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32화 (132/161)

132화

“아이린.”

양손으로 내 허리를 부여잡은 이안이 나를 내려다보았다.

“무슨 일입니까.”

내가 평소와 다르다는 걸 귀신같이 눈치챈 모양이었다.

……역시 양반은 못 되지.

나는 힘없는 미소를 지었다. 이상하게도, 이안 앞에서는 가면 갈수록 속마음을 숨기기 힘들어진다. 보통은 그 반대여야 할 텐데.

나는 천천히 입술을 열었다. 지금 할 수 있는 대답은 하나밖에 없었다.

“아무것도 아니에요. 잠깐 어지러워서.”

머리는 여러 생각으로 어지럽지만, 이걸 곧이곧대로 말해봐야 정신 착란 환자 취급이나 받을 게 뻔했다.

눈 떠 보니 책 속 엑스트라의 몸속에 들어와 있었다니. 아무도 믿어 주지 않을 게 틀림없지.

이안이 나를 가만히 내려다보더니 말했다.

“아무것도 아닌 게 아닌 모양인데.”

나는 시선을 내리깔았다.

이안의 직감이 예민하다는 건 잘 알고 있었지만, 오늘은 그냥 넘어가 주길 바랐다.

내가 대답하지 않자, 이안이 내 뒤로 시선을 던지며 말했다.

“저 안에 있는 자들 때문입니까?”

“…….”

나인의 간부들을 말하는 거겠지.

침묵하자 이안은 긍정으로 알아들은 듯했다. 내 허리를 잡은 그의 손에 힘이 들어갔다.

“이젠 당신을 해칠 수 없는 자들입니다.”

“…….”

“그대가 원한다면 죽는 날까지 저 밖으로 한 발자국도 떼지 못할 자들이니, 두려워할 필요 없습니다. 이제는.”

나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이안이 시를 읊듯 부드럽고 나지막한 목소리로 이어 말했다.

“침실까지 데려다드릴 테니, 쉬고 계십시오.”

“……또요? 요즘은 온종일 쉬고만 있는데.”

“방금도 어지럽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그대는 지금 절대 안정이 필요합니다.”

싫다고 했다간 혼이라도 날 분위기였다.

나는 잠자코 이안을 따라 내 방으로 향했다.

내가 방 안에 들어간 것을 확인한 이안이, 함께 들어오는 대신 문밖에서 말했다.

“금방 돌아오겠습니다. 잠시만 기다리세요.”

나는 이번에도 말없이 고개를 끄덕이기만 했다.

날 대하는 이안의 태도가 낯설었다. 마치 감기에 걸린 일곱 살 아이를 대하는 것 같아서.

다른 사람도 아니고 이안이다 보니 더 기분이 어색하고 미묘했다. 괜히 손가락이 꿈질거려질 만큼.

“그럼, 조금 뒤에 뵙겠습니다.”

나지막이 말한 이안이 나를 방 안에 남겨 두고 문을 닫았다.

“아이린 님! 괜찮으세요?”

아네트가 얼른 다가와 내 안색을 살폈다.

“어딜 다녀오신 건진 모르겠지만, 어서 이리로 오세요. 여기 편한 의자에 앉아 계시면 제가 달콤한 것들을 가져다드릴게요.”

호들갑처럼 느껴질 정도로 아네트가 나를 극진히 챙겼다.

그렇게 내 안색이 별로인가? 나는 스스로의 뺨을 문질러 보았다.

아직 머릿속이 멍한 것은 사실이었다.

여태 내겐 이안이나 나인, 황제 등 당면한 문제들이 많았다. 당장 내 목숨이 달린 급박한 문제들이었기에 다른 생각 할 여유 없이 그것들부터 처리해야 했다.

하지만 마침내 황제를 처리한 지금, 그리고 나름대로 이안의 신뢰를 얻어 낸 지금. 지금부터는 이야기가 달랐다.

