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39화 (139/161)

139화

* * *

“저어, 괜찮으세요……?”

손수건을 들고 다가가자, 울고 있던 여자가 깜짝 놀라 고개를 들었다.

이제 막 성인이 되었을까 싶을 정도로 여자는 어려 보였다. 앳된 얼굴에 눈물 자국이 가득해 저절로 마음이 찡해졌다.

“이거, 쓰셔도 돼요.”

“흐, 흡…… 감사합니다, 킁.”

코를 먹어 가며 여자가 감사 인사를 했다.

무슨 박복한 사연이 있는 걸까.

잘 해결되기를 바라며 안타까움을 뒤로하고 자리를 뜨려던 때였다.

“정말, 흐흡, 친절하시네요. 세상 사람들은 다 겉과 속이 다른 쓰레기구나, 생각했었는데…….”

‘대체 무슨 일을 당한 거야.’

나는 잠시 고민했다.

하지만 역시 내 또래 여성이 저렇게나 절망하고 있는 모습을 매몰차게 못 본 척하기는 힘들었다.

“무슨 일이 있으셨나요?”

“그게…… 끄흡.”

조심스레 묻자 여자가 술술 사연을 털어놓았다.

여자에게는 죽고 못 사는 연인이 있었다고 했다. 이 사람이 바로 내 평생의 사랑이구나, 싶을 정도로 천생연분이었다고.

그리고 어제는 그 연인이 엘리트들만 배출하기로 유명한 아카데미에 합격 통지를 받은 기쁜 날이었다고 했다.

“잘됐네요!”

아카데미라는 말을 들으니 이안의 어린 시절이 떠올라 나는 과하게 손뼉을 쳤다.

여자가 손수건에 눈물을 찍어 냈다.

“저도 너무 기뻤어요. 오늘 아침에…… 저만 침대에 홀로 버려져 있는 걸 발견하기 전까지는요.”

“아…….”

탄식한 나는 안타까운 마음에 물었다.

“확실한가요? 잠깐 일이 생겨서 외출했던 건 아닐까요?”

“그 사람은 그런 일이 있으면 꼭 쪽지 한 장이라도 남겨 놓는 사람이었어요. 가장 중요한 건, 지갑과 소지품도 모두 가져갔더라고요!”

“세상에.”

나는 고개를 절레절레 내저었다.

아카데미에 입학해 인생 피자마자 연인을 버리다니. 정말 그런 나쁜 놈이 있을까 의심스러웠지만, 당사자가 저렇게 말하니까 맞겠지 싶었다.

“정말 쓰레기 같은 사람이네요.”

“저는 정말 그 사람을 철석같이 믿었어요. 몸이 약한 절 위해 늘 보양식을 챙겨 주고, 값비싼 선물도 해 주고, 골목길에서 불량배들을 만났을 땐 절 위해 몸을 던지기까지 했다고요!”

“세상에. 그 정도면, 저 같아도 정말 날 사랑하고 있다고 생각했을 것 같아요.”

그렇게 대답하면서 나는 묘한 기시감을 느꼈다.

뭐지. 여자가 나열한 일들이 어딘가 익숙한데.

생각해 보니 이안이 내게 했던 행동들과 상당 부분 일치하는 것 같기도 했다.

물론, 나는 이안에게 반드시 지켜야 하는 계약 상대였다는 차이점이 있었지만.

“언젠가, 흐흡, 결혼할 줄로만 알았는데……!”

“하아. 이리 와 봐요.”

나는 여자의 어깨를 끌어안고 토닥거렸다.

“그런 쓰레기 때문에 슬퍼할 필요 없어요. 지금은 하늘이 무너진 듯 힘들겠지만, 언젠가 차라리 이날을 고마워하게 되는 날이 올 거예요.”

“흑, 그런 날이 올까요……?”

여자가 훌쩍거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고마워요, 정말. 당신 같은 분도 있는 걸 보니 아직 세상은 살 만한가 봐요. 제 이름은 바네사예요.”

“샬롯이에요.”

가명을 말한 뒤 나와 바네사는 짧은 악수를 나누었다.

바네사가 나를 멍하니 바라보았다.

“왜 어디서 본 것 같은 기분이 들죠……?”

헉. 혹시 신문에서 본 내 얼굴을 기억하나?

