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5화
* * *
섬이 하늘 위를 가리고 있는 광경을 올려다보며, 나는 치밀어오르는 고양감을 삼켰다.
모두 제때 일해 주었다.
리젤로도, 그리고 셀리나도.
“저…… 저게 대체 뭐야?”
하늘로 고개를 치켜든 근위 기사들이 믿을 수 없다는 듯 중얼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그중 한 기사가 말했다.
“천공섬. 천공섬이다!”
“맙소사. 저게 어떻게 여기에?”
기사들 몇몇은 꿈을 꾸고 있는 듯 멍한 표정이었고, 몇몇은 뒤통수를 얻어맞은 표정이었다.
그리고 황제는, 서서 굳은 시체처럼 그 자리에 못박인 채 섬만을 올려다보았다.
‘다들 잘 관람했겠지.’
나는 천공섬 위, 장난감처럼 조그맣게 보이는 사람들을 올려다보며 생각했다.
먹구름 위에 떠 있는 동안, 특수 제작된 망원경을 통해 저들은 지상에서 일어나는 일들을 모두 목격했을 것이다.
복원 마법이 보여 준 환영부터, 황제가 부린 억지까지. 모든 것을 전부.
“……저게 무엇이냐?”
꽤 한참을 굳어 있던 황제가 신음하는 듯한 목소리로 물었다.
열심히 동공을 지진 시키고 있던 근위대장이 황급히 대답했다.
“저것은 마탑에서 최근 개발해 낸 것으로, 하늘 위에 떠다니는 영토인데 이름은 천공섬-”
“누가 그딴 것을 물었나!”
황제가 버럭 화를 냈다.
얼굴이 시뻘겋게 달아오른 그는, 지금까지 중 제일 여유를 잃은 모습이었다.
천공섬을 가리키며 황제가 노호했다.
“저게 왜 내 성 위에 떠 있냐고 물었다! 감히 누구 허락을 받고!”
“하늘까지 폐하 소유는 아니지 않습니까? 당황스럽네요.”
리젤로가 깐죽거리며 어깨를 으쓱였다.
맞는 말이었다. 영공 개념은 이 세계엔 존재하지 않았으니 황제의 말은 그야말로 억지였다.
억울하면 지구에 태어나지 그랬어.
‘물론 그랬다면 이런 막무가내 패륜 인생은 살지 못했겠지만.’
나는 다시금 천공섬 위 사람들을 올려다보았다.
사람들 개개인은 아주 작게 보였지만, 그들이 느끼고 있는 혼란은 몹시 잘 보였다.
“폐, 폐하. 고정하십시오.”
근위대장이 식은땀을 흘리며 말했다.
“방금까지 먹구름이 가득하지 않았습니까? 저 위 사람들은 아무것도 보지 못했을 겁니다. 그 사특한 환영은 더더욱이요.”
“먹구름…… 하. 그래.”
그제야 먹구름에 생각이 미쳤는지 황제가 중얼거렸다.
“실례지만, 폐하.”
나는 얼른 나서 그의 안심을 깨뜨려 주었다.
“섬 안엔 특수 제작된 망원경이 있어요. 그걸로 저 위 분들 모두 이쪽 상황을 낱낱이 목격하셨을 거랍니다.”
목격하다뿐일까.
소리를 옮겨다 증폭시키는 마도구 덕분에 이쪽에서 오간 대화까지도 아주 노골적으로 전달이 잘되었을 터였다.
“……성녀.”
황제가 내게로 눈을 돌렸다.
눈이 마주친 순간, 살갗에 소름이 돋을 정도로 그 눈빛에는 살의가 가득했다.
“성녀 신분으로 감히 반역도와 손을 잡다니. 천벌이 네년을 갈기갈기 찢어 죽일-”
“제 아내에겐 놀리지 마시죠, 그 더러운 혀.”
이안이 내 앞으로 나서는 바람에, 나는 황제의 살벌한 눈 대신 이안의 등만을 보게 되었다.
