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9화
나는 그 모습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신께선 인간에게 너무 큰 고통은 부여하지 않는다던 말이 떠올랐다.
틀린 말은 아니라고 생각했었다. 도저히 견딜 수 없을 만큼 끔찍한 고통이라면, 십중팔구 머지않아 죽음으로 끝을 맺을 테니까.
그러나 황제는 죽음이라는 안식을 선사받지 못하고 있었다.
정도 이상의 고통 탓인지, 핏줄 터진 황제의 눈에는 초점이 사라져 기괴했다.
“저주, 크억…… 저주한다. 네놈! 흐억, 이안……! 지옥에서도 네놈을 저주할 것이다!”
그 비명에는 오로지 스스로를 향한 연민과 억울함만이 가득했다.
이 지경이 되어서도 황제는 조금의 반성도 할 줄 몰랐다. 애초에 라시드에게 그런 것 따위는 불가능한 행위일 테다. 그의 머릿속에 들어찬 건 오로지 자기 자신뿐일 테니까.
태어날 때부터 결함이 있었던 인간. 내 눈에는 염소 뿔과 박쥐 날개를 지닌 발록보다 라시드가 훨씬 더 징그러운 마물로 보였다.
이안은 제게 저주를 내뱉는 황제에게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았다. 마치 그럴 가치도 없다는 듯.
그저 벌레가 꿈틀거리는 것을 바라보듯 황제를 내려다볼 뿐이었다.
그런 이안의 시선에 황제는 약 맞은 바퀴처럼 더욱더 몸을 떨었다.
그러기를 몇 분이나 더 지났을까.
“끄르르륵…….”
마침내 생명력이 다한 듯, 황제가 힘없이 축 늘어졌다. 그의 입에서 피거품이 흘러나왔다.
“폐, 폐하! 제발. 제발 정신을 차리세요!”
황후가 다시금 치유를 시도하듯 황제의 배를 감싸 쥐었지만, 이번엔 하얀 빛무리가 응집되다 말고 허공으로 흩어졌다.
신성력이 다한 모양이었다.
“안 돼. 안 돼!”
황후가 울부짖었다.
그러나 아무리 성녀라고 해도 사람의 생명을 두 번이나 좌지우지할 수는 없었다.
황제의 눈동자가 뒤로 넘어갔다. 부들부들 떨리던 손발 역시 움직임을 멈췄다.
24대 황제이자 레하트 제국 역사상 유일하게 폐위된 황제, 라시드 에스테반은 그렇게 추악한 숨을 거두었다.
* * *
다음 날, 수도는 통째로 충격에 잠겼다.
황제의 죽음.
황궁을 덮친 마물들.
선황의 죽음에 대해 밝혀진 진실들.
당연하게도 수도민들 대부분은 어젯밤의 이야기들을 곧이곧대로 믿지 못했다.
그러나 마물의 습격으로 반파된 황궁과, 남아 있는 발록의 시체들, 무엇보다 천공섬 위에 있었던 사람들의 증언이 잇따르자 차츰 믿어 가기 시작했다.
황궁은 한동안 복구 작업으로 어지러웠다.
리젤로와 마법사들 덕분에 소환 마법진은 중간에 가동을 멈췄고, 이미 소환된 마물들은 성기사들이 우여곡절 끝에 모두 제압했다. 그러나 전투가 남긴 후유증은 황궁 여기저기에 흉터가 되어 남아 있었다.
그리고, 라시드의 죽음 이후 일주일이 되던 아침.
“-그러므로 주신 엘룬의 인도에 따라, 부디 영면에 들기를.”
오랜만에 공식 석상에 나선 추기경의 기도에 모두 경건히 고개를 숙였다.
이곳은 전사들의 안식처. 역대 황제들의 유해가 묻혀 있는 곳이었다.
이안은 라시드가 가짜로 만들어 놓은 선황의 무덤을 열어, 그 속에 자신이 모시고 있던 진짜 선황의 시신을 안치했다.
