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7화
“으아악. 끄아아악!”
“살려 줘!”
“흐억! 오, 오지- 크아악!”
여기저기서 고통에 찬 비명이 울려 퍼졌다.
소환된 발록들이 굶주린 짐승처럼 닥치는 대로 기사들을 공격했다.
근위 기사든, 군사들이든, 성기사들이든, 이 순간만큼은 피아 구별 없이 발록에게 도살당하고 있었다.
‘리칼리온에서 발록들을 상대했던 건 정예 중 정예들이었어.’
입단하는 순간부터 마물을 상대하는 법을 익히고 또 익혀 온 성기사들조차도 그런 최정예가 아니라면 발록을 상대할 수 없었다.
하물며, 그때보다 훨씬 더 수가 많은 이 상황을 성기사단도 아닌 기사들이 헤쳐 나갈 수 있을 리 없었다.
끔찍한 광경이 사방에서 펼쳐졌다.
‘정말 정신이 나가 버렸구나.’
제 영토에, 그것도 황궁 한가운데에 이런 대악마를 수십이나 소환하다니.
아무리 황제라 하더라도 이건 결코 용서 받을 수 없는 대죄였다.
황제는 대체 무슨 생각일까. 너무 분노에 찬 나머지 뒷일은 생각지도 못하고 저지르기부터 한 것일까?
‘……하긴. 상관없겠구나. 모두 죽여 버릴 생각일 테니까.’
일단 일을 치고, 목격자는 모두 없애 버린다. 선황을 죽였을 때 그랬던 것처럼.
한 번 시도한 일을 두 번이라고 시도하지 못할 건 없을 터였다.
나는 얼이 나가 황제를 바라보았다.
황제는 이 아수라장 한가운데서, 근위대장의 보호를 받아 몸을 피하고 있었다.
생명체라면 모두 닥치는 대로 공격 중인 마물들도 황제만큼은 공격하지 않는 것이 보였다. 그럼에도 황제는 몸을 피하는 연기를 착실히 펼치고 있었다.
‘천공섬 때문이구나.’
나는 허탈히 탄식했다.
황제는 지상 위 목격자는 모조리 죽여 버린 뒤, 천공섬 위 사람들에게는 갑작스레 황궁을 습격한 마물들에게 당했다며 피해자 행세를 할 셈인 것이다.
‘그리고 아마, 모든 죄는 이안에게 덮어씌울 생각이겠지.’
정말 끝까지 역겹고 뻔뻔한 놈이었다.
나는 죽일 듯 황제를 노려보았다. 당장 도망치는 저 뒷덜미를 끌어오고 싶었지만, 지금은 더 중요한 게 따로 있었다. 이 순간에도 마법진에서 발록들이 솟아나고 있었으니까.
‘지금은 성기사단이 어느 정도 수세를 유지하고 있지만.’
나는 이안 쪽을 돌아보았다.
성검을 정확히 발록들의 급소를 향해 휘두르는 이안에게선 아직 냉철한 여유가 엿보였다.
성기사들 역시, 당황했던 처음 이후로는 빠르게 대마물용 진영을 갖추었다. 그 뒤로는 오히려 발록들을 압도하는 모습을 보이고 있었다.
하지만 발록들의 수가 계속해서 늘어난다면 형세는 역전될 것이다. 성기사들의 체력도, 이안의 여유도 무한히 솟아날 수는 없었다.
나는 다급히 리젤로에게 물었다.
“탑주님! 소환을 해제하려면 어떻게 해야 하죠?”
“마법진을 유지하고 있는 매개체를 부숴야 하는데.”
리젤로가 난감한 목소리로 말했다.
“마법진이 너무 거대해서 추적하기가 힘든 것이 문제입니다. 탐지 마법을 펼치려 해도, 정확히 매개체가 어떤 형태일지 알고 있어야 용이합니다.”
“방법이 없을까요?”
“일단은 성마석을 탐지해 보겠습니다. 우리 측의 성마석이 유출된 것일지도 모르니!”
그렇게 말한 리젤로가 눈을 감고는 알아들을 수 없는 주문을 외웠다.
잠시 뒤 그가 낭패한 표정으로 눈을 떴다.
“이 근처에 또 다른 성마석은 없는 것 같습니다. 젠장. 사교도 의식에 쓰이는 마법진은 평범한 마법진과는 성질 자체가 달라서, 저로서도 이 황궁 전체를 구역별로 뒤져 보는 것밖에는 방법이-”
리젤로의 뒷말은 흐릿하게 들렸다.
사교도 의식. 그 말을 들은 순간 머리에 번쩍 번개가 쳤다.
“염소 머리!”
“예?”
나는 홀린 듯 계속해서 외쳤다.
