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1화
“나가지 마세요. 이곳에 계시는 게 좋을 겁니다, 고객님.”
“네? 어째서죠?”
리젤로는 입을 다물고 대답하지 않았다.
그 모습에 본능적인 확신이 나를 덮쳤다. 이 밖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다는 확신이.
섬뜩한 예감에 나는 자리를 박차고 나섰다.
임시 천막 문을 걷고 나가자마자 먼저 보인 것은, 이제 익숙해진 뒷모습이었다. 은발이 흩날리는 뒤통수와 넓고 단단한 어깨.
그 모습을 보자마자 이상할 만큼 가슴이 북받쳐 올랐다.
“이안!”
무사하구나.
스스로 인식하지 못한 새 발걸음이 먼저 움직였다. 몇 걸음을 달음박질친 순간이었다.
어떻게 안 건지 이안의 시선이 정확히 내가 있는 곳을 돌아보았다.
푸른 눈동자와 시선을 마주치자마자 나는 흠칫 굳었다. 그 눈이 뜻하는 바는 명백했다.
‘거기 있어.’
나는 그제야 이안 너머로 펼쳐진 광경을 바라보았다.
황제 휘하의 근위 기사들이 부채꼴로 펼쳐져 있었다.
그 가운데에는 당연하게도, 라시드가 당당하면서도 오연한 자태로 자리해 있었다. 나는 입술을 깨물었다.
‘벌써 발각됐구나.’
아직 복원 마법이 완성되지 않은 시점이었다. 황제가 생각보다 일찍 도착한 것은 좋지 않은 징조였다.
“이게 누구야.”
황제가 이안을 향해 느긋이 발걸음을 옮겼다.
“친애하는 아우님이 아닌가.”
오만히 입꼬리를 끌어올리며 황제가 말했다.
“용건이 있었다면 이 형님께 미리 언질이라도 주고 방문하지 그랬나? 융숭히 대접했을 터인데 말이지.”
황제의 기사들과 성기사들 사이 보이지 않는 경계가 팽팽했다.
그 한가운데에서 황제가 유일하게 유유자적한 목소리로 말했다.
“갑자기 옛 생각이라도 나더냐? 어린 시절을 보냈던 궁을 다 찾고. 이곳은 금지된 구역이지만, 내게 부탁만 했다면 네게는 얼마든지 개방했을 텐데. 괜한 수고를 하였구나.”
성기사들을 천천히 둘러보며 황제가 이죽거렸다.
“그랬다면 이렇게 칼잡이들을 무더기로 데려올 필요도 없었을 터인데.”
노골적인 모욕에 성기사들이 검을 고쳐 쥐었다. 공기를 가득 메운 긴장감에 한층 더 날이 섰다.
돌연 표정을 굳힌 황제가 이안을 노려보았다.
“아무리 너라 해도 국법은 국법. 무장 병력을 이끌고 황궁의 금지된 구역을 침투한 죄, 결코 가볍진 않을 거다. ……하지만, 너는 내 친동생이지.”
황제의 목소리가 이번엔 어르듯 부드러워졌다.
“황족을 다른 백성과 똑같은 규율로 다스릴 수는 없는 법. 자. 그러니 말해 보아라.”
떠보듯 이안을 훑어보며 황제가 말했다.
“이곳까지는 무슨 용건으로 찾아왔지?”
목소리는 회유하는 사람처럼 부드럽지만, 황제의 눈은 이안을 날카롭게 뜯어보고 있었다.
그 모습을 바라보며 나는 깨달았다.
‘확신하지 못하고 있구나, 황제는.’
이안이 이 장소에 온 이유가 무엇일지, 아직 완벽히 확신하지 못한 것이다.
어쩌면 당연한 일일지도 몰랐다.
황제에게 선황이 죽던 날의 일은, 오직 공범인 나인과만 공유한 비밀일 테니까.
“대답하지 않겠다면.”
황제가 쯧 혀를 차며 말했다.
“안타깝지만 여기서 널 국법으로 다스릴 수밖에 없겠구나. 마지막 기회다. 성기사들까지 데리고 이곳에 온 이유를 말해.”
이안이 담담히 입을 열었다.