이 세계의 사진들은 지구와 달리 화질이 그리 좋은 편은 아니지만, 눈썰미 좋은 사람이라면 날 알아볼 수도 있을 것 같았다.

나는 슬쩍 고개를 모로 돌리며 말했다.

“다른 사람이랑 착각하신 것 아닐까요?”

“그러긴 힘들 것 같은데요. 이렇게 예쁘신데…….”

“네? 흐, 흐흠. 감사해요.”

이 바네사라는 친구, 훅 들어오는 칭찬 실력이 상당했다.

나는 바네사의 어깨를 토닥거리며 말했다.

“아무튼, 바네사 양. 시간이 약이라는 말이 정말, 괜히 흔한 위로인 게 아니에요. 지금은 진부하게 들리겠지만, 저 말만 꾹 믿고 기다리면-”

“바, 바네사!”

애타는 외침에 나는 깜짝 놀라 뒤를 돌아보았다.

웬 청년이 우리 쪽을 향해 전력 질주해 오고 있었다.

“바네사, 바네사! 맙소사. 여기 있었구나!”

“헨리?!”

“……?”

나는 물음표를 가득 매단 채 돌아가는 상황을 바라보았다.

아무래도 헨리라 불린 이 청년이 바네사를 버린 그 연인인 모양이었다.

“너, 너, 네가 왜 여기에…….”

“왜냐니! 널 찾으려고 오늘 아침부터 도시를 안 뒤진 데가 없었어!”

“뭐……?”

바네사의 눈이 커다래졌다.

“날 찾았다고? 버리고 떠난 게, 아니었어?”

“내가 너를 왜 버려. 이 바보야!”

헨리가 그렇게 외치며 바네사를 꽉 부둥켜안았다. 바네사의 동공이 마구 흔들렸다.

‘음. 보아하니 해피엔딩으로 끝나는 잠깐의 해프닝이었군.’

헨리는 바네사를 버린 게 아닌데, 바네사가 오해한 모양이었다.

살짝 김이 새긴 했지만 바네사를 생각하면 아주 잘된 일이었다.

“나, 난 네가 날 버리고 아카데미로 가 버린 줄만 알고…….”

“그게 무슨 소리야. 내가 남긴 편지 안 봤어?”

“편지?”

“그래! 협탁 위에 남긴 편지 말이야!”

저런. 나는 고개를 내저었다.

편지를 적었는데 못 본 거구나. 이렇게 간단한 오해일 줄은 미처 몰랐다.

‘그나저나 협탁 위에 편지를 남기는 건 만국 공통인가 보네.’

나 역시 불과 몇 시간 전 협탁 위에 이안을 위한 편지를 남기고 온 상황이었기에, 헨리의 행동에 공감했다.

“편지라니. 난, 난 못 봤어. 그런 건 안 보였는데!”

“바네사, 너 잠버릇이 좋진 않잖아. 혹시 뒤척이다가 떨어뜨렸던 건 아닐까?”

“맙소사.”

바네사가 제 입을 틀어막았다. 헨리가 안타까운 얼굴을 했다.

“잠깐 학장님과 화상 면담을 해야 해서, 화상 서비스를 이용하러 마탑에 다녀오겠다고 적어 놨었어. 네가 너무 곤히 자고 있어서 깨우는 대신 편지를 남겼던 건데!”

“오, 헨리. 난 그것도 모르고!”

헨리와 바네사가 서로 부둥켜안았다.

‘음, 잘되었군.’

이미 둘만의 세상에 빠져든 커플을 위해 나는 슬그머니 자리를 뜨려 했다.

그때 바네사가 나를 돌아보았다.

“샬롯 양! 당신 덕분이에요.”

“네? 저요?”

“네. 당신이 아니었으면 전 지금쯤 고향으로 돌아가는 마차를 타고 있었을 테니까요!”

“바네사……! 정말 감사합니다. 저희 바네사를 말려 주셔서요!”

아니, 난 거의 아무것도 안 했는데.

어색하게 웃자 바네사가 간절한 눈빛으로 말했다.

“보답하게 해 주세요, 샬롯 양. 아, 이 근처에 근사한 주점이 있는데. 저희가 대접하게 해 주시면 안 될까요?”

