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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8화 (138/161)

138화

대성당에서 꽤 오래 일해 왔지만, 이안이 이렇게 동요한 모습을 보이는 건 처음이었다.

‘설마, 아이린 님과 뭔가 틀어진 게 있으셨던 걸까?’

그러고 보면 아이린의 상태가 조금 이상하긴 했다.

바람을 쐬고 와야겠다고 말하던 아이린을 떠올린 아네트는 침을 꿀꺽 삼켰다. 지금 생각해 보니 그때의 아이린은 평상시와 어딘가 분위기가 달랐다.

“그, 그러고 보니.”

아네트가 더듬거리며 입을 열었다.

“아이린 님, 심경이 조금 복잡해 보이시기는 했어요……! 갑자기 바람을 쐬고 와야겠다고 말씀하시는 것도 이상하기는 했고요!”

말하면 말할수록 아네트는 심장이 덜컥거리는 것을 느꼈다.

‘아이린 님을 그렇게 보내 드리면 안 되는 거였나 봐!’

걱정이 되기는 했지만, 조안 경이 함께 가니 괜찮겠지 싶어 마음을 놓았었는데.

아네트는 안일했던 몇 시간 전의 자신에게 화가 났다.

아네트가 당황함에 따라 이안의 표정도 한결 더 어두워졌다.

“부인께서 정확히 무슨 말을 하셨지?”

“아까 말씀드렸던 것이 전부예요. 바람을 쐬고 오고 싶으시다고, 생각을 정리할 일이 있으시다고 하셨어요! 혼자 있고 싶어 하시는 것 같아서 저도 그 이상은 묻지 않았고요…….”

아네트는 이제 거의 울먹거리고 있었다.

“아, 아마 괜찮으실 거예요. 조안 경께서도 함께 가셨으니까요……!”

마치 스스로에게 말하듯이 간절한 어투로 아네트가 말했다.

이안의 표정이 차갑게 식었다.

“조안…… 그래. 조안.”

조안 오르테스가 지금 누구의 사람인지 이안은 똑똑히 알고 있었다.

성기사단에 적을 두고 있지만 조안은 현재 아이린에게 충성을 다하고 있었다.

그렇다고 자신의 명령에 불복하는 것은 아니었지만, 만약 아이린과 제 명령이 서로 상충한다면…….

‘아이린을 따르는 쪽을 택하겠지.’

이안의 눈이 어둡게 가라앉았다.

고개 돌린 이안이 서릿발 같은 시선을 루시안에게 던졌다.

“부인의 흔적을 추적해라. 지금 당장.”

“아, 알겠습니다. 단장님.”

사태의 심각성을 느낀 루시안이 황급히 대답했다.

‘제기랄.’

이안은 입술을 짓씹었다.

아이린이 사라졌다. 조금의 언질도 남기지 않은 채.

어째서?

머릿속엔 그 의문만이 가득했다.

아니, 사실 짚이는 게 없지는 않았다.

‘선을 넘은 건가. 내가.’

불과 몇 시간 전의 일을 떠올린 이안은 손끝이 차갑게 식는 것을 느꼈다.

그때의 입맞춤은 전에 없었을 만큼 깊고 진했다.

아이린이 거부하지 않았기에, 그녀도 허락한 일이라고 생각했다. 조금이라도, 미약하게라도 저항했더라면 결코 선을 넘지는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그녀가 그런 내색을 전혀 하지 않았기에…….

‘아니. ……아니야.’

이안은 손바닥에 얼굴을 묻었다.

모두 제 변명이었다. 추하기 그지없는.

당연히 아이린의 의사를 먼저 물었어야 했다. 격정에 휘말려 그녀의 입술부터 물 것이 아니라, 먼저 대화를 했어야 했다.

자신이 그녀에게 느끼고 있는 감정에 대해. 그리고 앞으로의 일에 대해, 먼저 이야기를 나누었어야 했다.

제 다급함이 일을 그르쳤다.

그렇게 생각하자 심장이 싸늘하게 가라앉았다.

후회해도 소용없었다. 용서를 빌 아이린은 이미 이 자리에 없었으니.

