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0화
두근, 두근.
가슴이 심하게 뛰었다. 고작 기다리라는 말이 뭐라고, 마치 은밀한 밀어라도 들은 것처럼.
‘아니. 생각해 보면 이상할 것도 없잖아.’
그날 이후, 나와 이안은 나누지 못한 이야기가 많았다.
황제가 죽었던 그날, 나는 사태가 정리되는 것을 끝까지 지켜보지 못하고 자리를 떴다.
어쩔 수 없었다. 마라톤 경주를 완주한 사람처럼 심장은 심하게 뛰고, 머리는 핑핑 어지러운 데다 숨이 터질 듯 가빴으니까.
이안 앞에서 쓰러지는 꼴을 또 보이고 싶진 않아 다급히 대성당으로 돌아갔었다.
나름대로 괜찮은 연기를 잘 해냈다고 생각했는데, 새벽에 눈을 뜨자 내 머리맡엔 이안이 있었다.
‘일어났습니까?’
오른손을 내 이마 위에 올린 채.
언제부터 그러고 있었던 걸까.
어둠 속에서 이안을 올려다보며 나는 멍하니 그런 생각을 했었다.
이마를 통해 따스히 나를 적셔 오는 성력 탓에, 그 모든 상황이 그저 꿈 같았다.
이안은 일어났냐는 물음 뒤로 한동안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너무 고요해서 정말 내가 꿈을 꾸고 있는 건 아닐까 의심이 들 즈음, 호수의 물결처럼 잔잔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고맙습니다. 아이린.’
무엇을, 이라고 물을 필요는 없었다.
나는 눈을 감고 가만히, 내 이마를 스치는 이안의 손길을 느꼈다.
아직 목은 무언가가 할퀸 듯 아프고 온몸에 힘이 하나도 없었지만, 마치 그 한마디로 많은 걸 보상받은 듯한 기분이 들었다.
그게 우리가 단둘이 나눈 마지막 대화였다.
그 뒤 일주일 동안 이안은 말 그대로 몸이 열 개라도 남아나지 않을 만큼 바빴다.
나는 그동안 내내 침실에 누워 요양했다.
며칠 전의 그 격렬했던 전투가 꿈은 아니었을까 의심될 정도로 고요하고 편안한 하루하루였다.
이안이 끼니마다 보내오는 괴상한 생김새의 보양식을 먹어야 하는 건 고역이었지만.
‘아무튼.’
이안과 나 사이에는 나누어야 할 이야기들이 많긴 했다.
내가 세운 공로를 생각하면 할 말이 아주, 아주 많았다.
‘사실 그렇잖아. 나로 말하자면 최고급 공신이라고.’
나는 이안이라는 배를 선택했고, 아주 충성스레 미친 듯이 노를 저었다.
그리고 내가 선택한 선장이 머지않아 이 나라의 황제가 될 것이다.
몸이 아팠던 탓에 제대로 작동하지 않았던 계산기가 팽팽 돌아가기 시작했다. 나는 탐욕스러운 눈으로 이안을 올려다보았다.
내가 알기로 이안 에스테반이라는 인간은 칼 같기 그지없지만, 제 사람에겐 결코 박정하지 않았다.
“……왜 그런 표정을 짓는 겁니까?”
“그런 표정이라뇨?”
나는 얼른 눈에 서린 탐욕을 지우고 착한 미소를 지었다.
이안이 묘한 표정을 짓더니 고개를 내저었다.
“……아무것도 아닙니다. 오늘 밤, 몸만 괜찮다면 절 기다리는 것 잊지 마십시오.”
“물론이죠.”
나는 굳게 고개를 끄덕였다.
드디어 찾아온 것이다. 논공행상의 시간이.
“무조건 깨어 있을 거예요.”
“아니, 무리하지는 마세요. 어디까지나 피곤하지 않은 선에서 부탁드린 겁니다.”
“아뇨. 반드시 깨어 있을 테니 늦지 않게만 오세요.”
힘주어 말하자 이안이 잠시 나를 빤히 바라보더니, 이내 대답했다.
“네. 늦지 않겠습니다.”
* * *
그 뒤, 남은 오후 시간 내내 나는 깊은 고민에 잠겨 지냈다.