‘……앞으론 뭘 해야 하지?’

근 일 년간, 숨 가쁘도록 쫓기듯 달려오기만 하다 갑자기 경주로를 벗어난 기분이었다.

내 다음 목적지는…… 그래. 집으로 돌아가는 것이겠지.

월세 계약한 지 얼마 안 된 자취방의 관리비가 걱정됐다. 졸업 처리가 제대로 되었을지 결과도 궁금했고, 소연이도 보고 싶었다.

“아이린 님, 여기 캐러멜 태피를 가져왔어요.”

아네트의 목소리가 상념을 끊었다.

그녀가 가져온 쟁반 위에는 노릇노릇한 갈색 색감의 캐러멜 태피가 수북이 쌓여 있었다.

“고민이 있으신 것 같아서요. 아이린 님은 그럴 때 단 걸 엄청 드시잖아요?”

쟁반을 내밀며 아네트가 수줍게 말했다.

지구로 돌아가면, 이 아이가 보고 싶을 거다.

말은 안 하지만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날 지켜보고 있는 조안 경도, 다른 시녀들도. 이제 막 친해진 셀리나도, 루시안 씨도, 아직 더 친해져야 하는 엘리엇도 전부 보고 싶겠지.

보고 싶을 것 같은 사람이 그 외에도 많았다. 매일 내가 좋아하는 디저트를 만들어 주는 주방장이나, 코델리아, 어쩌면 리젤로도, ……그리고, 또.

그렇게 생각한 순간, 정중한 노크 소리가 울렸다.

“아이린.”

나는 화들짝 놀라 문을 돌아보았다.

열린 문 너머로부터 이안이 발을 들였다. 자리에서 일어난 나는 그를 맞이하러 가다가, 문득 멈칫했다.

‘……냄새.’

옅지만, 분명 이안에게서 묘한 냄새가 났다.

마치 피비린내 같은.

나는 이안의 몸을 내려다보았다. 지하 벽면에 묻어 있던 검댕이 그의 소매를 희미하게 물들이고 있었다.

혹시, 지하에 다녀온 걸까.

그런 내 의문을 덮듯 이안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오랜만입니다. 그나저나.”

마치 이웃끼리 인사라도 나누듯 여상한 말투였다.

그러나 나는 우리가 그리 오랜만에 만나는 것이 아님을 알고 있었다.

어젯밤에도 그가 내 머리맡에서 성력을 나눠 주었다는 사실을 알았으니까.

어젯밤뿐만 아니라, 매일 밤 그는 침실에 들러 내 이마 위에 손을 올려놓은 채 시간을 보냈다. 꽤나 오랫동안.

민망해서 자는 척하며 한 번도 눈을 뜨지 않았지만, 사실은 매일 밤 그의 기척을 눈치채고 있었다.

‘자는 척을 꽤 잘한 모양이지, 내가.’

매일 밤 들러 놓고서도 뻔뻔스레 오랜만이라고 말하는 이안이 황당했지만, 나는 대충 그의 말에 맞춰 주기로 했다.

“네. 그날 이후 통 안 들르셔서 좀 서운했어요.”

“…….”

이안이 당황한 눈을 했다.

이 와중에도 그게 조금 우스워서 나는 한술을 더 떴다.

“저는 쓸모를 다했으니 이제 안중에도 없으신 건가, 했죠. 헌신하면 헌신짝 된다는 게 이런 뜻인가, 싶기도 했고요.”

“……헌신짝?”

이안의 목소리에 조금 더 당혹이 섞였다.

분위기가 묘해지자 시녀들이 황급히 방을 떠났다.

문이 닫히는 소리를 들으며 나는 새침히 말을 이었다.

“뭐, 이해는 해요. 이제 아주 아주 바쁘신 몸이 되셨으니까요. 부인도 안 보일 정도로 정신없으신 것, 이해해요.”

