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5화
* * *
나는 정신없이 마지막 장을 읽어 내려갔다.
「-대마물 전쟁이 끝난 뒤 제국에는 평화로운 나날이 이어졌다. 아그네스께서는 한가로워진 시간을 신과 대화하는 데에 대부분 할애하기 시작하셨다. 아침부터 밤까지 기도실에서 나오지 않으시는 일이 잦았다.
그러던 어느 날, 아그네스께서는 마르테 대상단을 찾아가 특수한 계약을 맺으셨다.」
전개가 갑작스러웠다. 기도에 열중하다가, 뜬금없이 대상단을 찾아가다니.
왠지 이 뒤의 내용이 바로 내가 찾던 그 내용이리라는 직감이 들었다. 나는 계속해서 책을 읽었다.
「계약의 내용은 대상단은 아그네스께서 의뢰하는 희귀 재료들을 탐색하고, 발견하는 즉시 성녀 아그네스와만 거래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재료들의 종류는 다음과 같았다. 신성 허브 율리아, 만년 서리산의 눈꽃 결정, 가을 정령의 눈물……」
그 뒤로 줄줄이 재료들의 이름이 이어졌다.
척 보기에도 하나같이 희귀하기 그지없어 보이는 재료들이었다.
책은 대상단 중의 대상단인 마르테 상단마저 그 재료들을 모두 구하는 데에는 상당히 애로사항을 겪었다고 적고 있었다.
「……마침내 재료들을 모두 매입한 아그네스께서는, 곧장 특수한 의식에 돌입하셨다. 무슨 의식이냐는 물음에는 스스로의 신성을 정화하기 위한 의식이라는 대답만 돌려주셨다.
의식의 순서는 다음과 같았다……」
책은 아그네스가 어떤 순서로 어떤 의식을 치렀는지까지 자세히 서술하고 있었다.
쿵, 쿵.
내 심장이 미친 듯이 달음박질을 했다.
의식에 대해 설명하는 문단 아래로, 마지막 두 개의 문단이 이어졌다.
「……의식을 마친 뒤, 아그네스께서는 깊은 잠에 빠져 드셨다. 일주일 뒤 깨어나신 아그네스께서는 깊은 혼란을 표하시며 대마물 전쟁에 대해 기억하지 못하는 등 또 한 번 정신 착란 증세를 앓으셨다. 성녀 아그네스를 모시던 시종들은 아그네스께서 깨어나신 뒤로 마치 다른 사람이 된 것 같았다고 묘사했다.
아그네스께서는 머지않아 혼란을 진정하셨으나, 그 이후 다시는 예지의 권능을 사용하지 않으셨다. 또한 성녀 자리에서 물러나겠노라 강력히 주장하셨다. 따라서 성녀 아그네스에 대한 기록은 여기에서 그 끝을 맺는다.」
“……하.”
전부 읽은 나는 허탈한 숨을 내뱉었다.
몸이 파르르 떨려왔다.
‘여기 있었어.’
내가 그토록 찾아 헤맸던 내용이, 바로 이 책 안에 모두 적혀 있었다.
‘성녀 아그네스는, 그 의식을 치른 뒤 돌아가는 데에 성공한 거야. ……지구로.’
아그네스를 기록한 당대 사람들은 그녀의 변화무쌍한 태도에 혼란을 금치 못한 모양이었지만, 그녀와 같은 처지인 나로서는 확연히 알 수 있었다.
아그네스가 이 세계에 머무는 내내 지구로 돌아가는 길을 모색했고, 마침내 성공했다는 것을.
나는 멍하니 책을 내려다보았다.
책에는 아그네스가 행한 의식이 아주 자세히 적혀 있었다. 내가 그대로 따라 할 수 있겠다는 확신을 얻을 만큼.
‘문제는 재료인데.’
아그네스 역시 재료들을 얻는 데에 상당한 노력과 재력을 쏟았던 것 같기는 했다.
하지만 중요한 건 그녀가 결국 성공했다는 것이다. 얻기 어려운 재료들일 뿐이지, 불가능한 것은 아니었다.
‘돌아갈 수…… 있어.’
그런 확신이 마음속에 피어올랐다.
심장이 튀어나올 듯 거세게 쿵쿵거렸다.
그렇게 원했던, 집으로 돌아가는 길이 지금 눈앞에 펼쳐져 있었다. 안도감과 기쁨이 가슴 속에 번져 나갔다.