이안은 천천히 입을 열어 마지막 실낱같은 희망을 말했다.

“남기신 편지 같은 것도 없나?”

“편지요…….”

아네트는 황급히 머릿속을 뒤져보았다.

“아!”

그러고 보니 자신이 한창 아이린의 여행 준비를 하는 동안, 그녀는 책상 위에서 무언가를 적고 있는 모습이 보였었다.

“떠나기 전에 뭔가를 쓰고 계시기는 했어요! 그게 편지였던 건지는 모르겠지만……!”

“그게 사실인가?”

손바닥에서 얼굴을 뗀 이안이 득달같이 물어왔다.

아네트가 얼른 고개를 끄덕였다.

“네, 네. 분명 편지지와 비슷하게 생긴 종이였는데…… 아, 그래. 저 책상 위에서 쓰고 계셨어요!”

이안의 발걸음이 곧장 책상 위를 향했다.

그러나 그 위에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절망이 다시금 그의 심장 위로 내려앉으려던 무렵이었다.

“단장님!”

루시안이 다급히 말했다.

“여기 종이 한 장이 떨어져 있습니다!”

“뭐?”

이안이 순식간에 루시안에게로 다가갔다.

협탁 밑으로 허리를 숙였던 루시안이 순백색의 편지 한 장을 집어 들었다.

“헉. 이안 님께, 라고 쓰여 있군요!”

이안의 얼굴에 순간 안도 한 조각이 스쳐 지나갔다.

편지지를 확인한 이안은 짧게 숨을 내쉬었다.

「이안 님께.」

그건 아이린의 필체가 맞았다.

이안은 빠르게 시선을 넘겼다. 그리 길지 않은 문구가 그 안에 적혀 있었다.

「갑작스러운 편지 죄송해요.」

그 말을 보자마자 이안은 마음속 어둠이 한 겹 걷히는 것을 느꼈다. 아이린이 제게 아무런 흔적도 남기지 않은 아니었던 것이다.

그러나 다음 문장을 읽는 순간 이안의 눈빛이 다시금 어두워졌다.

「저는 최근 겪었던 여러 가지 일들로 인해 생각을 정리할 시간이 필요하다고 느껴, 성당을 떠나 있으려 합니다.」

……생각을 정리할 시간.

그 문구가 전에 없이 무겁게 다가왔다.

아이린에게 최근 여러 큰일이 닥쳐왔던 것은 사실이었다. 이성은 그녀에게도 사람들의 이목 없이 숨 돌릴 시간이 필요하다는 것을 이해하고 있었다.

하지만 본능은 계속해서 불안을 호소했다. 이안은 편지를 마저 읽어 내려갔다.

「오늘 밤 만나기로 했던 약속 지키지 못하는 점, 다시 한번 사과드립니다.」

거기까지 읽은 이안의 시선이 흔들렸다.

아이린의 필체가 엉망으로 흐트러져 있었다. 힘없는 손에 억지로 펜을 쥔 것처럼.

“……아이린.”

이안이 신음하듯 중얼거렸다.

아이린은 도대체 어떤 심경으로 이 편지를 적은 것일까?

어투는 언뜻 담담해 보이지만, 흔들리는 필체가 그녀의 복잡한 속내를 짐작하게 했다.

「조안 경과 함께 갈 테니 제 걱정은 하지 마세요. 위험한 곳은 가지 않을 거니까요.」

이안의 눈이 순간 커다랗게 뜨였다.

온점 옆으로 종이가 살짝 우그러져 있었다.

마치, 물방울 하나가 똑 떨어진 듯이.

“…….”

이안은 편지지를 꾹 쥐었다. 절로 손에 힘이 들어갔다.

‘……설마.’

이안의 손가락이 멍하니 물방울 자국을 더듬었다.

손끝에서부터 짭짤한 소금기가 느껴지는 것 같았다.

이안은 추를 매단 듯 가슴이 깊게 내려앉는 것을 느꼈다.

설마, 그녀가…… 울었던 것일까? 이 편지를 쓰면서?

그 광경을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심장이 까맣게 어두워졌다.

“하.”

이안이 낮게 한숨을 토해 냈다.

