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37화 (137/161)

137화

지배인이 손수 안내해 준 2호점은, 1호점보다도 더 아름다운 외관을 하고 있었다.

크림색 벽돌에, 외벽을 감싼 싱그러운 빛깔의 담쟁이덩굴.

동화책에나 나올 것처럼 예쁜 호텔에 나는 홀랑 마음을 빼앗기고 말았다.

‘대성당도 없던 신앙심까지 솟아날 만큼 아름다웠지만…….’

물론 대성당은 건물 자체가 대륙 각지에서 관광 올 만큼 대단한 예술품이었다.

그런 곳에서 근 일 년을 살아와 눈이 높아질 대로 높아진 나지만, 이 호텔의 색다른 매력에도 마음이 끌렸다.

‘기분 전환은 확실히 되겠는걸.’

스위트룸이라는 이름답게 방 안 역시 몹시 흡족스러웠다.

“이곳입니다, 샬롯 님. 저희 2호점이 자랑하는 최고급 객실이죠! 거품 목욕, 마사지, 와인 등등 다양한 서비스까지 24시간 제공해 드리고 있습니다. 언제든 벨을 당겨 주시면-”

“저, 지배인님, 실례지만…….”

자부심 가득한 어조로 설명해 주던 지배인에게 호텔 직원이 종종걸음으로 다가왔다.

“어머님께서 방금 연락을 주셨는데, 제리엘 씨께서 돌아오셨다고…….”

직원이 속닥거리자 지배인의 눈이 삽시간에 커다래졌다.

“뭐라고? 그놈이 여기가 대체 어디라고 감히! 허험, 험. 죄송합니다, 샬롯 님.”

벼락같이 화내던 지배인이 내 눈치를 보더니 사과해 왔다.

“제리엘이라는 건 제 동생 녀석인데, 십 년 전 집 금고에서 오만 골드를 홀랑 훔쳐서 달아난- 아니, 흠, 흠. 제가 샬롯 님께 쓸데없는 이야길 하고 있군요.”

“아니에요. 급한 사정 같은데, 가 보셔야 하는 것 아닌가요?”

사과하는 지배인의 얼굴이 심상치 않았다.

붉으락푸르락 달아오른 게, 당장이라도 제리엘이라는 이름의 동생을 두들겨 패러 달려가고 싶어 하는 것 같았다.

“객실까지 안내해 주셔서 감사해요. 이만 가 보셔도 돼요, 지배인님.”

“하지만 아직 관광지 설명이 덜 끝났는데…….”

“제가 알아서 돌아다닐 수 있어요. 어서 가 보세요.”

“정말 감사합니다, 샬롯 님. 마음씨가 비단결 같으시군요! 괜히 만 번째 손님이 되시는 행운이 찾아온 게 아닌 모양입니다!”

지배인이 고마워하며 내 객실로 무료 룸서비스를 올려 보내겠노라 약속했다.

생각지도 못했던 답례에 크게 감격한 나는 어서 가 보라며 지배인을 떠밀었다.

조안 경과 둘만 남게 된 나는, 야경이 그대로 내려다보이는 창가를 거닐었다.

“정말 아름답네요.”

“기분이 조금 풀리십니까?”

“그렇게 안 좋아 보였나요, 내 기분?”

“예. 심각한 고민이 있으신 것 같습니다.”

조안 경이 조심스레 내 안색을 살폈다.

“혹여 저라도 도움이 될 수 있다면, 언제든 들어 드리겠습니다.”

“…….”

나는 가만히 생각에 잠겼다. 누군가에게 마음을 털어놓을 수 있다면 한결 기분이 가벼워질 것 같긴 했다.

‘아냐. 말 못 해.’

하지만 아무래도, 당신 상사를 진심으로 좋아하게 되어 버려 고민이라는 말은 낯뜨거워 할 수 없을 것 같았다.

“그러면, 제 밤 나들이 상대가 되어 줄래요?”

“물론입니다.”

나는 흔쾌히 대답해 준 조안 경과 함께 메이우드 거리로 나섰다.

알록달록 물든 단풍이 은은한 가로등 불빛과 어우러져 예쁜 풍경을 자아내고 있었다.

