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3화
“…….”
나는 입술을 한 번 달싹였다가, 아무런 말도 하지 못하고 다시 다물었다.
이상할 정도로 심장이 쿵쿵거려서 이안과 눈을 마주치기 힘들었다.
나는 주먹을 꾹꾹 쥐며 스스로를 타박했다.
내가 왜 이러는 걸까.
이안은 그저 내가 건넨 너스레 소리에 맞장구를 치고 있는 것뿐인데.
‘얼굴 때문이야.’
쓸데없이 완벽하게 생긴 탓에, 저 얼굴로는 무슨 말을 해도 분위기 있고 의미심장한 대사로 들리곤 했다.
내가 지나치게 의식해 버린 탓일까. 침묵이 어색해서 손가락이 곱아들었다. 나는 이안에게서 시선을 뗀 채 간신히 입을 열었다.
“그럼요. 당연하죠. 황족이 되기 싫어하는 사람도 있을까요? 하긴, 이안 님처럼 날 때부터 황족이었던 분은 이해하지 못할 수도 있겠네요.”
말하다 말고 나는 눈을 꾹 감았다.
왜 이렇게 황족 얘기를 많이 하는 거야. 권력에 미친 사람 같잖아.
속으로 낭패감을 느끼면서도 나는 주절거림을 멈추지 않았다. 멈췄다간 쿵쿵거리는 심장 소리나 떨려오는 손끝을 들킬 것 같았다.
“대관식은 언제쯤 열릴 것 같으세요? 제가 잠깐이나마 황관을 써 보려면 계약이 끝나기 전에는-”
거기까지 말한 나는 나도 모르게 입술을 멈췄다.
계약이 끝난다는 말을, 길지 않은 대화 동안 벌써 두 번이나 했다.
내가 입을 다물어 버린 탓에 우리 사이에 짧은 침묵이 오갔다.
잠시 뒤 먼저 입을 연 것은 이안이었다.
“……몸은.”
몸?
예상치 못한 단어에 나는 이안을 올려다보았다.
“좀 괜찮습니까?”
갑작스레 돌변한 화제에 나는 머뭇거렸다.
이안이 그런 나를 빤히 내려다보았다. 시선이 의식되어 나는 괜스레 눈을 내리깔았다.
“…많이 나아지긴 했어요. 이 정도면 괜찮아요. 자리에서 일어날 때마다 어지러운 건 여전하지만-”
나는 말을 끝맺지 못했다.
이안의 손가락이 내 턱을 부드럽게 들어 올렸으니까.
강제로 시선을 들린 나는 멍하니 이안을 올려다보았다. 그리고 잠시 뒤, 반사적으로 눈을 감고 말았다.
‘아.’
이안의 체향이 밀물처럼 나를 덮쳐 왔다.
잠시 뒤, 나는 입술 위로 닿아 오는 체온이 흠칫 몸을 굳혔다.
말캉한 것이 입술 사이를 파고 들어왔다. 몸이 파르르 떨려 왔다. 이제는 익숙해질 때도 된 것 같은데, 타인의 감촉은 여전히 생경하기 그지없었다.
머릿속을 온통 휘저어 버린 입맞춤이 끝나고, 이안의 입술이 내게서 떨어졌다. 나는 힘이 풀린 다리를 억지로 고정하며 애써 초점을 맞춰 그를 올려다보았다.
나를 마주 보며 이안이 나지막이 속삭였다.
“빨리 나으셔야 합니다.”
낮게 닿아 오는 목소리에 심장이 내려앉으면서도, 어쩐지 분한 기분이 들었다.
나는 고작 입맞춤 하나에 제대로 설 수 없을 만큼 정신을 빼앗겼는데, 저 사람은 너무 아무렇지도 않아 보여서.
숨이 흐트러지고 뺨에 붉게 열이 오른 나와 달리 이안의 모습은 평소와 다름없었다. 그게 이상할 정도로 마음에 들지 않았다.
동시에 유치한 복수심이 들었다. 이안 역시 나처럼 평정심을 잃게 만들고 싶었다.
그 기묘한 충동에 나는 나도 모르게 입을 열었다.
“저도 빨리 낫고 싶은데, 마음처럼 잘 안 되는걸요.”
예상치 못한 대답이었는지 이안의 눈이 살짝 커졌다.
나는 보란 듯 어깨를 으쓱였다.