“좋은 생각이야, 바네사! 은인님, 부탁드립니다. 은인님이 아니었다면 바네사를 잃을 뻔했어요. 그럼 제 세상도 무너졌겠죠!”

“어…….”

“‘로제타’ 휴일이 언제였지, 바네사?”

“아무튼 오늘은 아니었어.”

잠깐. 로제타?

나는 마차를 타고 오며 읽었던 메이우드 관광 안내서를 떠올렸다.

‘그 엄청 핫하다던 회원제 클럽!’

굉장히 유명하고, 이름값을 할 만큼 음식 수준도 높지만 클럽에 들어가는 것부터 하늘의 별 따기 수준이라고 적혀 있었다.

그 지역에서 가장 잘나가는 장소에 가 보고 싶은 건 관광객의 당연한 심리.

거리나 좀 더 구경하다가 호텔로 돌아가려던 마음이 팔랑팔랑 기우는 것이 느껴졌다.

“흐, 흠. 제가 신세 져도 될까요?”

“물론이죠! 함께해 주신다니 영광이에요!”

헨리와 바네사가 손뼉까지 치며 나의 합류를 환영해 주었다.

커플은 즉흥적인 만큼 행동력도 대단했다. 나는 둘의 이끌림에 따라 곧장 클럽 로제타로 향했다.

머지않아 우리는 척 봐도 열기로 후끈거리는 건물 앞에 도착했다. 문 앞이 입장 줄로 가득했다. 저 줄이 줄기를 기다릴 생각을 하니 아득해져 왔다.

‘으음, 역시 내일 관광을 위해 일찍 들어가서 잠이나 잘 걸 그랬나…….’

“여기서 잠깐 기다려요.”

바네사가 자신 있게 말하더니, 줄의 맨 초입 부분으로 걸어갔다. 나는 얼떨결에 헨리와 둘만 남게 되었다.

“바네사 양이 클럽 문지기와 연이 있나 봐요?”

“네. 아주 발이 넓은 친구거든요. 정말 멋진 여자예요…… 바네사는.”

그렇게 말하는 헨리의 목소리가 아련했다. 나는 그를 돌아보았다.

헨리는 부드러운 갈색 머리를 지닌, 서글서글한 인상의 미남이었다. 시무룩한 표정까지 짓고 있으니 완연한 강아지상이었다. 종으로 따지면 골든 레트리버 같달까.

“사실…… 오늘, 바네사에게 청혼할 계획이었어요.”

“네?”

“내일이면 아카데미로 떠나야 해서, 꼭 오늘 청혼하고 싶었거든요. 저, 샬롯 씨. 혹시 제 부탁을 들어주실 수 있을까요?”

헨리가 간절한 얼굴로 말하더니, 품속에서 무언가를 꺼냈다.

마탑에서 진열되어 있는 걸 본 적 있는 물품이었다. 영상 녹화 기능이 있는 수정구였지, 아마?

“이걸로 제 청혼을 녹화해 주신다면 정말, 정말 감사하겠습니다.”

“허허…….”

생각지도 못했던 부탁에 나는 머쓱히 웃었다.

당황스럽긴 했으나, 뭐. 못 해 줄 것도 없었다. 나중에 돌이켜 보면 여행지에서의 색다른 추억이 될 것 같았다.

“좋아요. 녹화해 드릴게요.”

“정말 감사드립니다! 샬롯 님께서는 제게 은인 그 자체세요!”

“음, 이건 그냥 궁금해서 물어보는 건데. 둘은 혹시 만난 지 얼마나 되셨어요?”

“아, 이제 한 달 됐습니다!”

“……?”

나는 멍하니 헨리를 바라보았다.

한 달? 고작 한 달이라고?

‘뭐야, 이 미친 속도감……?’

당황하고 있는데 바네사의 목소리가 들렸다.

“둘이 무슨 이야기 하고 있었어요?”

“아! 아무것도 아니야!”

헨리가 얼버무리며 바네사를 맞이했다.

우리는 함께 클럽 로제타에 입장했다. 줄을 모두 패스하며 들어가는 기분이 썩 나쁘진 않았다.

“와아.”

안을 둘러보며 나는 감탄했다.

클럽 안은 붉은 조명으로 가득해, 묘하면서도 몽환적이었다.