‘마차로 한 시간도 안 걸렸을 만큼 근처인데도, 이렇게 수도랑은 다른 분위기가 나는구나.’

나는 감탄하며 주위를 둘러보았다.

생각해 보면, 이 세계에 온 이후 여행다운 여행은 한 번도 해 본 적이 없었다.

‘리칼리온에 다녀온 건, 여행이라고 하기엔 좀 그렇지.’

이렇게 푹 마음 놓고 하는 여행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평화롭다…….”

나는 나도 모르게 멍하니 중얼거렸다.

한가로이 거리를 거닐고 있자니, 약속이라도 한 듯 머릿속에 불청객이 찾아 들어왔다.

이안을 떠올리며 나는 쓰게 웃었다.

‘뭘 하고 있을까. 지금쯤.’

어쩌면 아직도 일에 매진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아니면, 만나기로 약속해 놓고 갑자기 사라진 나를 어이없어하고 있을지도 모르지.

‘……어떻게 반응할까, 너는. 지금 내 머릿속이 이렇게 복잡한 이유를 알게 되면.’

내가 자신에게 어떤 감정을 품고 있는지 알게 된다면, 이안은 어떻게 행동할까?

“하아.”

나도 모르게 한숨이 흘러나왔다.

이안에게 내 마음을 들킨다는 상상만 해도 가슴이 빠르게 뛰었다.

첫사랑에 대한 묘사는 여태껏 다양한 매체를 통해 많이 접해 왔었다.

마음이 온종일 두근두근 설레고, 세상이 온통 아름다워 보인다지.

내가 보고 들어 온 첫사랑은 대개 그렇게 아름답고 사랑스러운 감정이었다. 색깔로 치자면 분홍색, 하늘색 같은, 부드러운 파스텔 톤으로 칠해져 있을 것 같았다.

그런데 웬걸. 내게 찾아온 첫사랑은 부끄러운 붉은빛으로 잔뜩 뒤덮여 있었다.

마치 0점짜리 시험지라도 받은 양 꽁꽁 감추고만 싶었다. 그 사람 앞에서 이 감정을 들통난다고 생각하면 식은땀이 절로 솟았다.

‘만약, 정말 들키게 된다면…….’

이 마음을 이안이 어떤 방식으로든 알게 된다면.

그렇게 된다면, 이안은 무어라 반응할까?

“…….”

불과 몇 시간 전의 키스가 떠올랐다.

그 키스에는 아무 이유도 없었다. 내가 급히 신성력을 필요로 할 만큼 아파 한 것도 아니었고, 누군가에게 부부 연기를 할 필요도 없었다.

그런데도 그는 내게 키스해 왔다. 나를 밖에 신세 지게 하고 싶지 않다는, 이상한 이유를 대며.

‘어째서?’

그제야 이 의문이 떠올랐다.

이안은 내게 왜 입 맞춰 왔던 걸까.

깊디깊었던 입맞춤이 떠오르자 다시금 얼굴로 확 열이 올랐다. 아무 이유가 없었던 것치고는 너무 농밀한 키스였다. 마치 진짜 연인들이 하듯이.

‘연인…….’

가슴이 쿵, 쿵, 세차게 뛰어왔다.

혹시, 하는 가능성이 불 들어온 전구처럼 머릿속을 환히 밝혔다.

‘혹시, 어쩌면. 이안도 나를…….’

볼이 새빨갛게 달아올랐다.

‘아니야.’

첫사랑에 겁먹은 심장이 지레 부인했다.

하지만 그래도 ‘어쩌면’이라는 가능성은 쉽사리 물리쳐지지 않았다.

어쩌면 이안 역시 나를 좋아하는 걸지도 몰라.

그게 아니라면 그렇게 깊게 키스해 오지 않았을 거야.

악마처럼 가능성들이 내게 속삭여 왔다.

‘오늘 밤에 하자던 이야기.’

이안이 몇 번이나 강조했던, 오늘 밤의 약속이 떠올랐다.

당연히 계약에 관련된 이야기일 거라 생각했었다.

하지만, 어쩌면 이안이 하려던 이야기는 다른 것이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이제야 들었다.

‘……어떡해.’