이 편지를 쓸 당시의 아이린을 당장이라도 끌어안고 싶었다.

하지만 그녀는 이미 여기서 사라지고 없었다.

「저희 계약에 대해서는 물론 잊지 않으셨겠죠? 확실히 이행해 주시길 바라요.」

그 대목을 읽은 이안은 천천히 눈을 감았다 떴다.

‘……계약?’

아이린과 자신이 맺은 계약에 대해서, 이안은 물론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었다.

그도 그럴 것이, 바로 몇 시간 전만 해도 그 계약서를 들여다보고 있었으니까.

계약의 골자는 간단했다.

아이린은 이안과의 비밀을 지키고 가짜 부인 행세로 그를 도울 것.

그리고 이안은, 모든 일이 끝나고 난 뒤, 아이린의 실종을 도울 것.

“…….”

이안의 손아귀 힘에 편지지 끝이 우그러졌다.

이안은 편지지를 뚫어져라 노려보았다.

‘설마. ……아이린.’

계약 기간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하지만 따지고 보면, 라시드가 죽은 이상 더 계약을 지속할 필요가 없어진 것은 사실이었다.

설마, 거기 생각이 미친 아이린이, 일방적으로 계약을 종료해 버린 거라면.

「저희 계약에 대해서는 물론 잊지 않으셨겠죠?」

이안의 시선이 정처 없이 편지지 위를 맴돌았다.

계약 당시, 모든 것이 끝나면 누구도 자신을 찾지 못하도록 도와 달라고 말하던 아이린의 얼굴이 떠올랐다.

이안은 거세게 주먹을 쥐었다.

아니.

이대로 보내 줄 수는 없었다.

계약 불이행이라고 해도 좋았다. 아이린이 자신을 탓하게 된다 해도 이것만큼은 양보할 수 없었다.

‘아직 아무런 말도 건네지 못했는데.’

이안은 아프도록 입술을 짓씹었다.

떠나지 말라고 설득조차 해 보지 못한 채 실패할 수는 없었다.

“루시안. 말을 준비해라.”

“단장님?”

“지금 당장 떠날 터이니.”

거침없이 방을 나서는 이안의 뒤를 루시안이 황급히 따라붙었다.

“호, 혹여 언제 돌아오실 예정이십니까? 아시다시피 결재해 주셔야 할 안건이 한가득인지라…….”

“글쎄. 당분간 부탁하지.”

루시안은 영혼이 흘러나간 표정을 지었지만, 차마 이안을 막지는 못했다. 아이린이 사라졌다는 이 상황의 심각성을 루시안 역시 인지한 상태였다.

“단장님, 메이우드요!”

이안의 뒷모습을 향해 아네트가 외쳤다.

“아이린 님께서 제게 메이우드로 가겠다고 하셨어요!”

“그래. 고맙군.”

이안이 짧게 고개를 끄덕였다.

만약 아이린이 작정하고 사라진 것이 맞다면, 아네트에게 말한 행선지와 다른 곳으로 향했을 확률도 있었다.

그러나 일단은 지푸라기 같은 가능성이라도 잡아 보아야 했다.

“내 움직임과 별개로, 수색대를 조직해 부인의 흔적을 추적해라.”

“그분을 발견하면, 어떻게 합니까?”

“정중하게 모셔 오도록.”

한 치 망설임도 없이 이안이 답했다.

루시안이 조심스레 되물었다.

“혹여, 거부하신다면요……?”

“내가 빌었다고 해.”

루시안의 눈이 커졌다.

희미하게 입꼬리를 끌어올린 이안이 이어 말했다.

“한 번이라도 대화할 기회를 달라며, 내가 구걸했다고. 최대한 진정성 어린 얼굴로 빌어 봐.”

자조하듯 미소 짓는 얼굴이지만 결코 농을 하는 것 같지는 않았다.

루시안은 꿀꺽 침을 삼키고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습니다. 단장님.”

오늘 밤 안에는 꼭 두 분이 다시 만날 수 있게 되기를.

간절히 바라며 루시안은 수색대를 꾸리기 위해 화급히 방을 나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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