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40화 (140/161)

140화

오싹, 소름이 끼쳤다.

나는 나도 모르게 부르르 몸을 떨었다.

술에 취해 환상을 보고 있으면서도 이렇게 무섭다니. 역시 이안에 대한 공포는 내 유전자 단위로 각인되어 있는 것이 분명했다.

‘그런 상대를 좋아하게 되다니, 나도 참 담력이 대단하네.’

그렇게 생각하며 고개를 절레절레 젓자, 머리 위에서 또 이안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변명도 하나 하질 않는군요.”

“…….”

“대체 뭘 하고 있었던 겁니까. 이런 곳에서.”

이상하다.

나는 점점 기묘한 기분이 짙어지는 것을 느꼈다. 이안의 목소리가 지나치게 생생했다.

‘샴페인 몇 잔에 머리꼭지까지 취해 있긴 하지만, 환상까지 보는 게 가능한가?’

나는 슬쩍 위를 올려다보았다. 여전히 그 자리에선 이안의 환상이 흩어지지 않은 채 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나는 멍하니, 그 환상을 마주 보았다.

이안의 표정은 수많은 물감이 섞여 어두워진 팔레트처럼 다양한 감정으로 깊게 가라앉아 읽기가 힘들었다.

분노, 슬픔, 그리고 어쩌면 안도감…… 많은 감정이 동시다발적으로 그의 얼굴 위에 떠올랐다가, 또 사라져 갔다.

“……이안?”

나는 조그맣게 그의 이름을 불러 보았다.

이제야 문득, 어쩌면 지금 내가 환상이 아닌 진짜를 마주하고 있는 것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왜냐면, 눈앞의 이안은 환상이라기엔 지나치게 낯선 표정을 하고 있었으니까.

본 적 없는 것을 환상으로 떠올릴 만큼 나는 상상력이 좋지 않았으니까.

“내 이름을 기억은 하는 모양이군요.”

차디찬 목소리가 귓가로 떨어졌다.

나는 얼음을 등골에 밀어 넣은 듯, 서서히 술기운이 깨는 것을 느꼈다.

익숙한 감각이 나를 찾아왔다.

알람 없이 일어났는데 창밖이 너무 환할 때의 기분.

아무 생각 없이 출석했는데 동기들이 과제처럼 생긴 A4용지를 하나씩 들고 있을 때의 기분.

즉, 망했다는 감각 말이다.

‘어……?’

나는 황급히 주위를 둘러보았다.

그제야 흐릿하게 넘겼던 주변이 제대로 보였다.

당황한 얼굴로 이쪽을 바라보고 있는 헨리와 바네사, 이안 뒤로 늘어선 그의 부하들.

그리고 마지막으로, 싸늘히 굳은 채 나를 내려다보고 있는 이안.

어떻게 돌아가는 상황인지는 알 수 없었다.

그러나 일단 내가 큰 위험에 처했다는 것만은 알 것 같았다.

‘맙소사. 환상이 아니었어. 진짜인가 봐.’

하지만 도대체 어떻게, 이안이 여길 찾아온 거지?

혼란스러운 와중에도 나는 황급히 입을 열었다. 이 세계에서의 일 년간 가장 는 거라면 어떤 상황에서도 일단 입부터 놀릴 수 있는 뻔뻔함이었다.

“이, 이안 님. 여긴 어떻게 오셨어요?”

“어떻게 왔을 것 같습니까?”

‘내가 먼저 물어봤잖아!’

나는 식은땀을 흘렸다.

되묻는 걸 보니 이안은 정말 많이 화가 난 모양이었다.

왜 이렇게 기분이 안 좋은 것일까. 설마 내가 약속을 파투 낸 것 때문에?

“당신이 묵었다는 호텔로 갔는데, 당신은 그림자도 보이질 않고.”

이안이 어두운 눈으로 나를 내려다보며 말했다.

“당신을 맞았다는 지배인도 사라져서, 그대로 찾을 수 있는 실마리를 잃어버린 건가 싶었었는데…… 하아. 아니. 젠장.”

처음 듣는, 격앙된 어투로 쏟아 내듯 말하던 이안이 손바닥으로 제 눈가를 덮었다.

“의미 없는 하소연은 집어치우겠습니다. 그래서.”

눈가부터 이마까지를 쓸어올린 이안이 이번엔 헨리를 돌아보았다.

“저자는 누굽니까? 아이린.”

새파랗도록 형형한 눈빛이 헨리를 뚫어 버릴 듯 쏘아보았다.

화등잔만 해진 눈으로 우리를 구경하던 헨리가 그 눈빛을 받고는 딸꾹질을 했다.

“아, 음. 그러니까 이쪽은…….”