이십여 년 동안 익숙해질 대로 익숙해져 왔던 현대 문명의 이기. 온갖 편의 시설과 디지털 기기들. 방치된 지 오래되었을 내 SNS 계정. 보고 싶은 단짝 친구도, 힘들게 얻어 낸 대학 졸업장도 모두 돌아가야 할 내 세계에 있었다.
그러나, 어째서일까.
“…….”
당장 재료들을 찾으러 뛰쳐나가도 모자란 순간인데.
그럴수록 더 빨리 내 집으로 돌아갈 수 있을 텐데.
나는 지금, 못이라도 박힌 듯 제자리에 선 채 옴짝달싹하지 않았다.
“…….”
침묵을 지키며 나는 멍하니 스스로를 내려다보았다.
왜일까.
돌아갈 수 있게 되었다는 환희 속, 가슴을 가시처럼 찌르는 찝찝함이 있었다.
나는 머지않아 그 가시의 이름이 미련이라는 것을 알았다.
아교처럼 끈끈이 심장 한구석에 달라붙은 그것은, 떼어 내려 할수록 진득이 묻어나왔다.
“하…….”
나는 허탈히 웃었다.
고작 일 년이라고 생각했는데, 그새 이 세계에 정을 많이 붙인 모양이었다.
‘그래도, ……돌아가야지.’
물론 이 세계에서의 생활도 나름대로 즐거웠다.
이곳에서 쌓은 추억도 꽤 많고, 요즘은 어딜 나가기만 하면 나라를 구한 성녀라며 띄워 주는 것도 민망하긴 하지만 뿌듯한 것도 사실이었다.
‘……그리울 거야.’
우선, 아침마다 종달새 같은 목소리로 나를 깨워 주던 아네트가 그리울 것 같았다.
아침잠이 그렇게 많은 나인데도 아네트가 깨워 주면 금방 잠기운을 털고 일어날 수 있었다.
조안 경도 그리울 거다. 무뚝뚝한 그녀가 내게만 슬쩍 신뢰를 보일 때면, 사나운 짐승을 길들이기라도 한 듯 뿌듯함이 몰려왔다.
코델리아도 당연히 보고 싶겠지. 새침하기 그지없는 표정을 지으면서도 내 칭찬 한마디에 귀를 쫑긋거리는 게 보일 때면 너무 귀여워서 꼭 끌어안아 주고 싶었다.
루시안도 꽤 그리울 것 같았다. 바쁜 와중에도 비서처럼 살뜰히 나를 챙기는 루시안은 마치 내가 회장님이라도 된 것 같은 기분을 느끼게 했다.
솔직히 말하면 리젤로도 종종 생각날 것 같았다. 어디로 튈지 모르는 예측불허한 점이 날 두렵게 하곤 했지만, 그래도 기본적으로 그는 내게 잘 대해 준 편이었다. 리젤로와 함께 겪었던 에피소드들은 잊을 만하면 한 번씩 떠오를 것 같았다.
그리고, 아직 제대로 친해지지 못한 셀리나와, 엘리엇도.
둘이 사랑에 빠지는 순간을 목격하지 못한 게 두고두고 후회되겠지.
그 외에도 생각날 것 같은 사람이 많았다.
최고의 디저트 장인인 주방장도, 부끄러울 만큼 나를 띄워 주던 시녀들도, 잠깐 만났던 앨리샤까지도.
그리고, 또…….
“…….”
나는 꾹 입술을 깨물었다.
그의 이름을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가슴이 쿡, 가시에 찔린 듯이 아팠다.
나는 솔직히 인정했다.
지구로 돌아간 내가 이안 에스테반을 오래도록 추억하리라는 것을.
‘그야, 일 년짜리 계약 관계긴 하지만 남편이었고. 평범한 대학생이던 내게 처음으로 죽음의 공포를 안겨 준 사람이고, 함께 몇 번이나 사선을 넘기도 했고…….’
무엇보다 그는 내 첫 키스 상대이기도 했다.
어떻게 잊을 수 있을까. ‘처음’이라는 수식어가 이토록 많이 붙은 사람을.
‘그리워하게 될 것…… 같아.’
아무리 부정하고 싶어도 그건 이미 기정사실이었다.
활자로만 읽어 오던 사람이 살아 숨 쉬는 것을 두 눈으로 목격하고, 온 힘을 다해 운명을 바꿔놓기까지 했는데, 쉽게 잊을 수 있을 리가 없었다.