이안에게 무엇을 요구해야 잘 요구했다고 소문이 날까?
생각해 보면 이안에게 나만 한 공신은 또 없었다.
나는 나인과의 악연을 이용해 라시드와 그놈들의 커넥션을 밝혀 냈고, 복원 마법도 떠올려 냈다. 이안의 과거에 직접 접촉해 무의식 속에 묻어 두었던 기억을 마주할 수 있게 도와주었고, 언령으로 라시드를 무장 해제시키기까지 했다.
이 정도면 거의 개국 공신 수준이었다.
하나하나 짚어 보며 나는 새삼 나의 공로에 감탄했다.
‘오른팔이라는 루시안도 내 업적엔 한 수 접어야 할걸?’
실제로 루시안은 이 일주일간 나를 아주 깍듯이 모시고 있었다.
이전에도 친절하기 그지없었지만, 지금은 무슨 여신상 모시듯 대했다.
오늘만 해도 이안이 주문한 보양식이 담긴 트레이를 손수 밀고 들어오며 하나하나 효능에 대해 설명했다.
눈코 뜰 새 없이 바쁜 건 루시안 역시 마찬가지일 텐데도 내게 이런 지극정성을 보일 만큼, 지금 이안에겐 내가 아주 중요한 인재라는 뜻이었다.
‘암. 당연한 일이지.’
이렇게 공로를 산처럼 쌓았으니 응당 돌아오는 보상이 있을 거다.
나는 이 계약에 대해 인센티브를 두둑이 얻어낼 생각이었다.
‘곧 끝이 나니까. ……우리의 계약도.’
나와 이안의 계약 기간이었던 일 년이 이제 끝을 보이고 있었다.
그러니 슬슬 계약 이후의 살길을 도모해야 했다.
“아이린 님, 계신가요?”
문밖에서 조심스러운 목소리가 들렸다. 루시안이었다.
‘또?’
점심 식사 트레이를 밀고 들어왔던 게 얼마 전인데.
나는 아네트에게 고개를 끄덕여 문을 열도록 했다.
문 너머에서 루시안과 눈을 마주치자마자 나는 움찔했다.
“벌써 다음 식사 시간인가요?”
“네? 하하, 아닙니다, 성녀님.”
루시안이 웃으며 손사래 쳤다. 나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이름도 괴상한 심해어의 내장을 꾸역꾸역 삼키느라 고생한 게 고작 두 시간 전 일이었으니까.
“그런 용무가 아니라…… 혹시, 시간이 괜찮으시다면 잠시 절 따라와 주실 수 있을까요?”
“네?”
나를 살피는 루시안의 눈동자에 걱정스러운 빛이 묻어 있었다.
나는 덜컥 겁이 나 물었다.
“이안 님께 무슨 일이 생긴 건가요?”
“아닙니다! 그런 게 아니에요, 성녀님. 그…… 여기서 말씀드리기엔 조금 무리가 있는 이야기여서요.”
루시안이 곤란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나는 어리둥절한 얼굴로 방 안을 둘러보았다.
지금 이 안엔 루시안과 나를 제외하고는 아네트를 비롯한 가까운 시녀들, 그리고 조안 경밖엔 없었다.
‘이 사람들도 들으면 안 되는 이야기라고?’
뭔진 모르지만 굉장히 심각한 이야기인 게 분명했다.
나는 무겁게 고개를 끄덕였다.
“네. 시간 괜찮아요. 지금 바로 갈게요.”
“감사합니다, 아이린 님.”
나는 루시안을 따라 대성당 어딘가를 향해 움직였다.
루시안은 깊은 지하 계단으로 나를 안내했다.
계단을 얼마나 내려간 건지 지하 특유의 습한 공기가 나를 감쌌다.
대성당 생활을 한 지도 이제 꽤 되었지만, 이렇게 깊은 곳까지는 한 번도 내려가 본 적이 없었다.
‘내가 알기로, 이렇게까지 지하에 위치한 것은…….’
지하 감옥, 밖엔 없는데.
나는 침을 꿀꺽 삼켰다.
