모두 아이린 님만을 목 빼 놓고 기다리고 있-”
“루시안.”
이안이 낮게 짜증 배인 목소리로 말했다.
“보다시피 부인께선 무사하시다. 수색조는 모두 철수시켜.”
“네, 넵!”
‘수색조?’
나는 아연히 이안을 쳐다보았다.
대체 나 하나 찾자고 인원을 얼마나 푼 거야. 정말 내가 도망이라도 친 줄 알았던 걸까?
“그럼 저는 상황을 마무리하러 먼저 물러가 보겠습니다. 오붓한 시간 보내십시오!”
그렇게 말한 루시안은 이안의 허락이 떨어지자마자 잽싸게 자리를 피했다. 부하들을 모두 끌고서.
어느새 주점의 이쪽 구역엔 우리밖에 남아 있지 않았다.
“잠깐 소란이 있었군요. 루시안이 한 말은 잊어 주시면 됩니다. 답지 않게 호들갑을 떨었군요.”
이안이 짐짓 사무적인 톤으로 말했다. 나는 눈을 가느다랗게 떴다.
“그나저나, 대답을 마저 듣고 싶은데.”
“……아.”
“내겐 중요한 질문이었으니 쉽게 넘어가고 싶지 않습니다. 그래서, 그대 대답은 무엇입니까?”
“아뇨.”
나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이안 님이 먼저 대답해 주세요.”
“……무엇을 말입니까?”
가슴이 떨려 왔다. 질문을 하기가 무서웠다.
하지만 루시안이 쏟아 낸 이야기들을 들은 순간, 이것만큼은 꼭 짚고 넘어가야겠다고 생각했었다.
“루시안 씨의 말, 호들갑일지는 몰라도 전부 진실이었지요?”
“…….”
이안의 눈이 커졌다.
나는 살짝 심호흡을 하곤 질문을 토해 냈다.
“왜 그렇게까지 해서 절 찾으려고 했던 건가요?”
허를 찔린 듯 이안의 표정이 굳었다.
그는 잠시간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꼭 주먹 쥔 손바닥 위로 땀이 배어 나왔다. 나는 쿵쾅쿵쾅 뛰어 대는 심장을 느끼며 피하지 않고 이안의 눈을 바라보았다.
어떤 대답이 돌아올까.
저 푸른 눈 속에 숨어 있는 정답은 뭘까.
몇 초간의 침묵 뒤, 마침내 이안이 입을 열었다.
“……나는.”
왜 이렇게까지 긴장이 되는 걸까?
심장이 폭주 기관차처럼 미친 듯이 날뛰었다.
나는 이안의 입술만을 뚫어져라 쳐다보았다.
벌린 입술로 이안이 나지막이 숨을 토해 냈다. 다시금 그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오늘 밤, 그대에게 전하려 계획했던 이야기가 있었습니다.”
복잡한 표정으로 이안이 털어놓았다.
심장이 또 한 번 크게 요동쳤다.
나는 애써 동요를 내색하지 않으려 노력하며 물었다.
“어떤 이야기인가요?”
이안이 천천히 입술을 달싹였다.
본능적으로 느낄 수 있었다.
그가 다음으로 할 말이, 내게는 아주 중요한 이야기리라는 것을.
심장이 뛰어 대는 건 이제 막으려야 막을 수 있는 수준이 아니었다.
나는 내 인생 최대의 집중력을 발휘해 이안의 입술만을 뚫어져라 쳐다보았다.
이안의 혀끝이 가볍게 제 입술을 축였다.
마침내 그가 결심한 듯 입을 연 순간이었다.
“와아아!”
“이야아아!”
엄청난 함성이 들려왔다.
처음에는 무시하려고 했다. 이안이 저 소리에 신경을 쏟으려 해도 내가 홱 그를 붙잡으며 하던 말이나 계속하라고 했을 것이다.
그러나 다음 순간, 이번엔 더 커다란 소리가 들렸다.
펑!
“꺄아악!”
“우와아아아!”
귓가가 멍멍할 정도로 거대한 폭발음에 내 어깨가 화들짝 위로 튀었다.
나도 모르게 절로 고개가 사방으로 돌아갔다.
“이, 이게 무슨 소리죠?”
나는 당황해서 더듬거렸다.
“전쟁이라도 난 것 아닐까요?!”
나 때문에 차기 황제인 이안이 여기 붙잡혀 있다. 그 틈을 타서 호시탐탐 제국을 노리던 세력이 쳐들어온 것은 아닐까?
내가 허둥지둥하는 동안, 이안이 창밖을 내다보더니 지그시 미간을 찌푸렸다.
“아닙니다. 이건…….”
창가로 걸어간 이안이 위를 올려다보았다.
곧 나를 돌아본 이안이 내게 손짓했다.
“이쪽으로 오시죠.”
“네, 넵.”
전시 상황에선 창문으로부터 떨어지는 것이 최우선이라고 하던데…….
불안해하면서도 나는 이안의 말을 따라 그의 곁으로 다가갔다.
이안이 창밖을 가리켰다.
“한 번 보시겠습니까?”
“……?”
나는 이안의 말에 따라 창밖을 바라보았다.
다음 순간, 나는 멍하니 입을 벌렸다. 놀라운 광경이 거기 펼쳐지고 있었다.
“아…….”
색색이 아름다운 빛깔의 향연이 까만 밤하늘 위를 수놓고 있었다.
붉은색, 황금색, 보라색, 초록색…….
