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8화
불덩이를 삼킨 듯 훅, 열기가 목구멍을 치고 올라왔다.
나는 목을 부여잡으며 잠시 비틀거렸다.
동시에 괴상한 소리가 들려왔다.
“그어억-”
짐승이 울부짖는 소리에 황급히 고개 든 나는 그대로 굳어 버렸다.
‘어?’
눈앞에 믿기 힘든 광경이 펼쳐져 있었다.
거대한 발록이 보이지 않는 벽에 부딪힌 듯 바닥에 나동그라져 버둥거리는 것이 보였다.
“그윽, 크르르륵……!”
계속해서 괴이쩍은 신음을 흘리면서.
발록은 몸을 일으키려 거대한 몸체를 펄떡거렸지만, 마치 투명한 무언가에 짓밟혀 있는 것처럼 도무지 일어나지 못했다.
그 모습에 기시감이 들었다.
일전, 지하 무도회장에서 상대했던 광대 악마들 역시 비슷한 모습을 보인 적이 있었다.
‘설…… 마?’
나는 내 목을 더듬거렸다. 아직 화끈한 아픔이 가시지 않은 목을.
멈추라고 했던 내 외침 때문인 걸까?
‘이게 언령이야……?’
이 능력에 대해 제대로 알고 나서 사용해 본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나는 멍한 눈으로 발록을 바라보았다.
저 거대하고 두려운 존재가 말 한마디에 저리도 무력해진 광경을 믿기 힘들었다.
“죽어라!”
때를 놓치지 않고 성기사 한 명이 달려들어 버둥거리는 발록의 목에 검을 꽂아 넣었다.
“끼아아아악!”
급소를 찔린 발록은 끔찍한 소리를 내질렀다가, 이내 절명해 축 늘어졌다.
무시무시한 위용을 자랑하던 대마물의 보잘것없는 최후였다.
“하…… 하하.”
뒤에서 소름 끼치는 웃음소리가 들렸다.
“이게 성녀의 힘인가? 아니, 로렐라이에겐 이런 재주는 없는데. 이건, 하하. 이건 정말 놀랍군.”
황제가 내 등 뒤에서 미친놈처럼 중얼거렸다.
“반역도의 여자긴 하지만, 이대로 죽이기엔 아까운 재능이야…… 그래. 너는 내가 데려가겠다.”
‘뭐라는 거야. 이 징그러운 놈이…….’
마치 간택이라도 해 주는 양 속삭이는 목소리가 소름 돋기 그지없었다.
그때 내 머릿속을 스치는 생각이 있었다.
「언령은, 사악한 것, 그리고 여신의 힘에 반하는 것들에 영향을 미친다.」
언젠가 언령에 대해 들었던 구절이 뇌 내에 재생되었다.
‘설마.’
가능성이 머릿속을 형광등처럼 밝혔다.
나는 고개 돌려 황제를 돌아보았다.
겉보기만은 반반한 황제의 얼굴 가죽이 보였다. 하지만 저 아래 숨어 있는 내면은 추악하기 그지없었다.
‘내가 본 인간 중에 이렇게까지 사악하고 징그러운 놈은 없었어.’
저기 나동그라진 발록보다도 어쩌면 황제의 내면이 더 마물에 가까울지도 몰랐다.
내가 지그시 그를 쳐다보자, 무슨 생각을 한 건지 황제가 나불거렸다.
“왜 그러지. 감사한 마음이라도 생겼느냐? 그래, 썩은 줄은 갈아타는 게 옳지. 네가 생각을 고쳐먹는다면 나 역시 참작해 주도록 하마.”
“아이린!”
이안이 다급히 나를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괜찮습니까! 아무 말도 하지 마십시오. 부디!”
그가 계속해서 외쳤다. 마치 내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 건지 알고 있는 것처럼.
황제가 이안에게 시선을 던지며 이죽거렸다.
“아무래도 네 부인은 내게 갈아타기로 마음을 굳힌 모양이구나. 이제 보니 능력까지 강대한 데다가 두뇌 회전도 빠른 여인이로군! 그래, 내게 이 능력만 있다면-”
나는 입술을 열었다.
“닥쳐.”
“대륙 통일도- 흡?!”
황제가 입을 더듬거렸다.
그러나 그 입술에서는 아무런 소리도 흘러나오지 않았다.
뻐끔, 뻐끔.
황제의 입이 헛되이 움직였다. 여전히 어떤 목소리도 들려오지 않았다. 마치 배터리가 다 떨어진 장난감처럼 황제는 아무 소리도 내지 못했다. 시시각각 황제의 눈이 팽창했다.
