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1화
“어떻게, 저 사람이, 저기에.”
동요를 티 내고 싶지 않았다.
저 남자 앞에서는 더더욱.
생전 처음 보는 얼굴이었지만, 나는 분명 저 남자를 알고 있었다.
정확히 말하자면 내가 아닌 ‘76번’이 사무치도록 잘 알고 있었다.
그녀를 위해서라도 저 남자 앞에서는 약한 모습을 보이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본능적으로 떨려 오는 몸이 제어가 되지 않았다.
“알아보시는군요. 역시.”
그런 나를 바라보며 루시안이 착잡한 목소리로 말했다.
“제국 밖으로 도주를 시도하던 것을 서쪽 국경에서 잡아, 어젯밤 긴급 호송되었습니다.”
“아…….”
“다른 간부들도 대다수 잡혀 현재 심문 중에 있습니다. 원하신다면 모두 얼굴을 보여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그건 괜찮아요. ……아니, 아니. 취소할게요.”
나는 혼란스레 고개를 내저었다.
“모두 확인하겠어요.”
저 남자가 있는 이 방에서 벗어나고 싶었다.
다른 간부들의 얼굴 역시 보고 싶지 않았다. 마주할 때마다 지금처럼 공포가 숨을 옥죄어 올 테니까.
하지만 76번을 위해서라면 이 순간을 회피해서는 안 된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76번에 대해 잘 몰랐지만, 꽤 많은 것을 알고 있기도 했다.
그녀가 어떤 것을 좋아했고, 어떤 것에 심장을 두근거려 했는지는 알 수 없지만, 그녀의 비참한 과거에 대해서는 누구보다 잘 알았다.
76번의 몸에 노예 낙인을 찍고, 수많은 끔찍한 임무를 강요하며 목숨을 위협해 온 놈들.
나는 그들 중 하나인 남자를 뚫어져라 노려보았다.
“……별것 없네요.”
떨려 오는 목소리를 간신히 가라앉히며 내가 말했다.
“노예를 숫자로 불러 가며 쥐락펴락할 때는, 하늘 위 해처럼 전지전능해 보이던 사람인데.”
내 말에 남자가 부릅 눈을 치켜떴다.
하지만 이미 오래 심문을 당한 탓인지, 그 눈에는 독기가 깊이 서리지 못했다.
“이렇게 자유를 빼앗아 놓으니, 결국 무력한 건 제가 무시하던 노예들과 똑같군요. 우스울 만큼.”
나는 입꼬리를 끌어올려 한껏 비웃음을 지어 주었다.
“원하시는 처벌이 있으십니까, 성녀님?”
‘성녀님’이라는 말을 듣자 남자의 눈가가 눈에 띄게 구겨졌다.
이 와중에도 내가 가짜 성녀라는 사실을 비웃고 싶은 모양이었다.
“성녀님께서도 피해를 입으신 분 중 한 분으로 알고 있습니다. 저희는 전적으로 피해자들의 의견을 적극 수렴할 생각입니다. 특히 성녀님의 의견을요.”
“제 의견이라. ……죽여 달라고 하면, 죽여 주시나요?”
“물론입니다. 아직 재판은 진행되지 않았지만, 사형을 당하고도 남을 죄목이니까요.”
말 그대로 이 남자의 목숨이 지금 내 손아귀에 달려 있다는 이야기였다.
나는 입술을 깨문 채 지그시 생각에 잠겼다.
76번이라면, 이 순간 어떻게 하고 싶었을까?
“……나인의 다른 노예들은, 혹시 어떻게 되었는지 아시나요?”
“예. 본거지를 습격할 때 상당수의 피해자들을 구출해, 현재 성당 측에서 보호하고 있습니다.”
“그렇군요.”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루시안의 말을 듣자마자 마음이 정해졌다.
“그분들이 모두 이자를 만날 수 있도록 해 주세요.”
나는 남자를 똑바로 쳐다보며 말했다.
“한 명도 빠짐없이 전부, 이자가 지금 어떤 꼬락서니를 하고 있는지 구경할 수 있도록 해 주세요. ……그러고 난 뒤, 이자의 처벌은 그분들이 원하는 방향으로 처리해 주세요.”
“그거면 되시겠습니까, 성녀님?”
“네. 충분해요.”