“현실 도피는 그만하시고 인정하는 게 좋을 겁니다. 당신은 졌고, 우리가 이겼다는 걸.”
언뜻 무심히 들리는 어조에 황제가 거칠게 헛웃음 쳤다.
“재밌구나, 아우야. 오늘 밤 내가 인정할 것은 내 친혈육인 네가 지저분한 반역도였다는 사실뿐이다. 그 외 인정할 건 아무것도 없어.”
황제의 말은 이안이 아니라 모든 이를 향한 선포였다. 황제가 아직 절대 제 죄를 인정하지 않으리라는 의지만은 잘 알 수 있었다.
이안이 한심하다는 듯 낮게 혀를 찼다.
“수백 명의 목격자. 복원 마법이라는 명확한 증거. 무엇보다 나라는 증인.”
하나하나 열거한 이안이 냉소를 담아 말했다.
“혹시 아직도 패배를 인정할 증거가 모자랍니까?”
“가엾은 아우야.”
황제가 비웃음을 머금었다.
“역시 너는 날 때부터 군주였던 자의 사고방식은 지니지 못했구나. 왕에게 패배라는 말은 어울리지 않는다. 좋아. 인정할 건 인정하지. 사기극을 꽤 잘 준비했구나. 하지만 그런 사특하고 조잡한 술수로는 결코 제왕을 무릎 꿇릴 수 없을 것이다.”
“아바마마의 옥체.”
황제에게 성큼, 한 발자국을 다가선 이안이 나지막이 속삭였다.
그의 바로 뒤에 있는 내게만 겨우 들릴 크기였다.
“그분의 시신이 내게 있다고 해도. 말입니까?”
“…….”
황제는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단지 커다랗게 뜨인 눈으로 이안을 바라볼 뿐이었다.
곧 그가 입술을 일그러뜨렸다.
“하. 무슨 같잖은 소릴.”
“그렇게 생각합니까?”
“안식처에 평온히 잠드신 그분을 네가 무슨 수로 빼앗았다는 게냐. 지금 네 입으로 네가 무덤 도굴꾼이라는 걸 시인하는 게냐?”
도리어 황제가 이안을 추궁해 왔다.
이안은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입을 열었다.
“형님이 갖고 있는 그분의 머리.”
“…….”
황제의 입매가 굳었다.
“그 나머지 주검은 제가 가지고 있습니다. ……아더 경의 친우가 제대로 본 것이지요.”
“말 같지도, 않은 소릴, 하는군. 아바마마께서는-”
“폭발에 휘말려 남은 시신은 가루가 되어 사라졌을 것이다?”
“…….”
“걱정하지 마십시오. 그러지 않도록 제가 지금까지 잘 모시고 있었으니까요.”
이안이 입매를 비틀었다.
“그러고 보면 우린 참으로 우애 좋은 형제가 아닙니까? 아버지의 시신을 공평히 나누어 모시고 있으니.”
낮게 읊조리는 이안의 목소리가 저승사자처럼 차디찼다.
“알고 있었습니다. 선황 폐하를 시해한 것이 누구인지. 선황 폐하의 죽음에 의구심을 가져 파헤치려 했던 선황후 폐하까지 해친 것 역시 누구인지. 이 모든 살인을 어떤 식으로 은폐하고 황위에 올랐는지. 처음부터, 전부 다.”
“……개소리.”
황제가 부러질 듯 이를 아드득 가는 소리가 들렸다.
“병든 개 짖는 소리도 이보단 덜 어지럽겠군. 모두 들어라!”
별안간 황제가 벼락같이 외쳤다.
“지금 이 시간부로, 이안 에스테반을 황적에서 삭제하며.”
주위를 둘러보며 황제가 이글이글 끓는 눈으로 말했다.
“황위 계승권 역시 영구히 박탈함과 동시에, 제국 공적으로 선포하는 바이다!”