이제야말로 진짜 잠들어야 할 곳, 제 황후의 곁에 묻힌 선황을 위해 다시 한번 추도식이 열리고 있었다.
나는 검은 드레스를 입은 채 내내 이안의 곁을 지켰다.
이런 날인데도 그의 얼굴은 언제나처럼 무표정했다.
마침내 달성한 복수에 후련해하는 건지, 아니면 그럼에도 돌이킬 수 없는 아버지의 죽음에 대해 비통해하는 건지. 꽤 오래 곁을 맴돈 나로서도 파악해 낼 수 없었다.
‘지금 무슨 생각 중일까. 너는.’
나는 이안을 향해 소리 없는 물음을 던졌다.
아무런 표정 없는 이안을 바라보고 있자면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
저렇게 단단해 보이는 사람인데 어째서 모래처럼 곧 흩어져 버릴 것만 같을까.
‘이안의 삶을 오랫동안 지탱해 온 건 복수였지.’
마침내 그 목표를 달성한 지금.
그는 이제 어떤 미래를 내다보고 있을까?
* * *
그다음 날에는 로렐라이의 재판이 열렸다.
정황상 로렐라이는 라시드의 악행에 대해 대부분 알고 있었다는 것이 밝혀졌다.
라시드가 선황을 시해했다는 것까지는 몰랐겠지만, 나인과 손을 잡고 마물 소환에 힘쓰는 것은 적극적으로 도왔다.
‘마물로 이루어진 군대를 조직해 대륙을 정벌할 계획이었다니.’
말도 안 되는 야심 하나는 꼭 닮은 부부였다.
소년 시절부터 이안에 대한 열등감으로 미쳐 있었던 라시드는 그렇다 쳐도, 로렐라이는 왜 그렇게까지 비정상적인 야심을 품게 된 걸까.
‘그것도 성녀라는 사람이.’
상식적으로 도무지 이해가 가지 않았다.
‘라시드 때문이었을까?’
라시드의 황좌에 대한 기괴할 정도의 집착과, 그리고 이안이 제 자리를 빼앗으러 올지도 모른다는 두려움.
그런 부정적이고 강렬한 감정들이 오랜 부부 생활 동안 그녀에게도 옮아 갔던 걸까.
그 결과 로렐라이는 라시드처럼 정말 언젠가 황좌를 뺏길지도 모른다고, 그러니 그때를 대비해 강한 무력을 길러 둬야 한다고 여기게 된 걸지도 몰랐다.
‘그렇다면, 로렐라이 역시 피해자인 걸까.’
나는 잠시 생각하다가 곧 고개를 저었다.
이유가 어찌 되었든, 라시드의 악행을 알고서도 적극적으로 도운 것은 그녀의 선택이었다.
“아니야! 난 정말 아무것도 몰랐어. 내 남편의 죄는 나와 아무런 상관도 없는 일이야!”
“피고. 이미 증거가 명백합니다.”
“이놈들! 감히 황후이자 성녀인 나를 심판하려 해!”
벼락같이 화내는 황후의 모습은 놀랍도록 라시드와 닮아 있었다.
그 모습을 바라보던 셀리나가 등 뒤에서 멍하니 중얼거렸다.
“……무섭네요.”
“무엇이요?”
나는 셀리나를 돌아보았다.
셀리나는 아직 얼굴빛이 돌아오지 않아 수척해 보였다.
그 사건이 있던 밤, 셀리나는 계획에서 아주 중대한 역할을 해 주었었다.
내내 먹구름으로 천공섬을 가리고, 중요한 순간 구름이 물러가도록 만든 건 모두 그녀가 지닌 성력 덕분이었으니까.
‘성녀로 부름받자마자 그런 큰 능력을 발휘할 수 있을까 걱정했는데, 정말 잘해 주었었지.’
셀리나가 아니었다면 나와 이안은 천공섬 위를 지켜 준 수많은 증인을 얻지 못했을 것이다.
복잡한 표정으로 셀리나가 말했다.