“염소, 두꺼비, 돼지, 뱀. 그리고 전갈!”
“……아.”
리젤로가 한 대 얻어맞은 듯 멍한 얼굴을 했다.
“사교도의 5대 짐승!”
“네! 맞아요!”
이 마법진에 비하자면 약과지만, 건물만큼 거대한 마법진을 이전에도 본 적 있었다.
그때 마법진의 매개가 되었던 건 다섯 가지 동물들의 사체였다.
그 지하 무도회장에서 마물을 소환했던 범인과 지금 이 짓을 저지른 범인은 십중팔구 같은 집단이겠지.
그러니 매개체 역시 동일할 확률이 높았다.
“지금 당장 추적해 보겠습니다.”
그렇게 말한 리젤로가 다시금 눈을 감았다.
제발.
기도하며 나는 이안이 있는 방향을 돌아보았다.
그는 여전히 같은 자리에 선 채 마물들을 섬멸하고 있었다. 성검이 지나치는 궤적마다 발록의 생명이 으스러졌다.
‘조금만 더 버텨 줘.’
간절한 바람이 닿기라도 한 걸까.
이안이 문득 고개를 내 쪽으로 돌렸다. 시선이 마주치자 그의 눈이 커다래졌다. 이안이 입술을 움직였다.
‘왜.’
그 한 글자가 담고 있는 질문은 명확했다.
왜 아직까지 이곳에 남아 있냐는 추궁이었다.
이렇게 먼 거리에서도 화가 난 듯한 눈빛이 여실히 보였다. 순간 심장이 서늘해질 만큼.
“아.”
그때 리젤로가 번득 눈을 떴다.
나는 이안에게서 시선을 떼고 황급히 그를 돌아보았다.
“찾으셨나요?!”
“있습니다. 염소의 머리. 바로 이 근처에!”
“얼른 부숴 버리죠!”
“멜로디! 듣고 있나?”
통신 마법이 연결되어 있는 건지 리젤로가 허공에 말을 걸었다.
“두꺼비, 돼지, 뱀, 전갈의 사체를 추적해. 찾아내면 즉시 부숴 버리도록. ……뭐라고?”
멜로디에게서 무슨 말을 들은 건지 리젤로가 이마를 찌푸렸다.
“엘렌이 부상을 입었어? 다른 마법사들도? 하…… 일단은 최대한 전장을 벗어나도록 지시해라. 이건 우리의 싸움이 아니-”
거기까지 들은 순간이었다.
날카로운 아픔이 어깨를 파고들었다.
“흐으읍?!”
비명을 지를 새도 없었다.
순식간에 내 몸이 뽑혀 나가듯 하늘로 비상했다.
“고객님!”
리젤로가 다급히 날 돌아보는 것이 보였다.
삽시간에 그가 저 아래로 멀어져갔다.
“하으윽!”
사무치는 고통에 머리가 마비될 지경이었다. 두 어깨가 너무 아팠다.
어깨를 돌아본 나는 그대로 기절할 뻔했다. 거대한 닭 모양의 발톱이 내 양어깨를 쥐고 있었다.
“꺄아아아악!”
위를 올려다보자 발록의 거대한 양다리, 그리고 이어지는 몸체가 보였다.
믿기 힘들지만 나는 현재 발록에게 납치당하고 있는 중이었다.
“아이린!”
이 와중에도 이안의 외침만큼은 귓가에 똑똑히 꽂혔다.
발록의 발톱이 박힌 어깨가 너무 아팠다. 고통에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있는 동안에도 내 몸은 계속해서 어딘가로 이동되었다.
“그래…… 이리로.”
아픔에 의식이 까무룩 넘어가려던 순간이었다.
소름 끼치는 목소리가 귓가를 파고들었다.
나는 퍼뜩 고개를 들었다.
어느새 가까워진 땅 위에서, 라시드가 나를 맞이하고 있었다.
퉤.
뱉듯이 발록이 나를 황제의 발밑에 집어 던졌다.
“이런. 귀한 성녀님의 몸에 흠집이 났군.”
피투성이가 된 내 어깨를 바라보며 황제가 혀를 찼다.
위를 올려다본 나는 이 순간에도 헛웃음을 쳤다. 라시드 위를 거대한 나무가 가리고 있었다. 천공섬 위 사람들에게 보이지 않도록.
“라시드! 감히!”
이안이 상대하고 있던 마물들을 모조리 뿌리치고 내게 달려오는 것이 보였다.
황제가 내 목에 단검을 들이대었다.
“그만!”
무엇도 막을 수 없을 것처럼 거칠던 이안의 기세가, 순간 멈칫 힘을 잃었다.
황제가 등 뒤에서 킬킬거리며 웃었다.