“정말 생각보다 차도가 없네요. 매일 밤 이안 님께서 그렇게 신경 써 주시는데도 말이에요.”
“……알고 있었습니까?”
“어떻게 몰라요. 외간 남자 손이 그렇게 매일 밤 이마에 닿는데.”
“…….”
이안은 다소 당황한 듯 보였다. 내가 알고 있으리라고 정말 생각하지 못한 모양이었다.
그 얼굴에 피부 위로 약한 전율이 내달렸다. 당혹스러워하는 모습을 더 보고 싶었다. 꼭 나만큼, 아니, 나보다 더 이안 역시 흐트러뜨리고 싶었다. 내 마음속 어디에 이렇게 유치한 욕심이 숨어 있었던 건지 알 수 없었다.
“벌써 일주일째인데도 왜 차도가 안 보이는 걸까요. 이안 님의 성력 정도면 웬만한 명약도 뺨치는 수준일 텐데. 어쩌면-”
그만.
나는 본능적으로 생각했다.
이젠 그만 말해야 한다.
어린아이같이 한심한 충동은 이제 멈춰야 할 때였다. 나는 머릿속으로 힘껏 스스로에게 제동을 걸었다.
하지만 입술은 이미 제어를 벗어난 뒤였다.
“치료가 부족한 걸지도요. 하지만 이안 님은 지금도 한창 바쁘신 와중에 밤마다 제게 시간을 할애해 주고 계시는데, 여기서 더 요구하기는 죄송하고…… 아, 그래요. 다른 신관분들의 도움도 받아 보는 건 어떨까요?”
맙소사.
나는 스스로가 뱉은 말에 경악했다.
성력을 전해 받기 가장 쉬운 방법이 스킨십이라는 건 누구나 아는 이야기였다. 내 말은 까딱하면 난잡하게 들릴 소지가 다분했다.
‘무슨 소릴 한 거야, 이서연?’
내 입에서 튀어나온 대담하기 그지없는 발언에 나는 놀라 입술을 더듬었다.
이안을 당황시키고 싶긴 했지만 이렇게까지 이상한 소릴 할 생각은 없었다.
맞은편에선 아무런 대꾸도 들려오지 않았다.
내가 하도 괴상한 소리를 해서 상대하지 않기로 한 걸까. 그럴 만도 했기에 나는 슬며시 고개를 옆으로 돌렸다. 이 상황으로부터 도피하고 싶었다.
괜스레 먼 창문 너머를 바라보려던 순간, 커다란 손이 내 턱을 붙잡았다.
“죄송합니다. 부인.”
“……네?”
“제 힘이 미천하여 부인께 충분한 도움이 되지 못했군요.”
“아니, 제 말은 그런 게 아니라-”
“능력 없는 남편이라 송구할 따름입니다. 그런데 사실, 나는 부인께서 그토록 부족함을 느끼고 계신 줄은 몰랐습니다.”
그림자 탓일까.
마주한 이안의 벽안이 평소보다 더 짙게 가라앉아 있었다. 깊은 심해 같은 눈동자에 숨이 막혔다.
“그래도 남편 된 입장으로서, 부인이 밖에 신세 지도록 할 순 없을 것 같은데.”
“…….”
“이제라도 만회할 기회를 주시겠습니까?”
뭔가가 잘못됐다. 그것도 단단히.
지나치게 가까워진 이안을 올려다보며 나는 입술을 더듬거렸다.
“만, 만회라니…… 아니에요. 이안 님. 제가 실언을 했어요.”
“기회도 안 주시려는 겁니까?”
더 가까이 다가온 이안이 속삭이듯 물었다. 귓가를 간질거리는 감각에 옅게 소름이 끼쳤다.
나는 허둥지둥 대답했다.
“아뇨. 그게 아니라-”
“아니군요.”
이안이 내 얘길 덥석 끊더니, 제멋대로 말을 이었다.
“허락 감사합니다.”
아니. 허락한 게 아닌데.
그러나 나는 항의할 수 없었다. 그렇게 말한 이안이 곧바로 입술을 겹쳐 왔으니까.
이전과 달리 그의 혀가 다소 거칠게 내 치아를 가르고 들어왔다. 벅찰 만큼 밀고 들어오는 타인의 숨결에 숨이 막혀 왔다. 밀어붙이는 듯한 입맞춤에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이안의 오른손이 내 어깨선부터 등까지를 쓸어내리듯 감싸 안았다. 갈급한 입맞춤과 달리 그 손길은 정중하고 조심스러웠다. 허락을 구하듯 손끝 한 번 한 번이 머뭇거렸다.
