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23화 (123/161)

123화

“보지 않아도 돼요.”

성녀가 말했다.

“세 번이나 볼 필요는 없잖아. ……네?”

성녀의 목소리에는 숨 가쁜 안타까움이 담겨 있었다.

이 와중에도 듣는 보리스의 피부가 간질거려 올 만큼.

“아이린. 나는 이제.”

성기사단장이 제 손목에 감긴 성녀의 손등을 쥐며 말했다.

“나는 이제 당신이 본 그 어린아이가 아닙니다.”

성녀의 눈이 커졌다.

“……역시, 기억하고 있군요. 당신도.”

“기억을 어떻게 못 하겠습니까.”

보리스는 순간 제 눈을 믿지 못했다.

늘 얼음상 같기만 하던 성기사단장의 입가에 나지막한 미소가 걸쳐지는 것을 목격했기 때문이다.

“기절해 있는 동안, 곁에서 그렇게 끊임없이 훌쩍임 소리가 들렸는데.”

“……무슨 말씀이세요. 아무리 그래도 운 적은 없어요.”

대체 무슨 대화를 나누고 있는 걸까, 저 두 사람은.

사방이 혼란스러운 와중에 둘은 자신들만의 이야기를 주고받고 있었다.

그 모습을 지켜보고 있는 보리스마저 귀를 기울이게 될 만큼.

“고맙습니다.”

아이린의 손등을 부드럽게 놓으며 이안이 말했다.

“그대 덕분에 과거를 피하지 않고 마주할 수 있게 되었으니.”

그렇게 말하며 이안이 이 층을 올려다보았다.

그곳에선 호위해 줄 기사들을 모두 잃은 선황이 망연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그게 무슨, 쿨럭, 말이냐.]

선황의 환영이 힘겹게 말을 이었다.

[내 아들이 사주했다니……!]

[말 그대로인데요, 폐하. 아니, 이제 곧 선황 폐하가 되시겠군! 아들에게 황위를 물려줄 테니 말이야.]

“뭣들 하고 있는 거냐!”

귓가를 쩌렁쩌렁 울리는 황제의 외침에 보리스는 깜짝 놀랐다.

그래. 지금은 다른 곳에 정신을 팔고 있을 때가 아니었다.

일단 황제의 명령대로, 이 환영을 멈추는 일이 최우선이었다. 그러지 못했다간 목이 달아날 수도 있었다.

“이만한 환영 마법을 유지하려면 반드시 매개가 되는 마도구가 있을 것이다! 그걸 찾아라! 멀지 않은 곳에 있을 거다!”

근위대장이 명령했다. 기사들이 빠르게 흩어졌다.

그 모습을 바라보면서도 마탑주의 입가에서는 미소가 사라지지 않았다.

“힘내 보십시오! 웬만해서는 찾기 힘들겠지만 말입니다.”

‘저 인간은 대체 뭐지?’

다급한 와중에도 보리스는 황당함을 감출 수 없었다.

마탑주가 대놓고 조롱하고 있으니 사기가 많이 꺾였지만, 그럼에도 보리스는 최선을 다해 주변을 뒤졌다.

그 와중에도 환영은 계속해서 재생되었다.

[자길 죽여 달라고 억만금을 내놓은 범인에게 황관을 물려줘야 한다니, 나 같으면 죽어도 눈이 안 감기겠구만.]

저속한 낄낄거림 소리가 들렸다. 보리스는 저도 모르게 흘긋 이 층으로 시선을 돌렸다.

선황의 환영이 격렬히 기침하면서도 고개 젓는 모습이 보였다.

[그럴, 쿨럭, 리가. 말도 안 되는 모함을……! 왜 그런 짓을 라시드가-]

선황의 환영이 거기까지 말한 순간이었다.

지직, 지지직!

귀를 찌르는 잡음과 함께 유령 궁전이 통째로 흔들렸다.

“매개체를 찾았습니다, 폐하!”

근위대장의 다급한 목소리가 들렸다. 보리스가 그쪽을 돌아보자, 궁전 밖 나무를 파헤친 근위대장이 웬 빛나는 돌멩이를 검으로 내리찍고 있는 것이 보였다.