난데없이 통성명을 해야 하는 상황이 어색했지만, 이안이 친히 물었기에 나는 대답할 수밖에 없었다.

“헨리라고 해요. 오늘 막 약혼하신 분이고요.”

“약혼?”

이안이 깊게 미간을 찌푸렸다.

서서히, 그의 표정이 얼음물이라도 뒤집어쓴 사람처럼 서늘해졌다.

“……지금, 약혼이라고 했습니까?”

“네?”

“제보를 듣고도 설마, 아닐 거라고 생각했는데…….”

이안의 혼잣말에 나는 몹시 당혹스러워졌다.

제보를 들었다고? 헨리와 바네사에 대해서?

둘이 약혼한 건 고작 몇 분 전의 일인데, 그걸 이안이 무슨 수로 알아냈다는 거지?

“그대 입으로 다시 말해 보십시오. 약혼이라고?”

왜 이런 일로 내가 추궁당해야 하는 건지 알 수 없었다.

그런데 이번에는 아까처럼 무섭지 않았다. 오금이 저리지도 않았다.

그저 심장이 닻을 매단 듯 쿵, 내려앉을 뿐이었다.

내게 묻는 이안의 눈이 전에 없이 슬퍼 보였으니까.

마치 상처라도 받은 듯한 얼굴에 말문이 턱 가로막혔다. 내가 뭘 잘못한 건진 몰라도, 이안에게서 저 표정을 지울 수 있다면 무엇이든 사과하고 싶었다.

“저기, 맞아요. 저와 약혼했어요!”

그때 바네사의 목소리가 끼어들었다.

어색하게 손을 든 바네사가 겸연쩍게 웃었다.

“안녕하세요, 바네사라고 해요. 방금 소개받으신 헨리와 약혼한 사이고요!”

“……뭐?”

이안이 멍하니 그녀를 바라보았다.

누군가 뒤통수를 거하게 내려치기라도 한 듯한 표정이었다.

“그런데 저희 약혼 소식은 어떻게 아신 건가요? 방금 막 프러포즈를 받은 참인데!”

‘그래, 내 말이 그거야.’

나는 가려운 데를 꼭 꼬집어 준 바네사에게 속으로 엄지를 날렸다.

해명을 요구하는 눈으로 나는 이안을 바라보았다.

그러나 이안은 대답할 상태가 아닌 듯했다. 그가 혼란 가득한 얼굴로 나를 돌아보았다. 하도 드문 표정이라 녹화용 수정구를 다시 작동하고 싶을 정도였다.

“……저자와, 약혼한 게 아닌 겁니까?”

“네? 했다고 방금 말씀드렸는데요. 헨리와 제가요!”

이안이 잘 알아듣지 못한 거라고 생각했는지, 바네사가 손을 팔랑팔랑 흔들었다.

“근데 진짜, 지인짜 잘생기셨네요…….”

바네사가 꿈꾸는 듯한 표정으로 이안을 감상했다.

“실례지만, 황립 극단에 계시는 분인가요? 얼굴이 많이 낯이 익어서……!”

“바, 바네사.”

헨리가 당황한 얼굴로 바네사를 말렸다. 그의 눈빛에 옅은 배신감이 스쳐 지나갔다.

“기다려 봐. 아무래도 잡지에서 본 얼굴 같아. 분명 엄청 유명한 배우일 거라고! 사인 받아 놓아야 해.”

바네사가 오히려 그런 헨리에게 타이르듯 속닥거렸다.

당사자인 이안은 둘의 투닥거림이 귀에 들어오지도 않는 듯했다.

나를 바라보며 이안이 탄식하듯 중얼거렸다.

“나는, ……그대가, 나 아닌 다른 사람과 혼약을 나눈 줄 알고.”

“네에?”

얼토당토않은 오해에 나는 눈을 커다랗게 떴다.

다행히 바네사는 이안의 얼굴을 구경하느라 이 무서운 오해를 듣지 못한 듯했다.

나는 황급히 이안에게 속삭였다.

“그게 대체 무슨 말씀이세요? 저 사람과 저는 오늘 처음 만났다고요! 어떻게 하면 그런 오해를 할 수가 있죠?”

“……제보받은 이목구비가, 그대 전 애인이라는 자와 너무 흡사해서.”

황당하기 그지없는 이유였다.

그러고 보니, 일전에 이안에게 내 전 애인에 대한 이야길 했던 것이 기억났다. 내가 강아지상을 좋아한다며 나불거렸던 것도.

따지고 보면, 헨리는 내 가상의 전 애인과 비슷한 생김새이긴 했다.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이유를 듣고 나자 더 기가 막혔다.

“고작 그런 이유만으로 사람을 그렇게 오해해요? 만나자마자 다짜고짜 추궁할 만큼!”