그 우스꽝스러운 모습에 희열이 샘솟아 가슴을 적셨다.
나는 계속해서 말을 이었다.
“아무것도 하지 마.”
말이 끝남과 동시에, 끈 떨어진 인형처럼 황제가 바닥에 주저앉았다.
그의 손에 들려 나를 위협하던 단도도 땅바닥에 힘없이 나동그라졌다.
황제가 부릅뜬 눈으로 나를 올려다보았다. 커질 대로 커진 눈은 곧 쏟아질까 무서울 정도였다.
“아이린!”
이안이 내 곁까지 달려왔다. 무력화된 황제는 거들떠보지도 않고 그가 나를 살폈다.
“괜찮습니까. 아무 말도 하지 말라고 했잖습니까!”
“이 와중에 할 말이 그것뿐이에요? 그보다, 콜록.”
“아이린!”
화끈거리는 통증이 목을 감쌌다. 이안이 황급히 내 팔을 쥐고는 당부했다.
“지금부터라도 아무런 말도 하지 마십시오. 나서게 해서 미안합니다.”
“방어 아티팩트.”
나는 옴짝달싹 못 하고 있는 황제의 손을 가리켰다. 은색 반지가 그 손가락 위에서 고고하게 빛나고 있었다.
“저것부터 벗기죠.”
황제의 입이 격렬하게 뻐끔거렸다. 아마도 나를 향해 저주를 퍼붓고 있는 듯했다.
그래 봤자 들려오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읏.”
나는 열기가 올라오는 목을 감싸 쥐었다.
황제가 계속해서 움직임을 시도하고 있기 때문일까. 목의 아픔이 사그라들지 않았다. 점점 더 심해지는 것 같기도 했다.
“이안 님, 콜록…… 빨리요.”
“조금만 견디십시오.”
이안이 입술을 짓씹으며 황제의 왼손을 향해 손을 뻗었다.
그 순간, 내 몸이 크게 비틀거렸다.
“흐읏.”
찰나에 온몸에 힘이 풀렸다. 방전이라도 된 것처럼.
황제의 눈빛에 순간 이채가 스치는 것이 보였다.
아차 할 새도 없었다. 그가 바닥에 떨어진 단도를 재빨리 주웠다.
“……!”
황급히 입을 열었지만, 쉬어 버린 목에서는 쇳소리만이 흘러나왔다.
황제가 주운 단도로 내 가슴을 찔러 올리려 했다. 나는 나도 모르게 질끈 눈을 감았다.
“끄어억!”
그러나, 비명을 지른 건 내가 아닌 황제였다.
나는 멍하니 다시금 눈을 떴다.
“아.”
황제의 복부에 성검이 꽂혀 있었다.
뚫린 배로부터 새빨간 액체가 줄줄, 멈추지 않고 흘러나왔다.
“헉, 허억…… 끄어억.”
황제가 믿기지 않는다는 듯 제 복부를 더듬거렸다. 황제의 손도 금세 붉은 피로 물들었다.
이안이 그런 황제를 경멸하는 눈으로 내려다보았다.
“후회하게 될 거라 하지 않았나.”
“허억, 끄으…… 흑.”
황제의 배에서 피가 마치 폭포처럼 흘러나왔다.
황제가 덜덜 떨리는 손으로 붉은 액체들을 주워 담았다. 다시 배 안에 집어넣고 싶기라도 한 것처럼.
나는 멍한 눈으로 그 광경을 지켜보았다.
황제의 상처가 너무 깊었다.
복부를 정확히 꿰뚫렸으니 황제는 머지않아 숨을 다할 터였다.
그 징그럽고 끈질기던 자의 최후를 목도하고 있다는 생각에 시선이 떨어지질 않았다.
이안이 황제의 복부로부터 성검을 뽑아냈다.
“끄허억!”
끔찍한 비명을 내지르며, 황제가 상처로부터 울컥 피를 토했다.
“치, 치유…… 사.”
색색거리는 목소리로 황제가 입술을 더듬었다.
“당, 장 치유사를…… 끅, 불러, 라. 누구든…… 쿨럭!”
치유사가 이 자리에 백 명쯤 있다 하더라도 저 상처는 고쳐 낼 수 없을 터였다.
그럼에도 황제가 맹렬히 현실 도피를 했다.
“누구, 든…… 도와줘…….”
“여기서 더?”
이안이 서늘히 조소했다.
“이미 방금 넌 네 운을 다 썼다. 이토록 쉽게 죽여 줄 생각은 없었으니까.”
이안의 말이 맞았다.
저 상처라면 몇 분 안에 황제는 절명할 것이다.