“잊고 있던 것을, 떠올려 내는 바람에.”
그렇게 말하는 이안의 옆얼굴은 바람 한 조각 들어가지 않을 만큼 단단해 보였다. 수천 번 담금질한 쇠처럼.
가족과 친한 이를 잃은 슬픔에 앓던 소년은 이제 어디에도 보이지 않았다.
“되짚어야 할 것을 되짚어보러 왔습니다.”
그 말에 황제의 얼굴이 귀신처럼 차게 굳었다.
“잊고 있던 것? ……새삼스레 유아 퇴행이 도진 모양이구나. 어렸을 적 타고 놀던 그네라도 그리워진 모양이지?”
“글쎄. 형님께서도 굳이 설명이 필요하진 않으실 텐데요.”
“…….”
“내가 무엇을 되갚으러 왔는지.”
그 말에 황제가 눈을 부릅떴다.
“되갚겠다?”
분노로 황제의 눈이 탁하게 가라앉았다.
“못 본 새, 건방지기 짝이 없어졌구나. 해도 되는 말과 하면 안 되는 말 정도는 구분할 나이가 되지 않았느냐?”
낮고 무거운 목소리로 황제가 노성을 토했다.
“이곳이 어딘 줄 아는 거냐. 나 라시드, 레하트 제국 황제의 영역이다! 감히 내 영역에 함부로 발을 들여놓고 고작 댄다는 변명이 그따위 것이라니.”
이제 라시드는 깨달았을 것이다.
이안이 선황 시해의 밤에 대한 진실을 알고 있다는 걸.
비밀이 어디서 새어 나갔을지, 이안이 어떻게 알게 된 것일지.
의문과 불안으로 지금 황제의 머릿속은 소용돌이가 치고 있겠지.
처음으로 권좌를 침범당해 분노한 야수의 얼굴로 황제가 이를 드러냈다.
“무슨 수작인지는 모르겠지만, 아우야. 네가 붙들어 놓았던 귀족들은 모두 황궁을 떠났다.”
그 말에 나는 표정을 굳혔다.
그래. 벌써 귀족들이 떠났구나.
이또한 좋은 징조는 아니었다. 나는 그들이 더 오래 자리를 지켜 주기를 기대했었으니까. 그렇지 않았다면 굳이 그 창피를 감당하며 예지 연기를 하지도 않았을 것이다.
“황궁을 덮친 마물, 네가 불러온 놈이지?”
그 말에, 지금까지의 대화를 이해하지 못했던 근위 기사들이 충격받은 표정을 지었다.
이안은 긍정도, 부정도 하지 않았다. 황제가 눈을 번득이며 비웃었다.
“설마 했는데, 내 주의를 교란한 뒤 이런 짓을 벌이고 있었던 것을 보니 확실해지는구나. 백성들을 지키는 검이라는 네가 감히 이런 짓을 하다니.”
이안은 여전히 아무런 부정도 하지 않았다.
이안을 바라보는 근위 기사들의 눈빛에 당혹과 배신감이 어렸다.
황제의 명령으로 이안에게 검을 겨누고는 있지만 그중 상당수는 이 상황을 납득하지 못했던 모양이었다. 몇 초 전까지는.
하지만 이제는 상황이 달라졌다. 이제 근위 기사들의 눈앞에 있는 건 존경받는 성기사단장이 아닌, 귀족들과 황제를 위험에 처하게 한 악당이었다.
명분이 주어지자 이안을 맞서는 근위 기사들의 눈이 한층 날카로워졌다.
“마물 역시 황궁 기사들의 손으로 처리했다. 네 기대와 달리 무고한 이들의 피는 한 방울도 나지 않았지.”
당당히 말하는 모습에 역겨움이 치밀어올랐다.
교란용으로 마물을 끌고 온 것은 사실이었지만, 마물이 죄 없는 사람들을 해치지 못하도록 이미 충분한 조치를 취해 둔 상황이었다.
무엇보다 이안이 직접 그놈에게 치명상을 입혀 놓았었다. 황궁 기사들이 손을 썼다고는 하지만, 정말 아주 미약한 손길에 불과했을 것이다.