화려한 색채들이 펑펑 터져 나가며 밤하늘을 물들였다.
“와아, 예쁘다!”
“최고야!”
길거리를 지나다니던 사람들이 모두 걸음을 멈추고 하늘 위만 올려다보고 있었다.
나 역시 그들과 마찬가지로 마비된 듯 하늘만을 바라보았다.
‘……예쁘다.’
지구에서도 불꽃놀이는 숱하게 봐 왔다.
아이 때나 일일이 놀라워하며 감탄했지, 성인이 된 후로부터는 딱히 별다른 감흥을 갖지 않았던 것 같다.
그런데 오늘은 달랐다.
밤하늘을 환히 밝히는 저 불꽃들이 내 가슴까지 황홀한 색깔로 물들이고 있는 것 같았다.
“…….”
“…….”
주점에 잠시 정적이 감돌았다.
안에 남아 있던 손님들도 모조리 불꽃을 보러 나갔는지, 이 공간 안에는 우리밖에 없는 것 같았다.
건물 벽 한 겹을 사이에 둔 채 불꽃이 폭발하는 소리, 사람들의 환성이 모두 아득한 세계의 것처럼 멀게 느껴졌다.
멍하니 넋을 놓은 채 불꽃을 구경하던 중, 문득 궁금해졌다.
이안 역시 나처럼 이 광경에 매혹되어 있을까?
이안에게로 고개 돌린 나는 살짝 숨을 멈췄다.
하늘을 뒤덮은 영롱한 색깔들이, 이안의 푸른 눈을 그대로 물들이고 있었다.
‘예쁘다.’
나는 한 번 더, 진심으로 생각했다.
어두운 주변 때문에 검게 보이는 이안의 눈이, 각도를 달리할 때마다 다른 빛을 뿜는 보석처럼 아름답게 반짝였다.
어느새 나는 밤하늘이 아닌 이안의 옆얼굴을 더 오래 구경하고 있었다.
문득 이안의 목울대가 꿀꺽, 움직이는 것이 보였다.
‘어?’
나는 그제야 이안이 밤하늘을 감상하고 있는 것이 아님을 눈치챘다.
시선은 하늘을 향해 있지만, 그의 정신은 다른 곳에 있었다.
초점 흐릿한 눈동자와 꽉 다물려 있는 입술이 그것을 증명했다.
누구도 불꽃놀이를 저렇게 진지하고 단호한 표정으로 감상하지는 않을 테니까.
잠시 뒤 나는 깨달았다.
이안이 지금, 내가 봐 온 어떤 모습보다도 긴장해 있다는 것을.
‘…….’
그 모습에 덩달아 나까지 가슴이 내려앉았다.
매사 여유를 잃은 적 없던 사람의 긴장한 모습은, 곁에 있는 사람까지 당황하게 만드는 효과가 있었다.
“이안 님? 괜찮으시-”
그렇게 말하며 손을 든 나는, 깜짝 놀라 굳었다.
“어?”
순간 스친 이안의 손이 지나치게 차가웠다. 손이 아니라 다른 것과 스친 건 아닌지 의심될 만큼.
“이안 님. 손 줘 보세요.”
“예?”
당황한 듯한 목소리를 무시하고 나는 이안의 손을 꼭 쥐어 보았다.
‘세상에.’
역시 착각이 아니었다.
이안의 손이 마치 얼음장처럼 차가워져 있었다.
“손이 엄청 차가워요!”
평소 생김새와 다르게 굉장히 체온이 높았던 이안이었기에 더 당황스러웠다.
이안의 손바닥이 얼마나 뜨거운지는 여러 번 그의 간호를 받았던 입장으로서 잘 알고 있었다.
“갑자기 체온이 왜 이렇죠? 안 이러시잖아요?”
“……아이린. 그건 그냥, ……별것 아닙니다.”
이안이 얼버무리듯 말꼬리를 흐렸다. 그 모습이 더더욱 수상해 보였다.
이안은 단순히 체질적인 이유로 체온이 높은 게 아니었다. 그의 높은 체온은 이안이 지니고 있는 막대한 성력 때문이었다.
그 말인즉, 이렇게까지 손이 차가워졌다는 건, 이안의 성력에 문제가 생겼다는 이야기가 될 수도 있었다.
“다른 사람도 아니고, 당신이 이렇게 체온이 낮아지면 안 되는 거잖아요. 이건 뭔가 이상해요. 의원을 불러와야겠어요!”
루시안이나 다른 사람을 찾으러 몸을 돌린 순간이었다.
턱, 커다란 손바닥이 내 손목을 끌어당겼다.
“아뇨. 가지 마십시오.”
“네?”
“가지 말아 주세요.”
차가운 손길이 덩굴처럼 내 손목을 꼭 붙잡았다.
내 귀가 이상한 걸까.
이안의 목소리가 진득한 점성을 띤 듯 무겁게 들렸다. 마치 애원하는 것처럼.
다시금 열린 이안의 입술이 한숨처럼 뒤이은 말을 토해 냈다.
“……어디든.”
그 말에 다시금, 가슴이 불꽃놀이를 보기 전처럼 쿵쿵 뛰어 댔다.
‘어디든?’
나는 멍하니 이안을 올려다보았다.
내 손목을 쥔 그대로, 이안 역시 나를 응시했다. 불꽃의 그림자로 물든 그의 옆얼굴은 사람을 홀릴 만큼 아름다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