생각하면 할수록 열이 뻗쳤다.

아니, 어떻게 그런 오해를 할 수가 있지?

이안에게 나는 하루 만에 처음 보는 남자와 홀랑 약혼을 치를 정도로 가벼운 인간이었단 말인가?

“기가 막혀서.”

나는 입술을 질끈 깨물었다.

“제가 이안 님과 만난 날에 약혼했다고 해서, 아무 남자하고나 다 그러고 다니는 줄 아세요?”

화가 난 탓인지 술기운이 다시 확 올라왔다. 나는 붉어진 뺨을 손등으로 식히며 벌떡 일어났다.

“냉수 좀 마시고 올게요.”

“아이린.”

“잠깐 내버려 둬요.”

나는 날 붙잡는 이안의 손을 뿌리치며 말했다.

왜 이렇게 화가 나는 건지 알 수 없었다.

예전이었으면 그냥, ‘오해예요. 제가 설마 이안 님과의 계약을 두고 그런 짓을 하겠어요? 이젠 절 믿으실 때도 되지 않았나요?’ 하며 납작 엎드려 비위를 맞췄을 텐데.

지금은 그런 넉살을 떨 만한 여유가 남아 있지 않았다.

이상하리만큼 분했고, 또 슬펐다.

이전에는 미처 몰랐다.

내가 좋아하는 사람에게서 오해받는다는 것이 이렇게 서글픈 일인 줄은.

뒤돌아 걸어가는 나를 이안이 다시금 붙잡았다.

“그럼 내가 어떻게 받아들여야 했습니까?”

거친 목소리에 나는 우뚝 걸음을 멈췄다.

“밤에 만나기로 약속한 사람이, 편지 한 통만 남기고 홀연히 사라졌는데.”

“…….”

“울면서 쓴 흔적이 역력한 그 편지를 들여다보면서, 내가 무슨 생각을 했어야 했습니까?”

“……네? 뭘 울면서 써요?”

이 와중에도 이안의 이야기에 이해되지 않는 부분이 있었다.

이안이 이를 악물곤 붙잡은 내 손목을 끌어당겼다.

“나는, 그대가, 내게서 떠나간 줄 알고.”

귓가를 파고드는 목소리에 몸이 굳었다.

“잡을 기회도 없이 사라져 버린 줄 알고, 머릿속이 그대로 멎어 버렸었는데.”

그렇게 말하는 이안은 생전 처음 보는 얼굴을 하고 있었다.

마물에게 찔려도 옅은 신음 하나 내지 않던 이안이, 지금은 마치 괴로운 듯 미간을 깊이 찡그리고 있었다.

샴페인을 들이부은 듯 머리가 멍했다. 내 앞에 서 있는 이안이, 정말 내가 알고 있는 그 사람이 맞는 것일까?

“인정합니다. 현명한 판단을 내리지 못했다는 것.”

억누르는 듯한 목소리로 이안이 말했다.

“처음에는 어떻게든 찾아내 설득할 생각이었습니다. 논리적으로 설득하려면 차분해야 할 테니 이성을 유지하려 애썼습니다. 그런데, 그 와중에 처음으로 들려온 당신의 소식이.”

미처 갈무리되지 못한 감정이 다시금 이안의 목소리에 배어 나왔다.

“그대가 다른 남자와 단둘이 목격되었다는 이야기여서.”

“…….”

“솔직히 침착을 잃었습니다. 당신을 몰아붙이려던 게 아닌데. ……그래선 안 되었는데.”

이안의 이야기를 듣는 내내, 여전히 내 머릿속은 뒤죽박죽이었다.

이상했다.

이안의 목소리가, 마치 내게 애원하고 있는 것처럼 들렸다.

그가 내게 한 번도 들려 준 적 없는 목소리였다. 얼굴을 마주하고 있는 게 아니었다면 이안이라고 믿지 못했을 만큼.

‘왜.’

답을 알고 싶은 물음이 머릿속에 가득 들어찼다.

왜 너는 내게 이렇게나 급박히 속 이야기를 털어놓고 있는 걸까.

왜 놓칠까 무섭다는 듯 내 손목을 쥐고 있는 걸까.

왜, 사라진 나를 찾기 위해 이곳까지 달려온 걸까.

모든 의문에 대한 대답이 잡힐 듯 잡히지 않으며 허공을 부유했다.

심장이 곧 터져 버릴 듯 쿵쾅거렸다. 나는 떨리는 눈으로 이안을 올려다보았다.

“아이린.”

“…….”

“……아직 화가 났습니까?”

살피듯 나를 향하고 있는 그의 푸른 눈동자가 올려다보였다. 그 속에, 내가 원하는 모든 대답이 들어 있을 것만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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