“네가 무슨 음모를 꾸미고 있든, 전부 내 손에 파훼됐다는 이야기다. 그러니 결정해라, 아우야. 이 자리에서 즉결 처분을 받거나. 아니면, 무슨 수작을 꾸미고 있는 건지 실토하거나.”
“수작이라.”
이안이 고개를 기울였다.
“아직 모르는 척하고 있는 겁니까? 형님.”
뒤이은 말을 짐작하기라도 한 건지 황제의 표정이 돌덩이처럼 굳었다.
“내가 무엇을 되갚으러 온 건지, 이미 짐작하고도 남으셨을 텐데요. 뻔하지 않습니까.”
서늘하게 가라앉은 얼굴로 이안이 말을 이었다.
“내가 이 장소에 집착할 이유는 오로지 하나뿐이니.”
“하하, 하.”
황제가 실소를 흘렸다.
“가족인 줄 알았거늘, 너도 내 권좌를 탐내는 한낱 쥐새끼에 불과했군. 뭐. 상관없다.”
스산한 악의가 담긴 얼굴로 황제가 이안을 노려보았다.
“무슨 수작을 준비했든, 이 장소와 함께 통째로 묻어 버리면 그만이니까. ……내겐 그리 낯선 일도 아니거든.”
마지막 말에 이안의 눈이 짙푸른 빛으로 가라앉았다.
마침 하늘은 이안의 감정에 공명하듯, 짙게 드리운 먹구름으로 어두웠다. 금방이라도 빗방울이 흐를 듯 검고 무거운 구름 탓에 별도, 달도 보이지 않았다.
칠흑처럼 어두운 사위에서 기사들의 검이 내뿜는 예기가 빛을 발했다. 당장이라도 맞붙을 듯 근위 기사들과 성기사들의 검이 서로를 겨누었다.
“그래. 이곳을 너무 오래 내버려 두기는 했지.”
황제가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진작에 이렇게 했어야 했던 것을. ……기사들이여!”
제 기사들을 향해 황제가 외쳤다. 점화되기 직전의 긴장감이 꿈틀거렸다.
황제가 이안을 가리키며 포효했다.
“전원 돌격하-”
[끄아아아악!]
끔찍한 비명에 황제의 목소리가 묻혔다.
흠칫 놀란 기사들이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뒤이어 목소리가 계속해서 울렸다.
[네놈들은 누구냐! 여기가 어느 안전이라고!]
쩌렁쩌렁한 목소리에 귓가가 아팠다. 누군가 귀 바로 옆에 스피커를 틀어 둔 듯 요란한 소리였다.
“뭐야. 이게 무슨 소리지?”
황제가 찌푸린 얼굴로 외쳤다. 그 와중에도 목소리는 멈추지 않고 재생되었다.
[폐하. 어서 몸을 피하십시오!]
[이쪽입니다! 저희가 시간을 버는 동안, 어서!]
“저, 저기다!”
기사 한 명이 목놓아 외쳤다.
그쪽을 돌아본 나는 순간 넋을 잃었다.
“……아.”
조금 전까지 폐허에 불과했던 서궁이, 거짓말처럼 아름다운 옛 모습으로 돌아와 있었다.
여기저기서 멍한 신음이 터져 나왔다.
“이게 도대체 무슨…….”
귀신에 홀리기라도 한 듯 기사들의 표정에서 핏기가 가셨다.
그럴 만도 했다. 폐허였던 곳에서 순식간에 솟아난 아름다운 궁전은, 마치 진짜처럼 생생했으니까.
“헉. 저, 저길 보십시오!”
한 기사가 이 층을 가리켰다.
이 층은 마치 투명한 벽으로 이루어진 것처럼 안이 훤히 들여다보였다.
그 안에서 아비규환이 펼쳐져 있었다.
“저게 대체…….”
“전투가 벌어지고 있습니다!”
기사가 다급히 외쳤다.
나 역시 멍하니 서궁의 이 층을 올려다보았다. 이제 익숙해진 그 장소를.
이 층에서는 네 명의 기사가 중년 남성 한 명을 보호하듯 둘러싸고 있었다.
[폐하! 피하십시오!]
“폐하……?”
귓가를 울리는 소리에 기사들이 당황해서 중얼거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