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4화
‘아니. 아니.’
보리스는 깜짝 놀라 고개를 내저었다.
내가 대체 무슨 생각을.
역심을 들키기라도 한 듯 두근거리는 심장을 붙잡고 보리스는 다시금 사태를 파악했다.
황제가 이안과 마탑주, 아이린을 차례로 돌아보며 으르렁거리고 있었다.
“감당할 수 있겠나? 감히 이따위 역겨운 유언비어를 퍼뜨리고도 네놈들의 사지가 무사할 성싶으냐! 고작 저런 눈속임 나부랭이로 날 기만하려 해!”
‘그…… 그래. 폐하 말씀이 맞다.’
보리스는 간신히 납득했다.
보리스와 기사들이 본 것은 엄연히 말해서 진짜가 아니었다. 아무리 생생했다고 해도 환영에 불과했다.
그러니 선황 폐하께서 살해당하시던 그 환영은, 마탑주가 꾸며 낸 수작에 불과할 터였다.
자신이 여태까지 존속 살해범을 주군으로 모셔왔던 것일 리 없었다.
“모두 새빨간 거짓말이다. 전 기사들이여, 저 반역도들을 당장 제압하라!”
“새빨간 거짓말이라니.”
그때 또 다른 목소리가 끼어들었다.
“아까 분명 설명을 다 드리지 않았나요? 이해하신 줄로 알았었는데.”
이 상황에도 여유 넘치는 목소리에 보리스는 진절머리를 쳤다. 이번에도 마탑주였다.
“아무리 저라고 해도 저렇게 거대한 환상을 만들어 내는 건 불가능하다고 말씀드렸잖습니까. 그게 가능했다면, 전쟁터는 마법사들만 판치는 곳이 됐겠죠? 소드 마스터도 필요 없어지겠군요. 검을 잘 쓰면 뭘 합니까? 환영 속에 가둬 버리면 되는 것을.”
어린아이 가르치는 듯한 말투에 보리스는 조금 울컥하는 기분이 들었다. 하지만 물론 그렇다 해서 따지고 들 수는 없었다.
“마법이라는 것이 대단하긴 하지만 기적을 부릴 수 있는 건 아닙니다. 그러니, 내 말은.”
마탑주가 한 박자 쉰 뒤 말을 이었다.
“방금 당신들이 본 환영은, 모든 게 진실된 과거 그 자체였다는 겁니다.”
“나의 기사들이여.”
라시드가 끓는 듯한 눈으로 마탑주를 노려보았다.
“저 간악한 뱀 같은 혓바닥을 당장 멈추게 해라!”
잠시 정적이 일었다.
보리스는 마탑주에게 달려들지 않는 제 다리를 바라보며 당황했다.
황제의 명령이었다. 무슨 일이 있어도 복종해야만 했다.
하지만 좀처럼 다리가 말을 듣지 않았다.
이안이나 마탑주에 대한 두려움 때문이 아니었다.
보리스는 흔들리는 눈으로 황제를 바라보았다. 동료 기사들 역시 마찬가지였다.
심지어는 근위대장마저, 명령에 복종하지 못하고 석상처럼 굳어 있었다.
마탑주의 말에는 신빙성이 있었다. 지나치리만큼.
그리고, 그의 말이 사실이라는 것은 곧.
‘정말 선황 폐하를 살해한 것이…….’
“……이놈들.”
황제가 찢어발길 듯 주위를 한 바퀴 노려보았다.
“설마, 지금. 저 협잡꾼의 말을 믿고 있는 건 아니겠지?”
아니라고 답해야 했다. 살고 싶다면.
그러나 이번에도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마법에는 문외한인 보리스지만, 그럼에도 조금 전 마탑주가 한 말이 사실이라는 것은 알고 있었다.
마법은 놀라운 일들을 행할 수 있지만 전지전능하진 않았다.
방금 두 눈으로 환영을 똑똑히 본 입장이기에, 보리스는 더더욱 확신할 수 있었다.
그만큼 생생한 환영은 고작 마법으로 만들어 낼 수 있는 경지가 아니라는 것을.
“……감히.”
황제가 낮게 으르렁거렸다.
“날 의심하는 것이냐? 황제의 기사인 너희들이, 감히 나를? 네놈들의 주군인 나를!”
노성이 공기를 갈랐다.
“무서운 줄 모르고 날 똑바로 쳐다보는 네놈들의 눈알을 하나하나 뽑아 놓고 싶구나! 하지만 마지막으로 기회를 주겠다. 저 역도들을, 당장 내 앞에 무릎 꿇려라!”
황제의 명령엔 거역하기 힘든 압박감을 띠고 있었다. 날 때부터 황족이었던 자 특유의.
더 이상 지체했다간, 명령 불복종으로 목이 달아난다.
목숨의 위협을 느낀 보리스가 마침내 적들을 향해 달려들려던 순간이었다.
“하…… 한 가지만.”