캉, 캉!

근위대장의 검이 돌멩이를 찍을 때마다 눈부신 불꽃이 튀었다. 동시에 환영도 심하게 지직거렸다.

“하…… 무식하기도 하지. 저게 얼마짜린데.”

마탑주가 짜증 난다는 듯 인상을 찌푸렸다. 그 모습에 보리스는 근위대장이 제대로 된 매개를 찾았다는 것을 직감했다.

‘그렇다면 우리의 승리다!’

“이거 죄송합니다. 중요한 장면에서 끊겨 버렸군요.”

보리스가 승리를 확신한 순간, 마탑주가 유유자적이 사과해 왔다.

‘뭐지?’

패자가 저리도 아무렇지 않게 사과해 오자 오히려 찜찜한 마음이 들었다.

마탑주가 가면 아래에서 빙긋이 웃었다.

“하지만, 중요한 장면까지는 모두 상영되었으니 상관없겠죠. 그렇지 않나요?”

중요한 장면?

그제야 보리스는 아까부터 머릿속을 맴돌던 위화감을 제대로 느꼈다.

다급히 매개를 찾느라 한동안 머리를 굴리지 못했지만, 생각해 보니 환영은 아주 이상한 내용을 재생하고 있었다.

‘그 괴한들의 말에 의하면, 선황 폐하의 살해를 사주한 것이…….’

선황의 아들이자, 다음 황위를 물려받을 인물.

즉, 현 황제인 라시드라는 이야기였다.

‘마, 말도 안 돼.’

보리스는 황급히 불경한 생각을 털어내었다.

그러나 비슷한 사고 회로를 거친 것은 보리스뿐만이 아닌지, 다른 기사들의 표정 역시 굳어 있는 것이 보였다.

“…….”

근위대장이 돌멩이를 찍는 소리, 그리고 환영이 지직거리는 소리.

소란스러운 와중에도 기사들 사이에는 기묘한 정적이 흘렀다.

기사들의 시선이 한곳을 향했다.

황제가 서 있는 방향이었다.

“하.”

시선을 한몸에 받은 황제가 날카롭게 헛웃음을 내뱉었다.

“더러운 마술사 나부랭이가 되지도 않는 짓거리를 벌였군.”

“마술사 나부랭이라니…….”

폭언에 마탑주가 불편한 듯 팔짱 꼈다.

황제가 무시무시한 눈으로 그런 마탑주를 노려보았다.

“내 동생, 아니. 저 반역도가 마탑에 의뢰를 한 모양이지? 저따위 같잖은 환영을 말이다!”

“외람되오나 폐하, 저는 물론 역대급으로 출중한 재능의 소유자이기는 하지만.”

팔짱을 낀 채 마탑주가 삐딱하게 말했다.

“아무런 근거도 없이 이렇게 거대한 환영 마법을 재생하는 건, 아무리 저라고 해도 힘들답니다. 성마석의 도움이 있다 해도 말이지요. 제가 행한 마법의 이름은, 정확히 말하면.”

마탑주가 어깨를 으쓱이며 말을 이었다.

“환영이 아닌, 복원 마법입니다.”

복원 마법?

보리스는 눈을 커다랗게 떴다.

마법에 큰 지식이 없는 보리스지만 복원 마법의 존재는 알고 있었다.

보리스가 어렸을 때, 수도를 떠들썩하게 했던 미제 살인 사건이 복원 마법의 힘으로 해결되었던 적이 있었다.

‘장소가 가지고 있는 실제 사건의 기억을, 환영으로 재생하는 마법이잖아.’

그 말인즉…….

보리스는 멍하니 유령 궁전을 둘러보았다.

방금 이 유령 궁전 안에서 벌어진 환영은, 모두 실제 과거였다는 이야기가 되었다.

과거처럼 보이는 환영이 아니라, 진짜 과거 그 자체였던 것이다.

보리스는 두려운 눈으로 황제를 돌아보았다.

‘그렇다는 건, 정말로 선황 폐하의 시해범이…….’

“같잖은 모함을 꾸몄군!”

황제가 분노한 목소리로 외쳤다.