“아이린.”

이안이 다급히 내 말을 끊었다.

“……많이 서운했습니까?”

그렇게 말하는 이안은 생전 처음 보는 표정을 하고 있었다.

곤혹스러워 보이는, 당황에 찬 얼굴.

‘……뭐야. 그냥 놀려 본 거였는데.’

저렇게 진지한 표정을 지으니까, 마치 내가 정말 서운해서 투정 부린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하지만 나는 그냥 이안의 반응이 웃겨서 과장한 것뿐이지, 진지하게 섭섭해한 적은 없었다.

비록 하필 내가 잠들고 난 밤에만 들러 성력만을 전해 주고 가는 이유가 궁금하긴 했지만, 그럴 거면 잠깐 깨워 대화라도 할 수 있는 거 아닌가 싶기는 했지만. 나와 얼굴 맞대는 게 싫은 건가, 잠깐 고민한 적도 있기는 했지만.

아무튼 섭섭 같은 유치한 감정을 느낀 적은 한 번도 없었다. 정말이었다.

“농담이었어요. 농담과 진담도 구분 못 하시나요, 단장님은.”

어깨를 으쓱이며 말한 내가 덧붙였다.

“아, 이제는 단장님이라고 하면 안 되는 걸까요.”

“…….”

이안이 대답 없이 나를 가만히 내려다보았다.

나는 그를 향해 물었다.

“황제가 되실 거죠?”

몇 초간의 침묵 뒤, 이안이 천천히 입을 열었다.

“나 말고는 책임질 사람이 없으니까.”

맞는 말이었다. 이안 외에는 이 나라를 책임질 사람이 존재하지 않았다.

황제가 되고 나면, 이안은 더 바빠지겠지. 성기사단장에 불과했던 여태까지도 바빴으니, 한 제국을 책임지는 위치에 오르면 이전과는 비교도 하기 힘들 만큼 바빠질 터였다.

어쩐지 입맛이 씁쓸해져 왔다.

‘캐러멜 태피가 너무 탔나 봐.’

태피를 비롯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디저트를 기가 막히게 만드는 주방장이 오늘따라 실수한 모양이었다.

나는 일부러 과장되게 어깨를 으쓱였다.

“그렇군요. 그러면, 저는 황후가 되는 건가요? 아직 저희 계약은 끝나지 않았으니까.”

가볍게 던진 농담이었는데, 대답이 돌아오지 않았다.

나는 피하고 있던 시선을 들어 이안을 올려다보았다가, 살짝 숨을 멈췄다.

심해처럼 깊은 푸른색 눈동자가 나를 가만히 내려다보고 있었다.

왜인지 숨이 막혀 왔다. 나는 괜스러운 기분을 떨쳐 내기 위해, 일부러 더 입을 열었다.

“혹시 계약 부인이라고 황후까지는 못 넘보게 하시는 건 아니죠? 황후라니, 어감부터 엄청나긴 하네요. 계약할 때만 해도 설마 황관을 쓰게 될 줄은 몰랐는데! 이래서 사람은 줄을 잘 타야 한다는 건가 봐요.”

“아이린.”

줄줄이 이어지는 내 헛소리를 나지막한 목소리가 끊었다.

나는 입술을 벌리다 말고 이안을 올려다보았다. 이안이 내 이름을 부르면, 어쩐지 무시할 수가 없었다. 쉴 새 없이 주절거리던 이런 순간에도.

이안이 그런 나를 내려다보며 속삭이듯 물었다.

“황후가 되고 싶습니까?”

내 귀가 잘못된 걸까.

그의 목소리가 악마의 유혹처럼 부드러운, 아까 먹었던 캐러멜 태피보다도 달콤하게 들려왔다.

“…….”

나는 완전히 말을 잃어버렸다. 바로 조금 전까지 쉬지 않고 떠들어 대던 사람이라고는 믿을 수 없게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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