가능성을 마주하는 것만으로도 심장이 미친 듯이 뛰어 댔다.

아직 확실하지 않다고, 아무것도 알 수 없다고 스스로를 타일러 봐도 가슴이 말을 듣지 않았다.

‘원래 이런 거야?’

나는 진이 쪽 빠진 채 생각했다.

원래 누군가를 좋아한다는 게, 이렇게 제어가 안 될 정도로 온종일 심장이 널뛰기하는 것일까?

그렇다면 세상 사람들은 전부 상당히 힘든 과정을 거치고 있었던 거다. 갑자기 첫사랑을 겪은 모든 사람이 한결 존경스러운 어른으로 보이기 시작했다.

“아이린 님. 정말 괜찮으신 것 맞습니까?”

내내 나를 지켜보고 있었던 건지 조안 경이 심각한 목소리로 말을 붙였다.

“여행도 좋지만, 역시 대성당으로 돌아가셔서 안정을 취하시는 건 어떨까요.”

“그, 그건 안 돼요.”

나는 얼른 고개를 내저었다.

아직 아무것도 마음이 정리된 게 없었다. 이 상태로 이안을 마주했다간, 어버버 입술이나 더듬다가 수치스러워서 도망치고 말 것이다.

“아직은 안 돼요. 조금만 더 쉬다가 그때…….”

“흐흑, 흑.”

흐느낌 소리가 내 목소리를 끊었다.

서러운 울음소리에 나는 깜짝 놀라 소리가 나는 쪽을 돌아보았다.

잘 조경된 공원 벤치 구석에서, 웬 여자 한 명이 서럽게 울고 있었다.

“흐흑, 흡…… 나쁜 새끼.”

어두운 공원에서 혼자 울고 있는 내 또래의 여자.

절로 마음이 짠해지는 광경이라 나도 모르게 손수건을 꺼내 들고 그녀에게로 다가갔다.

“저어, 괜찮으세요……?”

* * *

“아, 아이린 님이요?”

토끼처럼 눈이 동그래진 아네트가 황급히 입을 열었다.

“그래. 어디로 가셨지?”

대답하기가 무섭게 이안이 물어왔다.

아네트는 히익, 숨을 집어삼켰다. 이안의 서슬 퍼런 기세에 하마터면 딸꾹질이 나올 것 같았다.

잘못한 게 아무것도 없는데도 움츠러드는 것을 느끼며 아네트는 간신히 대답했다.

“아이린 님께서는 잠시 여, 여행을 다녀오시겠다고 하셨어요.”

“여행?”

이안이 되물었다. 지독히 차가운 목소리로.

아네트는 등골로 식은땀이 퐁퐁 샘솟는 것을 느꼈다.

‘당연히 단장님께서도 알고 있는 줄 알았는데!’

둘은 부부니까, 당연히 이안과도 여행 계획을 공유했을 거라고 생각했었다.

그런데 이안은 지금 아이린의 여행에 대해 난생처음 듣는 것 같았다.

생전 빈틈 한 번 보인 적 없던 그는, 지금 마치 누군가에게 뒤통수를 한 대 맞은 것 같은 표정을 하고 있었다.

이안에게서 보리라고는 한 번도 생각하지 못한 표정에 아네트는 절로 오금이 저렸다.

“여행이라…… 하.”

이안이 낮게 헛웃음 쳤다.

아네트는 황급히 입을 열었다. 아이린 대신 변명해야 할 것 같은 필요성이 강하게 느껴졌다.

“생각을 좀 정리해야 할 것 같다고 하셨어요. 아무래도 그럴 때는 익숙한 곳을 잠시 떠나 낯선 곳에서 생각을 되돌아보는 것도 좋은 방법이니까요……!”

“생각을 정리한다?”

이안이 차디찬 목소리로 되물어 왔다.

아네트는 이제 정말 딸꾹질을 할 것 같았다.

“부인께서 남긴 마지막 말이 그건가?”

그렇게 묻는 목소리는 지옥에서 올라온 악마처럼 차디차기 그지없었다.

뭔가가 단단히, 아주 단단히 잘못됐다.

호랑이 같은 성기사단장을 앞에 둔 채 아네트는 와앙 울어 버릴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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