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34화 (134/161)

134화

그때를 생각하니 입안이 바짝바짝 말라 왔다.

뎅, 뎅, 뎅, 뎅.

그때 정각을 알리는 괘종시계가 여러 번 울었다. 나는 그 소리에 깜짝 놀라 시계를 돌아보았다. 시계가 오후 다섯 시를 가리키고 있었다.

‘벌써 시간이 이렇게 됐다고?’

황급히 창밖을 내다보자, 해가 뉘엿뉘엿 지평선 쪽으로 기울어 가고 있는 것이 보였다.

어느새 밤이 훌쩍 가까워진 것이다.

‘밤이 되면…….’

이안이 찾아올 거다.

나는 벌떡 자리에서 일어났다.

아무리 생각해도 이 상태로 그 사람을 다시 만날 순 없었다. 이렇게 창피한 기분으로는, 눈조차 제대로 못 마주칠 게 뻔했으니까.

‘바람을 쐬자.’

방 안에만 있다 보니 생각이 좀처럼 진전되지 않는 걸지도 몰랐다.

결심한 나는 침실을 나섰다. 정처 없이 복도를 걷자, 내 상태가 이상해 보였는지 지나다니며 마주치는 사람들이 나를 쳐다보며 수군거렸다.

“아이린 님이다.”

“이번에 단장님과 함께 폐황제를 끝장내셨다지?”

“성녀님의 호령 한 번에 폐황제가 벌벌 떨면서 무릎을 꿇었다잖아.”

“저 여린 몸에 숨겨진 기백이 엄청나신 거지.”

‘…….’

행인들의 속닥거림을 들으며 나는 말을 잃었다.

아무래도 그날, 지상에서 일어난 일들을 지켜봤던 천공섬 위 사람들이 이후 대단히 과장된 소문을 퍼뜨린 모양이었다.

어느새 사람들에게 나는 기백으로 황제를 제압하고, 눈빛으로 발록을 꼼짝 못 하게 만든 희대의 성녀가 되어 있었다.

‘그래. 좋을 대로 생각해라.’

예전이었다면 부담스러워 몸이 절로 비비 꼬였을 테지만, 이젠 아무래도 상관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차피 나는 이제 곧, 이 수도를 떠나게 될 테니까.

‘……그래. 그래야지.’

나는 계약을 충실히 이행했다. 이제는 그 보상을 받을 시간이었다. 오늘 이안과는 그에 대한 이야기를 하게 되겠지.

그리고 받아 낸 재화를 사용해 집으로 돌아가는 방법을 알아봐야 했다.

어떻게 하면 돌아갈 수 있을지, 아직 실마리조차 찾지 못했지만 나는 어딘가 방법이 분명 있으리라고 굳게 믿었다. 입구가 있었는데 출구라고 없을 리가 없었다.

그런 생각들을 하며 멍하니 걷던 나는, 어느새 내가 도서관 앞에 도달해 있음을 깨달았다.

“아이린 님 아니세요?”

입구 앞 책상을 지키고 있던 사서가 반가운 얼굴로 나를 맞이했다.

“어서 들어오세요. 제한 서가를 열람하려고 오신 거지요?”

“네?”

나는 흠칫 놀라 되물었다.

설마 내가 전에 사서 몰래 제한 서가에 들어갔던 걸 알고 있는 걸까?

사서가 활짝 웃으며 말했다.

“단장님께서 얼마 전에 아이린 님의 제한 서가 출입을 허가하셨잖아요.”

“이안…… 님이요?”

“네. 혹시 모르셨나요?”

내 반응이 의외인 듯 사서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이안이?

나는 멍한 눈으로 사서를 바라보았다.

‘……눈치챘던 거구나.’

그날, 이안을 찾아가 내 언령에 대해 알고 있지 않았느냐고 따졌던 날.

이안은 내가 언령이라는 능력을 어디서 배웠던 건지 눈치챘던 것이다.

나는 사서를 따라 제한 서가 안으로 입장했다.

지난번에는 리젤로와 함께 도둑들처럼 숨어들었던 곳을 당당히 걸어 들어가자니 묘한 기분이 들었다.

“마음껏 열람하시면 됩니다, 성녀님. 아이린 님께서는 단장님께서 특별 배부하신, 모든 구역 열람 허가증을 지니고 계시니까요.”

사서가 흐뭇한 표정으로 말했다.

“그럼, 저는 집중하실 수 있도록 서가를 나가 있겠습니다. 필요하신 것이 있다면 언제든 불러 주세요!”

“네, 감사합니다.”

사서가 떠나가는 발소리를 들으며 나는 천천히 서가를 둘러보았다.

숨어 들어왔던 지난번과 달리, 이번엔 여유롭게 모든 책을 둘러볼 수 있었다.

자유가 주어지자 오히려 어디부터 뒤져야 할지 감이 오지 않았다.

‘괜찮아. 시간은 많으니까.’