여기저기서 숨 들이켜는 소리가 들려왔다.
제국 역사상 열 손가락에 꼽을 만큼밖에 없었다는 공적.
황제가 직접 임명한 제국의 불구대천의 원수인 그들은, 제국민이라면 누구든 마주치는 즉시 섬멸하기 위해 온 노력을 다해야 했다.
그렇지 않으면 곧장 반역죄로 잡혀가도 할 말이 없을 만큼, 공적이라는 이름이 갖는 무게감은 무시무시했다.
근위 기사들이 혼란에 찬 표정으로 검 자루에 손을 댔다. 다시금 성기사들과 근위 기사들 사이의 긴장감이 팽팽해졌다.
그때, 저 멀리서 수많은 갑옷이 철그럭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고개 돌린 나는 질린 표정을 지었다.
황제가 불러온 상비군이 정원을 가득 메울 기세로 쳐들어오고 있었다.
“나의 군사들이여!”
황제가 치켜든 검을 이안에게로 겨누며 말했다.
“1급 결계 마법이 가동되었다. 적들은 도망치지 못한다. 이곳에서 모조리 섬멸하라!”
몰려온 군사들이 황제가 가리킨 사람을 보곤 멈칫했다.
찰나의 혼란을 눈치챘는지 황제가 씹어뱉듯 외쳤다.
“조금이라도 명령 수행에 망설임이 있다면, 모조리 반역도로 취급해 가족들까지 무사하지 못할 줄로 알아라!”
그러자 군사들이 정신을 차린 듯 검을 치켜들었다.
“리젤로. 아이린을.”
이안이 리젤로에게 내 쪽을 눈짓했다.
“이안.”
나는 리젤로를 따라가기 전 다급히 이안의 팔을 쥐었다.
“알고 계시지요? 전쟁은 최대한.”
“알고 있습니다.”
이안이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걱정 마십시오. 심려 끼치지 않을 테니.”
“……다치지 말아요.”
이런 상황에서 이런 당부를 하는 게 얼마나 이기적인지 알고 있었다.
하지만 부탁하지 않을 수 없었다. 생각하기 전에 입술이 먼저 움직이고 말았으니까.
그 와중에도 황제의 군사들은 시시각각 가까워지고 있었다.
‘진짜 막 나가는군.’
천공섬 위 수도민이 지금도 땅 위 상황을 똑똑히 지켜보고 있을 터였다.
황제는 일단 거슬리는 것들을 쓸어버린 뒤 뒷수습은 나중에 몰아 하기로 결심한 듯했다.
리젤로가 나를 데리고 가는 것을 확인한 이안이 제게 달려드는 군사들을 돌아보았다.
이안의 손이 아무것도 없는 허리춤에서 무언가를 뽑아 들 듯 움직였다.
그러자 허공에서 눈부신 성검이 솟아났다.
그 광경에 달려들던 군사들이 잠시 주춤했으나, 가족이 인질로 걸린 그들의 걸음은 결코 멈추지 않았다.
성검을 치켜든 이안이 허공을 크게 베어 냈다.
“으헉!”
“컥!”
허공이 베인 곳에서 황금빛 검기가 뿜어져 나와 군사들을 가격했다.
검기에 정통으로 맞은 군사들이 배를 부여잡으며 넘어졌다. 앞서 달려가던 군사들에게 걸려 넘어진 이들이 길이 가로막혀 우왕좌왕했다.
단 한 번의 공격으로 혼란이 전장을 덮쳤다. 군사들을 내려다보며 이안이 입을 열었다.
“너희가 충성하는 상대는 라시드인가, 제국인가!”
깨끗하면서도 날카로운 음성이 공간을 메웠다.
“친부의 피를 묻히고 제위를 강탈한 이를 너희는 주군으로 섬길 수 있는가. 그것이 너희들의 기사도인가?”
다시금 일어나 달려들려던 군사들이 여기저기서 주춤거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