그건 그에게는 나름대로의 행운인 셈이었다.
이 자리에서 죽지 못한다면, 이안의 손에서 그는 죽는 게 차라리 나을 정도의 고통을 맛보게 될 테니까.
“네…… 놈…….”
황제가 핏발 선 눈으로 이안을 노려보았다.
“언젠가, 이런, 날이…… 올 줄…….”
“내가 형님을 배신할 날이 올 줄 알았다는 겁니까?”
이안이 입꼬리를 비틀었다.
“그래. 당연히 예상했어야지. 네가 우리들의 부모님을 해친 그 순간부터.”
“반역…… 자…….”
“황좌의 망령 같으니.”
낮게 혀를 찬 이안이 이어 말했다.
“이 순간을 그리도 오래 기다려왔는데, 막상 마주하게 되니 큰 감흥이 없군요.”
나는 대답 대신 이안을 바라보았다. 표정 없는 그의 옆얼굴은 오히려 지독히 쓸쓸해 보였다. 그간 그가 인내해 온 세월을 지금 이 순간 한꺼번에 겪고 있는 듯이.
“그저, 당연히 해치웠어야 할 일을 이제야 처리한 느낌입니다.”
이안의 목소리에는 이 모든 것에 질릴 대로 질린 듯, 지독한 환멸이 배어 있었다.
“이제 그만 끝내야겠군요.”
이안이 성검을 다시금 쳐들었다.
“라시드 에스테반.”
“존속 살해, 그리고 황족 시해죄로 너를 이 자리에서 처단한다.”
“끄르륵……!”
황제가 입에서 피거품을 뱉어 냈다. 더는 말을 할 생명력도 남아 있지 않은 모양이었다.
성검이 황제의 목을 내리치려던 순간이었다.
“안 돼!”
찢어지는 비명이 귓가를 울렸다.
뒤를 돌아본 나는 눈을 크게 떴다.
아름다운 붉은 머리를 풀어헤친 여인이 미친 듯이 이쪽을 향해 달려오고 있었다.
“안 돼. 안 돼! 폐하!”
한달음에 달려온 황후, 로렐라이가 황제 옆에 털썩 무릎을 꿇었다.
황제의 복부를 정신없이 살피며 로렐라이가 절규했다.
“이럴 순 없어. 이럴 순 없어!”
로렐라이가 미친 사람처럼 외치며 황제의 배를 더듬었다. 하얀 손이 금세 피로 물들었다.
“폐하, 이렇게 가실 수는 없습니다. 저를 두고 이렇게 가실 수는 없습니다. 반역도들을 모두 처단하고 황위를 지켜 제국을 호령하셔야지요. 포기하시면 안 됩니다. 그래선 안 됩니다!”
아직 절명하지 않은 황제의 눈이 힘없이 흔들렸다.
로렐라이가 계속해서 중얼거리며 황제의 복부를 꾹 두 손으로 감쌌다.
“죽일 수 없어. 죽어선 안 돼. 죽으면…….”
그때, 로렐라이의 두 손에서 하얀빛이 뿜어져 나왔다.
순백의 빛무리가 황제의 상처 위로 스며들었다.
황제가 눈을 부릅떴다.
“흐억…… 끄아아아악!”
입을 크게 벌린 황제가 끔찍한 비명을 토해 냈다.
“왜…… 왜. 어째서. 폐하. 폐하!”
로렐라이가 덜덜 떨리는 손으로 계속해서 황제의 배를 감싸 쥐었다. 하얀 빛무리가 멈추지 않고 그녀의 손에서 흘러나왔다. 복부에서 꾸역꾸역 흘러나오던 피가 멎었다.
그러나 복부에 깊이 난 상처는 아물 생각을 하지 않았다.
“왜! 왜 낫질 않지!”
그 사실을 깨달은 로렐라이가 절규했다.
그녀를 바라보며 나는 깨달음에 잠겼다.
‘로렐라이의 능력은, 십 분 안에 입은 상처를 치유하는 능력.’
그리고 아무래도, 이안이 성검을 꽂은 것은 이미 십 분이 지난 일인 모양이었다.
따라서 로렐라이는 황제의 출혈은 치유할 수 있었지만, 정작 그의 배를 가른 상처는 치유해 낼 수 없었다.
그 덕분에 황제는 죽음으로 달아날 수 있었던 고통을 다시 한번 직면해야 했다.
끔찍한 비명과 함께.
“끄억, 흐으아아악!”
“폐하! 폐하!”
황제의 소름 끼치는 비명과, 황후의 덧없는 외침이 귓가를 메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