이 세계에 오고 나서 많은 곳을 가 보았지만 이런 느낌을 지닌 장소는 또 처음이었다.

‘뭔가, 오면 안 될 곳에 온 듯한 느낌.’

불그스름한 조명 때문인지, 여기 서 있는 것만으로도 나쁜 짓을 저지르고 있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건배해요, 샬롯 님. 건배!”

바네사와 샬롯이 내게 샴페인을 따라 주었다.

어느새 둘은 나를 샬롯 ‘님’이라고 부르고 있었다.

잔을 맞댄 뒤 샴페인을 넘기는 순간, 진한 술기운이 훅 끼쳐 들어왔다.

“……바네사.”

어느 순간, 헨리가 진지한 얼굴로 바네사를 돌아보았다. 품속에서 반지 케이스를 꺼낸 채.

지금인가.

나는 주섬주섬 헨리가 맡긴 수정구를 꺼내 들었다.

놀란 바네사에게 헨리가 정리해 온 듯한 프러포즈 멘트를 읊었다.

“바네사. 너는 내가 만난 중 단연코 최고의 여자야. 내가 아카데미를 졸업하면…… 그때 우리 결혼하자.”

“뭐, 뭐라고?”

“내 아내가 되어 줘, 바네사!”

“헨리……!”

바네사가 제 입을 틀어막았다. 감격한 듯 두 눈에는 눈물이 글썽거렸다.

그 모습을 보고 있자니, 어째서일까.

나도 모르게 픽 웃음이 흘러나왔다.

고작 한 달 만난 커플이 저렇게 서로를 향한 사랑을 맹세하고 있는 광경을 보고 있자니, 어쩐지 내가 부둥켜안고 있던 고민이 깃털처럼 가볍게 느껴졌다.

‘한 달에 비하면, 나와 이안의 일 년은 거의 평생 수준 아닌가.’

술기운이 들어가서일까.

아니면 눈앞의 커플이 보여 주는 호들갑과 주책의 향연 때문일까.

문득 나도 모르게 이안의 얼굴을 떠올렸다.

‘내가 정말 미친 걸까.’

나는 자조하듯 희미하게 미소 지었다.

마지막으로 본 게 고작 반나절 전인데도, 거짓말처럼 그가 그리웠다.

얼굴을 보고 싶었고, 목소리가 듣고 싶었다. 나를 의심하는 눈초리라든가, 나를 힐난하는 목소리라도 좋으니까.

‘아이린.’

그렇게 부르며 날 지그시 노려볼 때면, 공포로 오금이 저려 오곤 했었지.

‘아니. 잠깐. 그런 목소리가 듣고 싶다니. 나 정말 제정신이 아닌 거 아냐?’

아무리 사랑에 빠진 사람들은 다들 조금씩 미쳐 있다곤 하지만, 이건 좀 심했다.

정신 차리자. 이서연.

나는 벽에 가볍게 머리를 찧었다. 쿠션처럼 된 벽이라 그래 봤자 아프지도 않았다.

퍽, 퍽.

몇 번 더 주먹 대신 벽으로 머리를 쥐어박는데, 문득 부드러운 손길이 내 이마를 감싸 왔다.

‘응?’

나는 멍하니 위를 올려다보았다.

……뭐지.

샴페인이 무척 독한 녀석이었던 모양이다.

아니면 내가 첫사랑에 취해 정말 맛이 가 버렸거나.

그게 아니라면, 지금 내 눈앞에 이안이 이토록 선명히 보일 리가 없었다.

‘그것도, 저렇게 무서운 얼굴로.’

이안의 환상은 내가 방금까지 상상하던 모습 그대로, 서늘한 눈을 한 채 나를 차갑게 내려다보고 있었다.

‘그래. 이 감각이야.’

그 눈빛을 바라보며 나는 침을 꿀꺽 삼켰다.

이 오금이 저리는 감각. 이 본능적인 공포.

이안과의 첫 만남부터 나를 덮쳤던 바로 그 감각이었다.

오랜만이네. 이런 기분도.

나는 그리움을 느끼며 희미하게 미소를 흘렸다.

그러자 이안의 환상이 지그시 미간을 찌푸렸다.

“……뭘 웃고 있는 겁니까?”

서릿발처럼 차디찬 음성이 귓가에 내리꽂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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