“솔직히 말하면, 성녀라는 존재는 신께서 직접 임명하는 것이니 특별한 의미가 있지 않을까 했어요.”
“의미요?”
“적어도 성녀라는 이름에 걸맞은 인성을 지닌 사람이라는 보장 정도는 되지 않을까…… 싶었거든요. 제가 성녀가 된 것도 그런 의미에서 믿기 힘들었어요. 아무리 생각해도 저는, 성녀와 전혀 어울리지 않는 사람이니까.”
살며시 미간을 좁히며 셀리나가 말을 이었다.
“그런데 이젠 알겠어요. 성녀라는 지위 자체는 그 사람에 대해 아무것도 보장해 주지 않는군요. 아이린 님처럼 훌륭한 성녀님이 있는가 하면, 저렇게…… 타락한 성녀 또한 있네요.”
재판이 끝나고, 피고석 밖으로 끌려나가는 로렐라이를 바라보며 셀리나가 씁쓸히 말했다.
“그러니 성녀라는 이름이 부끄럽지 않도록, 평생 정신 똑바로 차리고 노력해야겠어요.”
나는 희미하게 미소를 지었다.
내가 오랫동안 알아 온 셀리나다운 말이었다.
셀리나는 잘할 터였다. 로렐라이와는 달리 성녀인 자기 자신에 취하지 않고 언제나 겸손한 태도로 세상을 따스하게 바라보겠지.
“……이안 님은, 괜찮으실까요?”
셀리나가 걱정스레 속닥거렸다.
그 말에 나는 곁에 서 있는 이안을 돌아보았다.
그를 바라보고 있는 것은 나뿐만이 아니었다.
이 재판장 안 대부분의 사람이, 숙덕거리며 몰래, 혹은 노골적으로 그를 쳐다보고 있었다.
당연한 일이었다.
라시드가 죽고 로렐라이가 폐위된 지금, 다음 황위를 이을 재목은 이안밖에는 없었으니까.
‘성기사단장이자, 대성당의 모든 병권을 거머쥔 자. 그리고 차기 황제.’
제국 역사상 이렇게까지 정교 양극단의 권력을 동시에 틀어쥔 자가 존재했을까?
전례 없던 권력자의 탄생이 초읽기에 들어서 있었다. 모두 숨죽여 그 장본인인 이안을 훔쳐보기 바빴다.
‘정작 당사자는,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 건지 도통 모르겠지만.’
너무 오래 쳐다본 탓일까.
이안이 고개 돌려 나와 시선을 마주쳤다.
푸른 눈과 맞닥뜨린 순간 가슴이 두근 뛰었다.
그의 눈동자가 심해처럼 깊게 가라앉아 있었다. 수심이 너무 깊고 깊어, 도무지 그 아래 숨어 있는 마음을 파헤칠 수 없을 것처럼 느껴졌다.
나는, 최근 들어 이 일주일처럼 이안이 멀게 느껴진 적이 없었다.
‘하긴. 이제 너무 높으신 분이 되긴 했지.’
황제라니.
고작 가짜 계약 부인 신분으로는, 따라잡다가 뱁새처럼 다리가 찢어질 것 같았다.
쓰게 웃는 나를 향해 이안이 천천히 고개를 숙였다.
훅 가까워진 그의 체향에 심장이 다시금 덜컥 뛰었다.
“아이린. ……오늘 밤.”
나는 두근거리는 심장을 들키지 않기 위해 아무 대답도 하지 못했다.
그저 고개 들어 이안을 올려다볼 뿐.
이안이 나지막이 속삭였다.
“자정 전에는 돌아갈 테니, 날 기다려 주십시오.”
……돌아온다고?
나는 살짝 커다래진 눈으로 이안을 올려다보았다.
이 일주일간, 이안은 집무실과 황궁, 재판장을 오가느라 부부 침실에 발 한번 들인 적이 없었다. 과연 잠을 자기는 하는 건지 의심스러울 정도였다.
‘그런데, 기다리라니.’
어째서?
나는 혼란스러운 눈으로 이안을 올려다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