나 역시 나인에게 여러모로 피해를 입기는 했지만, 그래도 날 때부터 노예로 살아온 다른 피해자들에 비할 바는 아니었다.
그렇기에 진짜 복수는 그 사람들에게 맡기고 싶었다.
“알겠습니다. 아이린 님.”
루시안이 굳게 고개를 끄덕였다.
“성녀님의 은혜로 구차한 목숨, 하루라도 더 보전한 줄 알도록 해라.”
경멸스러운 눈빛으로 루시안이 남자를 노려보았다. 남자의 눈가가 숨길 수 없는 모멸감과 굴욕으로 일그러졌다.
그 모습을 보니 가슴 속 깊이 멍울져 있던 몽우리가 조금이나마 풀리는 기분이 들었다. 진짜 76번이 받은 굴욕에 비하자면 저 남자는 아직 반의 반의반조차 겪지 않았겠지만, 뭐. 상관없었다.
나머지는 앞으로 남은 생 동안 차차 받으며 살게 될 테니까.
“다른 간부들도 만나 보시겠습니까?”
“……네. 만나 볼게요.”
루시안은 나를 또 다른 방으로 안내했다.
수장이 홀로 묶여 있던 방과 달리, 이번 방에서는 여러 명이 나란히 구속되어 있었다.
간부들의 외견은 제각각이었다.
나이가 어려 보이는 자, 노인인 자. 여자, 남자, 선한 인상인 사람, 얼굴에 흉터가 가득한 사람…….
공통점은, 모두 얼굴을 마주할 때마다 내 안에서 형용할 수 없는 메스꺼움을 불러일으킨다는 점이었다.
“아이린 님. 괜찮으십니까?”
내 안색이 많이 안 좋아 보였는지 루시안이 말을 건넸다.
“힘드시면 조금 쉬신 뒤 나중에 다시 오셔도 괜찮습니다.”
“아뇨. 아무렇지도 않아요.”
고개 저은 나는 간부들의 면면을 다시금 둘러보았다.
그러던 중 어느 한 지점에서 눈길이 멈췄다.
“……잠깐.”
이십 대 중반 정도 되어 보이는, 훤칠한 키의 성인 남성.
처음 보는 얼굴인데 실루엣이 어딘가 눈에 익었다.
“당신.”
나는 눈을 찌푸린 채 그 남자를 가만히 바라보았다.
“날 찾아온 적 있죠? 그림자의 모습으로.”
대성당 테라스에 숨어들어와 크리스털 귀걸이를 건넸던 그 그림자와 이 남자가 겹쳐 보였다.
재갈이 물려 있는 탓에 남자는 대답하진 못했다. 다만 어딘지 혼란스러워 보이는 눈으로 나를 올려다볼 뿐이었다.
“저자도 간부인가요?”
“아. 4번 말씀이시군요.”
내가 주목한 남자를 알아본 루시안이 술술 설명했다.
“으음, 아뇨. 저자는 간부 위치는 아니었고, 낙인이 찍힌 노예 중 하나였습니다. 다만 아무리 노예 상태였다고는 하나, 저지른 죄가 너무 많아 처분을 고려하고 있는 상태입니다.”
“같은 노예였다고요…….”
역시 그랬구나.
나는 착잡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자세한 건 더 조사해 봐야 알겠지만, 내 느낌으로 이 사람은 그저 나와 같은 피해자에 불과할 것 같았다.
그저 다른 피해자들보다 유능해서, 더 자주 희생당해야 했던 피해자.
덜컥, 덜컥.
4번이 격렬히 몸을 움직이자 의자가 덜컹거리는 소리를 냈다.
나는 당황한 눈으로 4번을 살폈다. 나를 간절히 올려다보는 눈빛이 심상치 않았다. 아무래도 내게 할 말이 있는 것 같았다.
“잠깐 대화를 나눠 볼 수 있을까요?”
“원하신다면, 재갈을 잠시 풀도록 하겠습니다.”
“부탁드릴게요.”
루시안이 고개를 끄덕이자, 성기사들이 다가와 4번의 재갈을 풀어주었다.
입이 자유로워진 4번이 나를 올려다보았다.
그 입술에서 나온 말은 충격적이었다.
“당신. ……76번이 아니군요.”
심장이 쿵 내려앉았다.