“한 발자국이라도 더 떼었다간, 이 계집의 목숨은 보장하지 못할 줄 알아라.”
“라시드.”
이안이 형형한 눈빛으로 라시드를 노려보았다.
“후회하게 될 거다.”
“네가 내 앞에서 이렇게 여유 없는 모습을 보이는 건 처음이구나.”
라시드가 즐거이 말했다.
“잠깐 이 모습을 감상하는 것도 나쁘진 않을-”
한순간이었다.
이안의 성검에서 무언가 번쩍인다고 느낀 찰나.
펑!
폭발음과 함께 뭔가에 가격당한 듯 강한 충격이 나를 감쌌다.
“흐윽!”
“큿.”
충격을 받은 건 나뿐만이 아니었는지, 황제가 짧게 신음하며 나를 붙잡은 채 뒷걸음질 쳤다.
이안이 검을 휘두른 자세 그대로 낭패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잠시 뒤에야 나는 그가 황제를 향해 찰나의 순간 검기를 휘둘렀다는 것을 깨달았다.
정확히 가격한 것은 분명했다. 그런데 어째서인지 황제의 몸엔 흠집 하나 난 것 같지 않았다.
“후후. 크크큭.”
겉으로 보기에는 멀쩡해 보였지만, 내상이 아예 없진 않았는지 황제가 쿨럭거리며 기침했다.
그러면서도 미친 사람처럼 웃어 젖혔다.
“어리석은 아우야. 내가 내 몸 하나 지킬 방도 없이 나다닐 줄 알았느냐?”
과시하듯 황제가 제 왼손을 까딱였다. 검지에 겉으로 보기에는 평범해 보이는 은색 반지가 끼워져 있었다.
“방어 아티팩트…….”
내가 멍하니 중얼거렸다.
내 손목에도 같은 종류의 팔찌가 채워져 있었기 때문에 잘 알 수 있었다.
저 아티팩트 덕분에 황제는 이안의 공격을 정통으로 맞고도 멀쩡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왜 내 아티팩트는 효력을 발휘하지 않은 거지?’
의문이 찰나 머릿속을 스쳤지만, 지금은 다른 생각에 집중할 때가 아니었다.
이안이 말없이 황제를 노려보았다. 황제가 이죽거리며 그 눈빛을 받아쳤다.
“아예 예상하지 못하진 않았겠지. 아무리 그래도 대단하고 경이로운 네 힘까지 막아 낼 줄은 몰랐던 게냐?”
황제가 킥킥 웃었다.
“이게 돈과 권력의 힘이다, 아우야. 두 가지면 못 이룰 게 없지. 하하, 얼빠진 꼴이 퍽 볼만하구나. 재밌는 모습을 보여 주었으니 이번 한 번만큼은 이 계집의 목숨도 살려 주도록 하지!”
그렇게 말하며 황제가 내 쇄골에 단도 날을 대었다. 섬뜩한 한기에 나는 숨을 집어삼켰다.
“그 더러운 손.”
이안이 낮은 목소리로 으르렁거렸다. 피부에 소름이 돋을 정도로 깊고 무거운 목소리였다.
“당장 떼지 않으면, 맹세코 지옥보다 끔찍한 꼴을 보게 될 거다.”
“하하. 무섭군. 무서워! 이 여자를 정말 아끼고 있긴 한가 보군! 하긴, 그토록 오래 갈망해 온 추기경 자리마저 내다 버리게 된 원흉이니 말이야. 아니, 오히려 그 보상 심리로 더 이 여자에게 집착하게 된 건가? 그럴 수도 있겠군!”
황제가 쉴 새 없이 입을 나불거렸다.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
황제는 내가 본 악인 중 가장 말이 많은 타입이기는 했지만, 이렇게까지 입을 쉬지 않고 놀리진 않았다.
하지만 지금은 뭔가 이상했다. 마치 이안의 주의를 조금이라도 돌리려는 듯 끊임없이 말을 잇고 있었다.
황제의 단도가 내 피부 위를 얕게 그었다.
“읏.”
나는 간신히 비명을 참곤 입술을 깨물었다.
“아이린!”
이안이 내 이름을 외친 순간이었다.
등 뒤에서, 집채만 한 크기의 발록이 이안을 향해 달려들었다.
여태까지 상대했던 놈들과는 비교도 안 되게 커다란 마물이었다.
“이안! 뒤!”
나는 다급히 외쳤다.
하지만 이미 때가 늦었다. 발록이 치켜든 마검이 이안의 등을 정확히 겨누었다.
검 끝이 그를 파고들기 직전, 나는 다시금 입을 열었다.
뜨거운 열기가 목구멍 깊은 곳에서부터 솟구쳐 올랐다.
“멈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