성기사단이 이용한다는 특수 지하 감옥에 대해서는 여러 괴담이 많았다.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고문 기구가 거기 있다더라.
그 안에 들어가면 태아적 기억까지 줄줄 불게 된다더라.
밤에 지하로 내려가 보면, 심문당하는 사람들의 끔찍한 비명을 들을 수 있다더라…….
오싹, 피부 위로 소름이 돋았다.
“루시안 씨. 혹시, 저희가 지금 가고 있는 곳이…… 지하 감옥인가요?”
나는 용기를 내 속닥여 물었다.
루시안이 놀란 눈으로 나를 돌아보았다.
“네, 맞습니다. 성녀님. 이제 거의 다 왔으니, 조금만 더 힘내 주세요.”
루시안의 깜짝 놀란 눈이 나를 몹시 불편하게 했다.
내가 벌써 목적지를 눈치채서 놀라고 만 걸까?
나는 조금 더 용기를 내 물었다.
“실례지만, 왜 절 데리고 지하 감옥에 가고 있는 건지 여쭈어도 될까요?”
“아…… 아직은 말씀드리기가 조금 그렇습니다.”
그렇게 말하며 곤란히 미소 짓는 루시안은 수상하기 그지없어 보였다. 루시안이 덧붙였다.
“단장님께서 직접 지시하신 부분이니 걱정하지 마세요.”
이안이 나를 직접 이리로 오도록 했다고……?
순간 사자성어 하나가 내 머리를 스쳤다.
토사구팽.
토끼 사냥이 끝나자 사냥개를 삶아 먹었다던 옛 고사가 떠올랐다.
‘아, 아니겠지.’
자기 비밀을 너무 많이 알아 버린 나를, 계약 기간도 끝나 가겠다 이 자리에서 댕겅 처리해 버리려는 것은……?
‘아니야. 그, 그럴 리가 없지.’
이안이 그럴 리 없다는 걸 알면서도, 지하의 스산한 공기 때문인지 소름이 쉽게 가시지 않았다.
머지않아 루시안과 나는 지하 끝까지 도달했다.
“이곳입니다, 성녀님.”
지하 감옥 입구를 철통처럼 지키고 서 있던 성기사들이 우리를 발견하고는 정중히 문을 열어 주었다.
감옥 안은 비릿한 쇠 냄새로 가득했다.
우려했던 것처럼 비명은 들리지 않았으나, 숨 막히도록 고요해 오히려 더 섬뜩한 구석이 있었다.
“성녀님, 이쪽으로.”
루시안이 가장 깊숙이 위치한 감옥으로 나를 안내했다.
그 안으로 시선을 돌린 나는, 문득 숨을 멈췄다.
넓은 감옥 방 안에는, 의자 하나만이 덩그러니 놓여 있었다.
그 위에 누군가가 묶여 있는 것이 보였다.
“어젯밤 호송되어 온 자입니다. ……알아보시겠습니까?”
나는 멍하니 묶여 있는 자를 바라보았다.
장년 정도의 나이대로 보이는 남성이었다. 입에 재갈이 물려 있는 남자가 나를 노려보았다.
남자는 분명 내가 모르는 얼굴을 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 눈빛과 마주하는 순간, 나도 모르게 몸이 먼저 반응했다.
쿵, 쿵. 심장이 거세게 뛰기 시작했다.
‘안녕, 꼬마야.’
동시에 귓가로 내가 모르는, 하지만 동시에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성공적으로 실험을 이겨 냈구나. 장하다. 네가 17번째 성공작이란다. 네 이름은 이제부터 17번이다.’
본능에 공포로 각인된 목소리.
‘이번 달은 성과가 좋지 않구나. 이대로라면 안타까운 결과를 맞이할 수밖에 없겠는걸. 에드워드, 다음 폐기 일정은 언제지?’
아무렇지 않게 ‘폐기’를 언급하던 두려운 목소리.
온몸이 사정없이 떨려 왔다.
나는 간신히 떨림을 억누르며 입을 열었다.
“루시안 씨. ……저 사람은, 혹시.”
나는 차마 질문을 끝맺지 못했다.
사실 답을 듣지 않아도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내 앞에 묶여 있는 저 남자가 바로 나인의 수장이라는 것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