종종 떠올리겠지. 아니, 어쩌면 사실은 자주.
‘돌아가면 다시는, 볼 수 없어.’
아그네스 역시 대마물 전쟁을 승리로 이끌기까지 한 이 제국에 정을 붙이지 않았을 리 없었다.
하지만 지구로 떠나간 그녀는 다신 돌아오지 않았다. 돌아오고 싶어도 돌아오지 못했던 것이 맞을 것이다.
‘다시는 볼 수 없어.’
나는 그 생각을 되새김질했다.
지구로 돌아가면, 나는 아마 다시금 원작 소설을 읽겠지. 종이 위에 적혀 있는 이안의 이름을 읽으며 그를 추억하게 될지도 모른다.
하지만 거기 적혀 있는 건 이안이 아니었다. 내가 아는, 내가 직접 보아 온 이안 에스테반과 다른 존재였다. 그저 활자가 묘사한 종이 인간에 불과했다.
……살아 숨 쉬는 이안은, 두 번 다신 볼 수 없게 되는 것이다.
‘왜 이러지.’
나는 눈을 질끈 감았다.
왜 이렇게까지 가슴이 답답한 걸까. 숨 쉬기가 힘들 정도로.
집으로 돌아갈 수 있다는 것이, 내가 이십여 년간 살아온 세계로 돌아갈 수 있다는 것이 너무 기쁜데, 꼭 그만큼 허전함에 마음이 시렸다.
상식적으로 나는 지금 이래선 안 됐다.
그토록 찾아 헤매던 귀로를 발견했으니 더 환희로 날뛰어야 했다.
그런데도 지금 나는 모래 수렁 속에 빠진 듯 한 발자국도 움직일 수 없었다.
이 웃기지도 않은 모순 속에서, 나는 서서히 깨달을 수밖에 없었다.
‘아. 그렇구나.’
이제는 알아차릴 수밖에 없었다.
내가 이안을 좋아하고 있다는 것을.
“……하하.”
한숨 같은 웃음이 새어 나왔다.
어쩌면 진작 눈치채고 있었던 걸지도 몰랐다. 내 마음을. 알면서도 필사적으로 고개 돌린 채 외면해 왔던 것이다.
나는 내 가짜 남편을, 내 손으로 직접 구한 그를 사랑하게 되었다. 어느 새부턴가, 소리 소문도 없이.
“아…….”
나는 힘없이 바닥에 주저앉았다.
인정하고 나자, 터진 강둑처럼 마음들이 물밀 듯이 밀려들어 왔다.
애틋함. 사랑스러움. 그리움. 걱정. 기대와 실망. 설렘. 내가 그에게 그간 느껴 왔던 그 모든 감정이 한꺼번에 나를 덮쳤다.
도대체 어떻게 여태껏 외면해 오기만 했는지 알 수 없을 정도로 강렬한 감정들이었다.
“……이제 와서.”
나는 멍하니 다리 사이에 고개를 묻었다.
이제 와서, 모든 일이 끝나고 나서 이런 마음을 깨달아 봤자 달라지는 건 없었다.
그저 집으로 돌아가는 발걸음이 더 괴로워질 뿐.
“윽…….”
갑갑해져 오는 가슴을 나는 손으로 짓눌렀다.
이상한 일이었다. 감정을 인정해 버리자, 기다렸다는 듯 그것들이 수 배는 더 강력해져 버린 것 같았다.
이안을 다시는 보지 못한다고 생각하자 송곳으로 찌르듯 심장이 아려 왔다.
‘어떡하지.’
나는 멍하니 그런 생각을 되풀이했다.
바보같이 이제야 첫사랑을 깨닫는 바람에, 좀처럼 마음의 갈피를 잡을 수가 없었다.
무릎 사이에 고개를 묻은 채 나는 한동안 움직이지 않았다. 움직일 수 없었다는 표현이 맞았다.
“…….”
얼마를 그러고 있었을까.
나는 태엽 감긴 인형처럼 갑작스레 고개를 쳐들었다.
이대로 있을 수는 없었다. 머릿속이 짙은 안개가 낀 것처럼 답답하고 흐릿했다.
지금 내게는 신선한 바깥 공기가 절실히 필요했다.
“아, 성녀님. 벌써 가시는 건가요?”
성큼성큼 서가를 나서는 내게 사서가 놀란 눈으로 말을 건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