무슨 뜻으로 하는 말이지?
나는 애써 입을 열어 대답했다.
“무슨 말씀이시죠?”
“76번이…… 아니. 우리가 간부들에게 갖고 있는 증오는 결코 갈무리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런데 당신은, 지금 마치…… 한 발짝 물러나 관조하는 사람 같은 눈빛을 하고 있어요.”
“…….”
“대체 누군가요, 당신은. 76번은 어디로 간 거죠?”
4번이 다급히 물어왔다.
추궁당할수록 심장이 점점 더 빠르게 뛰었다.
들켰다. 처음으로. 내가 진짜 76번이 아니라는 것을.
“이자가 대체 무슨 소리를.”
루시안이 곤혹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아무래도 정신 착란 증세가 온 모양입니다. 너무 괘념치 마십시오, 성녀님.”
루시안의 신호에 성기사들이 다시 4번의 입에 재갈을 물렸다.
입이 틀어막히면서도 4번은 내게서 눈빛을 돌리지 않았다. 답을 갈구하는, 간절하면서도 혼란스러운 눈빛에 숨이 막혔다.
나는 나도 모르게 뒷걸음질을 쳤다.
“……루시안 씨. 오늘은 이만 돌아가 봐야겠어요.”
“아, 물론입니다, 아이린 님. 많이 무리하셨죠.”
루시안이 걱정스레 얼른 고개를 끄덕였다.
“방까지 다시 모셔다드리겠습니다.”
“아뇨. 혼자 있을 시간이 필요해요. 괜찮다면 혼자 돌아갈게요.”
“정 그러시다면…… 알겠습니다.”
루시안이 걱정 가득한 얼굴로 대답했다. 어차피 성당 안이니 위험한 일은 없으리라 판단한 듯했다.
나는 멍하니 방을 빠져나와, 지하 감옥 복도를 걸었다.
4번의 목소리가 귓가를 떠나지 않았다.
‘76번은 어디로 간 거죠?’
……그러게.
진짜 76번은 어디로 간 걸까.
그리고, 나는 이제부터 어디로 가야 하는 걸까.
집으로 돌아갈 수는 있는 걸까?
진짜 76번이 이 몸으로 돌아오지 못하고 있는 것처럼, 나 역시 영영 돌아가지 못하는 것은 아닐까.
이안과 머리를 맞대고 황제를 상대하느라 정신 팔린 동안 외면하고 있던 문제가 다시금 수면 위로 올라왔다.
나라는 존재는, 대체 뭐지.
사춘기 시절 이미 끝낸 줄 알았던 정체성 고민이 다시금 나를 찾아왔다.
나는 이 세계의 독자. 하지만 동시에 활자로 읽었던 이 세계에서 직접 숨 쉬며 살아가고 있다.
이 괴상한 모순이 내게 기묘한 기분을 들게 만들었다.
내 존재는 마치 이차원 속의 삼차원 같은 역설이었다. 나의 존재 자체가 이 세계의 오류 같았다.
틀린 말은 아니었다. 나는 아무도 내 진짜 정체에 대해 설명하지 못할 테니까. 말해 보았자 아무도 믿어 주지 않을 테니까.
생각에 잠겨 있는 동안 걸음은 점점 더 빨라졌다. 어느 순간부터는 발걸음이 서로 엇갈릴 정도로 다급해졌다.
모퉁이를 돈 순간이었다.
“읏.”
무언가 단단한 것에 이마를 부딪쳤다.
넘어질 뻔한 몸을 따스한 체온이 받아 주었다.
“아이린?”
곤혹스러운 목소리에 나는 고개를 들었다.
이안이었다.
이상한 일이었다.
그 얼굴을 마주하는 순간, 울어 버릴 것 같은 기분이 들고 말았으니까.
“아이린. 괜찮습니까?”
“……어떡하죠.”
나는 그의 품에 안긴 채 나도 모르게 입을 열었다.
집으로 돌아가고 싶은데, 정말 돌아가고 싶은데. 과연 돌아갈 방법을 찾을 수 있을지 모르겠어.
‘그리고, 무엇보다도.’
돌아간다 하더라도, 이번엔 반대로 이 세계를 다시 그리워하게 되는 건 아닐지.
그러지 않으리라는 확신을 얻을 수가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