정확히 말하자면 이안과 약속한 밤까지 그리 많은 시간이 남아 있진 않았지만, 나는 의식적으로 그쪽은 생각하지 않기로 했다. 이안이라는 이름만 떠올려도 지금은 심장이 덜컥거려서 다른 생각을 하기가 힘들었으니까.

천천히 안을 둘러보던 나는, 성녀들에 대해 집중적으로 다룬 서가가 존재한다는 것을 깨달았다.

서가를 훑어보던 나는 문득 시선을 멈췄다.

『성녀 아그네스 열전』

이미 여러 번 보아 익숙해진 이름이 다시금 시야에 걸렸다.

아그네스. 나와 같은 언령을 지녔던 성녀.

나는 홀린 듯 책을 뽑아 들었다. 책은 아그네스의 일생을 아주 세세히 기록한 탓에 몹시 두꺼웠다.

“풋.”

책을 훑던 나는 어느 대목에서 작게 웃음을 터뜨렸다. 작성자가 어찌나 아그네스에 대해 자세히 관찰했던지, 아그네스가 감시당하는 것 같아 성가시다며 필자에게 짜증을 냈던 기록까지 그대로 적혀 있었다.

‘이때는 성녀들을 따라다니며 일거수일투족을 기록하는 전통이 있었던 모양이네.’

무슨 조선왕조실록도 아니고.

저 시대의 성녀들은 참 피곤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예전에 비하면 오늘날의 교단은 자유왕국이 따로 없었다.

안타깝게도 옛날 옛적의 성녀로 태어났던 아그네스는, 그런 자신의 처지에 몹시 불평불만이 많았던 것 같았다.

「성녀 아그네스께서는 제국의 뒤떨어진 목욕 문화에 대해 종종 불만을 표하셨다. 수도관이라는 것을 통해 따뜻한 물이 자동으로 공급되는 장치에 대해 자주 말씀하셨는데, 몹시 혁신적인 발상이라 학계에 파란을 불러왔-」

‘응?’

거기까지 읽은 나는 순간 눈을 의심했다.

수도관? 목욕?

나는 책을 뒤집어 발행연도를 확인했다. 초판 인쇄 연도는 지금으로부터 까마득히 오래전이었다.

‘이때 수도관 같은 게 있었나?’

나는 루시안이 가져다준 책에서 읽었던 제국의 역사를 더듬어 보았다.

당연히 대부분은 기억나지 않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저 때 수도관을 이용한 목욕이라는 개념은 없었을 것 같았다.

아니, 추측할 것 없이 당장 이 책만 해도 아그네스의 혁신적인 발상에 놀라워하고 있었다.

‘……잠깐.’

나는 황급히 책을 뒤적거렸다.

또 어느 대목에서 시선이 멎었다.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취침하신 뒤, 갑작스러운 두통과 혼란을 호소하셨다. 자신이 아그네스가 아닌 다른 사람이며, 실존해서는 안 되는 세계에 떨어졌다는 말과 함께 심각한 정신 착란 증세를 앓으셨는데-』

나는 하마터면 책을 떨어뜨릴 뻔했다.

그래. 정신 착란 증세. 리젤로와 이 서가에 들렀을 때에도 같은 내용을 읽은 적이 있었다.

그때는 그저 기묘한 내용이라고만 생각했었는데, 자세한 내막을 더 읽어 보니 머리가 멍할 만큼 충격적이었다.

나는 본능적으로 깨달을 수 있었다.

‘그랬구나. 그런 거였어. 아그네스 역시…….’

나와 마찬가지로 책 속 세상에 빙의했었다는 것을.

그러고 보면 눈치채지 못한 게 이상할 정도였다.

아그네스의 권능은 예지였다. 그녀는 대마물 전쟁을 승리로 이끈 전설적인 예지의 성녀로 불렸다.

“예지…… 하하하.”

허탈한 웃음이 흘러나왔다.

그래. 그랬겠지. 그녀 역시 책 속에서 이 세계의 미래를 읽은 적이 있었을 테니까.

나와 같은 현상을 겪은 사람이 나뿐만이 아니라는 생각에, 가슴이 미친 듯이 뛰기 시작했다.

‘언령 역시 우리 둘 다 가지고 있는 능력이었어.’

그렇다면 언령은 빙의당한 사람들에게 공통적으로 주어지는 능력이었던 걸까?

알 수 없었다. 나는 좀 더 많은 것을 파헤치기 위해 홀린 듯 책장을 넘기고 또 넘겼다.

어쩌면 이 책 속에, 지구로 돌아가는 방법이 적혀 있을지도 몰랐다.

아그네스가 돌아가는 방법을 알아내는 데에 성공했다면, 말이지만.

‘아, 그래.’

문득 머릿속을 번득인 생각에 나는 책장을 맨 뒤로 넘겼다.

아그네스가 지구로 돌아가는 것에 성공했는지 실패했는지는, 책의 끝 장을 보면 알 수 있을 터였다. 거기에 그녀의 마지막 모습이 적혀 있을 테니까.