“아주 공들였구나, 아우야. 마탑주까지 동원한 사기극이라니! 네가 얼마나 오랫동안 이 역모를 준비했는지는 잘 알겠다. 네 추악한 야심을 이제야 알게 됐구나. 기사들이여!”

황제가 이안을 가리켰다.

“저 반역도를 내 앞에 끌고 와라!”

지고한 황제의 명령.

그러나, 이 순간 기사들은 그 자리에서 얼어붙은 듯 누구도 움직이지 않았다.

“폐하.”

근위대장마저 더 이상 돌멩이를 내려찍지 않았다. 마탑주가 정지한 건지 환영도 더 이상은 재생되지 않았다.

숨 막히는 정적 한가운데에서 이안이 입을 열었다.

“알고 계시지 않습니까? 복원 마법이 재생하는 환영은 조작할 수 없다는 것을.”

느릿한 어투로 이안이 말을 이었다.

“그렇기에 그 마법이 제국 법정에서도 정식 증거로 채택될 만큼 신빙성을 지니고 있는 것이지요.”

이안의 말은, 단 하나도 틀린 것이 없었다.

복원 마법은 조작될 수 없다. 단순히 시전자가 이리저리 꾸며 낼 수 있는 마법이었다면, 아무도 그것을 믿지 않았을 것이다.

“궤변이 역겨울 정도구나.”

황제가 차갑게 이죽거렸다.

“네놈들 말대로라면, 아바마마께서 돌아가시게 된 원인이…… 그분의 친아들인, 나였다는 이야기인데.”

음산한 목소리에 보리스의 어깨가 굳었다.

황제가 입에 담은 것은, 감히 상상해 본 적도 없는 존속 살인의 가능성.

행여나 의심해 보았다는 걸 들키기만 해도 황족 모독죄로 감옥에 끌려갈 만큼 끔찍한 가능성이었다.

‘말도 안 돼. 암. 말도 안 되지.’

보리스가 모셔 온 황제는 물론 괴팍하고 잔인한 면모를 보일 때도 많았지만, 아무리 그래도 살인 청부 집단에 제 친아버지의 죽음을 의뢰할 만큼의 인간 말종은 아니었다.

……아닐 터였다. 아마도.

보리스는 잠시 황제의 기분을 거슬렀다는 약간의 잘못만으로 황궁 감옥에 끌려가 고문받거나 행방을 알 수 없게 된 이들을 떠올렸다.

그때는 억지로나마 납득했었다. 모두의 머리 꼭대기에 오른, 만인지상의 자리에 앉은 이에게 그 정도의 잔인함은 어쩔 수 없는 것이라 여겼다.

‘게다가 황제 폐하께서는 날 때부터 명실공히 황위 제1 계승권자셨어. 조금만 기다리면 당연히 물려받을 황위를 위해 어째서 존속 살인을…….’

거기까지 생각한 보리스는 문득 옛일을 떠올렸다.

보리스가 어렸던 시절, 수도는 둘째 황자의 재능과 됨됨이에 대한 칭찬으로 떠들썩했었다.

벌써 아카데미 교수들조차 혀를 내두를 만큼 학문에 능하다느니, 다음 소드 마스터에 가장 근접한 인재라느니.

어린 보리스가 또래에 대한 선망과 치기 어린 질투로 밤을 지새울 만큼 그런 칭찬들이 세상에 가득했었다.

그러던 어느 날 보리스는 우연히 둘째 황자를 직접 목격할 기회가 있었다.

운 좋게 가까이서 마주한 둘째 황자는, 찬연하게 빛나고 있었다. 그를 비추는 햇살이 무색하리만큼.

반듯한 외모와 타고난 기품, 또래라고는 믿기 힘든 검 실력과, 차가워 보이지만 결코 오만하지는 않은 태도.

어린 마음에 또래 소년에게 남몰래 품고 있던 열등감조차도 그를 본 순간 눈 녹듯 사라져 버렸다.

그때 어린 보리스는 생각했었다.

만약 저렇게 빛나는 사람을 주군으로 모실 수 있다면, 그건 기사로서 더없는 영광일 것 같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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