옷감 너머로 느껴지는 손바닥이 델 듯 뜨거워서, 정신이 자꾸만 몽롱해졌다. 전해져 오는 이 따스한 온기가 성력인지 체온인지 알 수 없었다. 어느 쪽이든 확실한 것은, 그 온기가 나를 몸속까지 따스하게 적시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어느 순간 벽에 등이 닿았다. 몰아붙여지고 있는 자세였지만 무섭지는 않았다. 그저 조금 더 밀착되고 싶은 기분만이 들었다.
내 피부에 와 닿는 따뜻한 체온이 조금 더 나를 감싸 주길 바랐다. 조금 더 빈틈없이, 꼭 맞물리도록.
어느 순간부터 나는 생각하는 방법을 잊어버렸다. 힘 풀린 몸이 이안의 품속으로 쓰러졌다.
* * *
‘……미친놈.’
퍽, 퍽.
나는 수십 번째로 벽에 머리를 부딪쳤다.
그래도 머릿속을 오가는 환상이 좀처럼 가시지 않았다.
‘흐, 이안…….’
‘아이린.’
더운 숨으로 가득하던 서로의 목소리, 역시.
“으아악!”
나는 비명을 지르며 다시금 머리를 벽에 박았다.
까딱하면 선을 넘을 뻔했다. 아주 제대로 밟아 버릴 뻔했다.
도무지 믿을 수가 없었다. 내가 이안과 가장 부부다운 짓을…… 거의 저질러 버릴 뻔했다는 사실이.
‘무슨 생각이었니? 이서연.’
그러게.
도대체 무슨 생각이었을까?
나는 마구 머리를 벽에 비비며 자문자답을 반복했다.
성력? 성력을 나눠?
기가 차지도 않았다.
성력을 전하는 가장 쉬운 방법이 스킨십이긴 하지만, 그렇다고 그렇게까지 진한 접촉이 필요한 것은 추호도 아니었다. 엘룬교는 그렇게 난잡한 종교가 절대 아니었다.
만약 루시안의 다급한 노크 소리가 없었다면, 일이 어디까지 흘러갔을지 나는 감히 상상할 수 없었다.
눈을 질끈 감자, 거의 허벅지까지 말려 올라갔던 내 드레스 자락과 내 종아리를 감싸던 이안의 손길이 떠올랐다.
쿵, 쿵.
심장이 곧 터져 버릴 듯 거세게 뛰었다.
가장 큰 문제는 이거였다.
그 모든 행위를 저지르는 동안, 내 기분이 지나치게 좋았다는 것.
나는 전혀 저항할 생각을 하지 않았다. 아니. 저항은커녕, 어느 순간부터는 이안의 손등을 오히려 내가 더 끌어당기고 있었던 것도 같았다.
“어떻게 해…….”
나는 주르륵, 벽에 기댄 채 바닥으로 미끄러졌다.
맨정신으로 다시 이안을 볼 생각을 하니 머리끝까지 아찔한 기분이 들었다.
한참 동안 키스하던 우리는 루시안의 노크 소리에 간신히 정신을 차렸었다.
어지간히 급한 사안이었는지, 대답이 없자 루시안은 이안의 이름까지 외치며 노크했다.
그걸 들은 이안은 낮게 한숨을 내쉬고는, 나를 바라보았다.
‘오늘 밤.’
귓가를 울리는 목소리에 나는 흠칫 몸을 굳혔다.
이안이 계속해서 속삭였다.
‘밤에 다시 올 테니, 꼭 기다려 주십시오.’
오늘 밤 잡혀 있던 약속을 상기시킨 이안은, 이어지는 루시안의 간절한 노크 소리에도 불구하고 내가 대답할 때까지 날 놔주지 않았다.
결국 나는 불쌍한 루시안 때문에라도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그제야 내게서 떨어진 이안은 내 흐트러진 드레스 자락을 바로잡아 주었다.
옷자락을 매만지는 그의 손끝이 지나치게 굳어 있었다. 미약한 떨림 역시 옷감 너머로 느껴졌다.
그 탓에 나는 이안이 나만큼, 아니. 나보다 더 여유를 잃어버린 상태라는 것을 깨닫고 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