책을 휙 덮어 가장 마지막 장을 펼친 나는, 잠시 뒤 눈을 커다랗게 떴다.

* * *

“단장님.”

루시안이 조심스레 말을 건넸다.

“제4 소대가 지금 페일린에서 돌아왔습니다. 소대장 모나 경이 보고를 위해 찾아왔는데, 어떻게 할까요?”

이안은 한 박자 늦게 그 이야기를 귀에 담았다.

내려다보고 있던 종이에서 시선을 든 이안이 루시안을 바라보았다.

“……그래. 들어오라 해라.”

허락이 떨어지자 제4 소대장 모나가 집무실 안으로 걸어 들어왔다. 전장에서 바로 돌아온 듯 갑옷도 벗지 않은 상태였다.

“단장님을 뵙습니다.”

경례한 모나가 보고를 읊었다.

“페일린의 마물 잔당은 모두 남김없이 처리되었습니다.”

“인명 피해는?”

“부상자가 셋, 사망자는 없습니다. 치명적인 상처를 입은 부상자 역시 없습니다.”

“그래.”

이안이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수고했다.”

모나의 얼굴 위로 숨기지 못한 기쁨이 드러났다. 마물들을 상대하느라 며칠 동안 개처럼 굴렀지만, 이 치하의 말 한마디에 그간의 피로가 씻겨 나가는 기분이었다.

모나가 떠나고 난 뒤 루시안이 입을 열었다.

“제국 곳곳에 남은 마물 잔당들도 이제 얼추 정리되어 가는군요.”

라시드는 죽었지만, 그가 남기고 간 찌꺼기들은 아직 세상에 여럿 존재했다.

라시드가 나인과 손을 잡고 진행한 마물 소환 실험의 부산물들이 대륙 곳곳을 돌아다니며 인명을 해치고 있었다. 그걸 처리하는 것은 물론 성기사단의 책임이었다.

그 때문에 한동안 성기사단 전체에 비상이 걸려 있었지만, 다행히 이제는 얼추 해결되어 가고 있는 상태였다.

그렇게 생각하던 루시안은, 이안이 또 아까 읽던 그 서류를 내려다보고 있는 것을 발견했다.

‘왜 저렇게 오랫동안 보시는 거지.’

이안은 읽는 속도가 빠른 편이었다. 그에 대해서는 루시안 역시 잘 알고 있었다.

그런 그가 한 문서를 저렇게 오래 쳐다보고 있다는 것은, 그만큼 서류에서 중요한 오류가 발견되었다는 이야기였다.

지레 찔린 루시안이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그런데 단장님, 보고서에 뭔가 잘못된 점이라도 있습니까?”

한참 동안 서류를 내려다보고 있던 이안이 그제야 루시안을 돌아보았다. 이상한 소리를 들었다는 듯 미간을 찌푸린 채.

“뭐라고?”

“보고 계시는 보고서에 오류가 있다면…….”

거기까지 말한 루시안은 입을 멈췄다.

이안이 내려놓은 서류의 내용이 언뜻 눈에 들어왔기 때문이었다.

‘……잠깐. 저건 보고서가 아니잖아?’

루시안의 머리가 혼란으로 가득 찼다.

언뜻 보였을 뿐이지만, 확실했다. 저 서류는 약 일 년 전 이안과 아이린이 함께 작성했던 그 계약서였다.

‘왜 갑자기 저걸 읽고 계시지……?’

그것도 저렇게나 오랫동안.

몹시 당혹스러웠으나, 보좌관 생활을 길게 해 온 루시안의 직감이 말했다. 여기에 대해선 캐묻지 않는 편이 좋을 것 같다고.

뎅, 뎅, 뎅.

그때 괘종시계가 묵직하게 울며 시간을 알려 왔다.

시계를 돌아본 루시안은 어느새 시침이 밤 아홉 시를 가리키고 있는 것을 보고 깜짝 놀랐다.

‘언제 시간이 이렇게.’

“이만 오늘 업무는 접어야겠군.”

“아, 넵.”

이안이 보아야 할 업무가 아직 산더미처럼 쌓여 있다는 것을 알지만, 루시안은 차마 이안을 말릴 수 없었다. 어쩐지 말려 보았자 귓등으로도 듣지 않으리라는 직감이 들었다.

“침실로 가십니까?”

“그래.”

“그러시군요. 아이린 님께서는 아직 귀가하지 않으신 듯합니다.”

“……뭐?”

이안이 걸음을 멈추고 루시안을 돌아보았다.

제 상관이 드물게 되묻는 모습에, 루시안은 착실히 다시 한번 대답했다.

“오후에 외출하셨던 아이린 님께서, 아직 성당에 돌아오지 않으셨다고 말씀드렸습니다.”

지그시 미간을 좁힌 이안이 시계를 바라보았다. 어느덧 밤 아홉 시를 가리키고 있는 시계를.

“……아직도?”

이안이 나지막이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그 목소리에는 짙은 혼란이 배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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