떨리는 목소리에 보리스의 몸이 멈칫했다.
목소리의 주인공을 돌아본 보리스는 눈을 크게 떴다.
가장 연로한 기사, 아더가 황제 앞에 털썩 무릎 꿇고 간청했다.
“한 가지만 대답해 주십시오.”
“내게 감히 요구를 하다니. 미친 게냐?”
들끓는 황제의 노성에 아더가 움찔했지만, 깊이 머리를 조아린 그는 말을 이었다.
“그날! 선황 폐하께서 승하하시던 날…… 어째서 직접 그분의 시신을 수습하신 겁니까?”
“……!”
처음 듣는 이야기에 보리스는 멍하니 아더를 바라보았다.
아더가 계속해서 말했다. 오래 묵었던 것을 한 번에 쏟아 내듯이.
“아시다시피 저희 레하트 제국은, 망자께서 가시는 길 마지막으로 관 속에서 그분을 뵙는 것이 관례입니다. 하지만 폐하께서는 누구도 접근하지 못하도록 관을 개방하지 않으셨지요. 심지어는 황후 폐하마저 그분 마지막 가시는 길을 배웅하지 못하셨습니다. ……어째서 그리도 완고히 막으신 겁니까?”
“선황 폐하께서는 심각한 병환에 걸려 계셨다.”
황제가 으득 이를 갈며 말했다.
“시신에서도 옮을 수 있을 만큼 전염성이 강력한 병이었지. 당시 마수로부터 사람에게 옮아 대륙 전체가 뒤집어졌던 그 병을 잊었다고 하진 않을 텐데.”
보리스 역시 선황이 어떻게 타계했는지 기억하고 있었다.
초로의 나이임에도 정정했던 선황은, 직접 마수와의 전쟁터에 나서 기사들에게 본보기가 되는 일이 잦았다.
그러던 중 마수에게서 병이 옮아 그대로 사망하고 말았다는 것이 세간에 알려진 이야기였다.
“경은 내가, 아바마마를 배웅해야 한다는 이유로 백성들을 병에 노출되게 만들었어야 했다는 건가?”
“……황제 폐하.”
이제 거의 이마가 땅에 닿도록 머리를 조아린 아더가 말했다.
“지금으로부터 오 년 전, ‘전사들의 안식처’에 도굴범이 들었던 사건을 기억하실 겁니다.”
전사들의 안식처란 역대 황제들의 유해가 모셔져 있는 장소를 말했다.
레하트 제국에는 관을 묻을 때, 고인이 생전 아끼던 물건을 함께 묻는 풍습이 있었다. 그 탓에 역대 황제들의 관에는 상상도 못 할 보물들이 함께 묻혀 있다는 소문이 떠돌아다녔다.
오 년 전, 바로 그곳에 도굴꾼이 침입한 적이 있었다.
당대 최고의 대도를 자청하던 그 도굴꾼은, ‘전사들의 안식처’에 침입했다가 발각되어 화형당해 죽었다.
이젠 많은 이의 기억에서 잊힌 그 사건을 되짚은 아더가 덜덜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그때, 붙잡히기 전 도굴꾼이 퍼뜨렸던 소문이 있습니다. ……선황 폐하의 무덤 속에는 시신 대신 보물만이 가득했다고요.”
보리스는 눈을 부릅떴다.
그런 소문이 있는 줄 그는 미처 알지 못했었다.
“물론 한낱 도굴꾼의 말을 믿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부디 이 질문에만 답을 내려 주십시오. ……선황 폐하의 시신은 안식처에 묻혀 계신 것이 맞습니까?”
“……네놈이.”
스릉. 섬뜩한 소리가 귓가를 찔렀다.
허리춤에서 검을 뽑은 황제가 아더를 겨누었다.
“네놈이, 감히 내게 의문을 갖다니. 주군을 믿지 못하는 개는 필요 없다.”
“폐, 폐하!”
당장이라도 황제의 검이 아더를 내리칠 것 같았다. 또 다른 기사가 황급히 달려들었다.
“요, 용서해 주십시오. 아더 경이 그간 바친 충성을 생각하셔서라도!”
“나이가 들더니 머리가 상한 모양이구나. 쓸모없어진 개는 내쳐야-”
“목격자가 있습니다, 폐하!”
질끈 눈 감은 아더가 외쳤다.
“선황 폐하께서 승하하시던 날, 황궁으로 심부름 왔다가 길 잃은 제 친우가 이상한 것을 목격했었습니다. 은색 머리를 한 소년이 목 달아난 시체를 업은 채 달아나고 있었다고요!”
“……뭐?”
황제가 커다래진 눈으로 이안을 돌아보았다. 믿을 수 없다는 듯한 경악이 그의 눈동자에 스쳤다.
이안은 아무런 말도 하지 않은 채, 그저 아더를 내려다볼 뿐이었다.
“잘못 본 것이리라 생각했습니다. 황궁에서는 본 것도 못 본 척해야 한다고, 입단속 잘하라 경고했었지요! 하지만, 방금 제가 본 환영이 사실이라면……! 폐하! 대답해 주십시오!”
아더가 들끓는 목소리로 외쳤다.
“그날 제 친우가 보았던 목 없는 시체는, 선황 폐하였던 것이 맞습니까!”
“…….”
잠시 말 없던 황제가 입을 열었다.
“네놈들이 단체로 이성을 상실했구나.”
“폐하……!”
“감히 내게 해명을 요구해? 나는 이 제국의 주인이자 네놈들의 목줄을 쥔 주군이다!”
황제를 바라보는 기사들의 눈에 혼란이 가득했다.
그들의 시선은 모두 황제를 향하고 있었다. 적인 이안이나 마탑주가 아니라.
그 모습을 둘러본 황제는 광소를 터뜨리기 시작했다.
“이 주제도 모르는 배은망덕한 것들. 그래, 네놈들이 기어코 나를 의심하겠다는 게냐? 좋다! 배신의 대가가 뭔지, 똑똑히 보여 주도록 하지!”
“폐, 폐하…….”
“미개한 놈들. 이곳은 황궁, 레하트 제국의 주인인 내 영역이다. 그리고 이건 결코 단순한 의미가 아니지.”
황제의 눈이 광기로 번들거렸다.
제 왼손에 손을 댄 황제가 말했다.
“이 시간부로, 황궁에 1급 결계 마법을 발동하겠다.”
그 말과 동시에 황제의 왼손에 끼워진 반지에서 붉은빛이 솟아올랐다.
빛은 먹구름 낀 하늘을 향해 수직으로 쏘아지더니, 황궁을 감싸듯 크게 퍼지고는 곧 시야에서 사라졌다.
그 광경에 보리스는 눈을 부릅떴다.
‘1급 결계 마법.’
저 마법이 발동되는 모습을 보는 건 황궁에 입단한 이래 처음이었다.
1급 결계 마법은, 전쟁에 대비해 황궁에 아주 예전부터 설치되어 있던 고대의 마법이었다.
효력은 간단했다. 황궁을 개미 한 마리조차 들어오지도, 나가지도 못하게 하는 것. 간단한 만큼 강력한 방어 마법이었다.
황제가 킥킥거리고 웃었다.
“복원 마법이든 뭐든 상관없다. 결과적으로, 이 시간 이후 그걸 본 자는 아무도 없게 될 테니.”
그 말에 보리스는 머리끝까지 소름이 끼치는 것을 느꼈다.
보리스는 바보가 아니었다. 그는 단번에 황제의 말을 이해할 수 있었다.
환영을 본 자가 아무도 없게 될 거라는 말은, 즉…….
‘우릴 모두 살려 두지 않으려는 거야.’
보리스는 직감했다.
1급 결계 마법이 해제되더라도, 자신들은 앞으로 영영 황궁을 나서지 못하리라는 것을.
‘말도 안 돼.’
절망이 보리스를 덮쳤다.
그는 이 상황을 믿을 수가 없었다.
황제가, 평생 동안 모셔온 주군이 해명 한마디 없이 자신들을 짓뭉개려 하고 있었다.
‘아니, 해명하지 않으려는 게 아니라…… 해명할 수가 없는 거겠지.’
보리스는 마침내 깨달을 수밖에 없었다.
자신이 여태껏 몸 바쳐 지켜 온 황제가, 실은 지옥에서도 받아 주지 않을 존속 살해범이었다는 사실을.
차오르는 배신감과 분노에 보리스의 몸이 부들부들 떨렸다.
“형님께서는, 십 년 전이나 지금이나 달라진 것이 없군요.”
이안의 담담한 목소리가 허공을 갈랐다.
“이곳에 있는 자들만 처리하면 된다 여기십니까? 폐하. 손으로 해를 가릴 수 없듯이 진실 역시 그렇습니다. 내가 그날 아버지의 시체를 목격한 것처럼.”
“……뭐?”
황제의 얼굴에 당황이 스쳤다.
“하늘이 알고 땅이 안다는 옛말이 있죠.”
서릿발처럼 차디찬 목소리로 이안이 말했다.
“땅의 눈을 가려도 하늘까지 가리긴 힘들 겁니다, 폐하.”
“하하, 하.”
황제가 비웃었다.
“궁지에 몰리니 너도 헛소리를 내뱉는구나. 볼썽사납다, 아우야.”
“보십시오.”
그렇게 말하며 이안이 창공을 가리켰다.
덩달아 하늘을 향해 고개 젖힌 보리스는, 순간 제가 꿈을 꾸고 있나 생각했다.
‘……어?’
내내 하늘을 메우고 있던 먹구름이 꾸물거리며 움직였다.
보리스는 눈을 부릅떴다.
갈라지는 먹구름 너머로, 웬 섬 형체의 무언가가 거대한 달처럼 하늘을 가리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