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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8화 (118/161)

118화

나는 화들짝 놀라 이안을 돌아보았다.

“무슨 방법이라도 있어요?!”

“……정말 아무 대책도 없어 보이는 얼굴이군.”

나를 바라본 이안이 어처구니없다는 듯 말했다. 황제가 죽었다는 말을 들은 뒤부터 내내 표정이 사라져 있던 얼굴에 처음으로 떠오른 감정이었다.

“대체 넌 뭐지?”

“지금 그런 걸 물을 때예요?! 조금 뒤면 우리 둘, 사이 좋게 죽을 거라고요!”

“도와줘.”

나는 눈을 커다랗게 떴다.

살아생전 이안에게서 저 말을 듣게 될 줄은 몰랐으니까.

놀란 나와 달리 이안이 침착히 말을 이었다.

“그물에 담긴 마력이 내 성력을 차단하고 있다. 내 오른손이 그물에 닿지 않도록 도와줘.”

“네, 네. 알겠어요!”

나는 최선을 다해 이안의 부탁을 들어주기 위해 노력했다.

그러나 좀처럼 쉽지 않았다. 그물이 워낙 억센 데다가, 자체적으로 마법이 걸려 있는지 자꾸만 우리 몸을 더욱더 조여 왔기 때문이다.

“앞으로 일 분.”

이안이 나지막이 읊조렸다.

나는 이를 꾹 악물고 젖 먹던 힘까지 내뿜었다. 온몸이 부들부들 떨릴 정도로 용쓴 결과, 아주 미약하게나마 그물로부터 이안의 오른손을 격리시키는 데 성공할 수 있었다.

‘됐다!’

바로 그렇게 생각한 순간이었다.

밝은 빛이 시야를 가렸다.

그리고 동시에, 갑갑히 갇혀 있던 그물로부터 몸이 해방되는 감각이 느껴졌다.

“으앗!”

갑작스레 그물에서 벗어나게 된 내 몸이 바닥으로 쓰러졌다.

나는 어안이 벙벙해져 위를 올려다보았다가, 멍하니 입을 벌렸다.

‘아.’

당당히 선 이안의 오른손에, 커다랗고 하얗게 빛나는 검이 들려 있었다. 검신에는 그물의 잔해가 힘없이 걸려 있는 채였다.

나는 저 검의 정체를 단번에 깨달을 수 있었다. 일전, 인큐버스 앞에서 한 번 본 적이 있었으니까.

‘성검.’

차단된 성력이 돌아오자마자 아공간에서 성검을 뽑아낸 것이다.

“뭐 해? 삼십 초 남았다. 뛰어!”

이안의 날카로운 외침에 퍼뜩 정신이 돌아왔다.

나는 이안과 함께 냅다 지하실 계단을 뛰어 올라갔다.

일 층으로 올라가자마자 우릴 맞이한 것은 뜻밖의 광경이었다.

“전하!”

어느새 등장한 건지, 하인츠 경이 괴한들을 향해 검을 휘두르고 있었다. 이안의 뒤를 따라왔다가 휘말린 모양이었다.

“전하, 쿨럭! 괜찮으십니까!”

“제기랄, 빨리 제압해! 이십 초도 안 남았다고!”

지하실에서와 달리 괴한들의 목소리에 초조함이 가득했다.

동시에 궁 전체에서 미약한 떨림이 느껴지기 시작했다.

우르릉, 작게 천둥이 치는 듯한 소리와 함께 바닥이 덜덜 떨려 왔다. 정말 마법진이 가동되기 직전인 모양이었다.

“곧 폭발한다! 고작 중년 기사 한 명 제압 못 해서 뭐 하는…… 커억!”

닦달하던 마법사의 어깨에 발길질이 내리꽂혔다. 발의 주인공은 당연히 이안이었다.

풀썩 바닥으로 쓰러지는 동료를 바라보며 나머지 둘의 동공이 커졌다.

“뭐, 뭐야. 어떻게 나온 거지!”

“그딴 걸 궁금해할 때야! 나가야 한다고!”

그물총을 든 남자가 사색이 되어 외쳤다.

이대로 시간이 다 되어 궁전이 폭발해도, 저들을 도우러 달려오는 지원 병력은 없을 거다.

수틀리면 그냥 모두 이 궁과 함께 폭발하는 것도 암살을 지시한 이들에겐 나쁜 결과가 아닐 테니까.

그 점을 괴한들이라고 모르지는 않을 터였다. 괴한들의 표정에서 시시각각 핏기가 가셨다.

“젠장. 크억, 젠장!”

방금 발길질로 어깨가 나갔는지, 뒤틀린 팔을 붙잡으며 마법사가 욕설을 내뱉었다.

마법사가 이빨로 힘겹게 소매를 걷어붙였다. 왼팔에 마법진 문양이 어지럽게 그려져 있는 것이 보였다. 마법사가 그 위를 오른손바닥으로 눌렀다.

“뭐 하는 거야!”

“이대로라면 우리 다 죽는다고!”

괴한의 외침에 마법사가 비명처럼 답했다.

동시에 진동하던 소리가 거짓말처럼 멎었다.

나는 본능적으로 깨달았다.

‘마법진 가동을 멈춘 거야!’

일단 몇 초 안에 궁과 함께 온몸이 박살 나는 꼴은 피한 것이다.

괴한이 마법사를 힐난했다.

“미쳤냐?! 무슨 생각으로 계획을 중단했지?”

“이딴 곳에서 조각나고 싶진 않다고!”

“여기서 죽든, 계획을 망쳐서 윗분들에게 죽든 결과는 똑같아!”

“씨발, 이렇게 된 거 어쩔 수 없잖아!”

마법사가 뒤 돌아 이안을 죽일 듯 노려보며 말했다.

“길드에서 들이닥치기 전에, 다 죽이고 여길 뜨자고! 아무튼 폭발만 시키면 되는 거 아냐?”

그렇게 외친 마법사가 이번엔 반대쪽 소매를 걷어붙였다.

드러난 오른팔은, 커다란 하나의 문양만 그려져 있던 왼팔과 달리 다양한 문양들로 어지러웠다.

“죽여 버리겠어!”

마법사가 표독스레 외치며 그중 한 문양 위로 손바닥을 눌렀다.

그러자 마법사의 주변에서 불타는 구체 수 개가 나타나더니, 곧장 이안에게로 쏟아졌다.

“전하!”

하인츠 경이 쏜살처럼 달려와 이안의 앞을 가로막았다.

“크윽!”

검으로 불공을 막아 낸 하인츠 경이 침음을 뱉었다.

“제가 막는 동안 어서 빠져나가십시오!”

“아니, 시간은 내가 끌겠어.”

성검을 고쳐 쥐며 이안이 말했다.

“경부터 도망쳐서 지원 병력을 불러. 이놈들이 여기 또 무슨 마법을 심어 놓았을지 모르니.”

“말도 안 됩니다! 당연히 전하께서 먼저 도망치셔야지요. 시간 끄는 일을 왜 전하께서-”

“내가 더 강하니까.”

단칼에 하인츠 경의 말을 자른 이안이 씹어뱉듯 말했다.

“폐하께서 위독하실지도 모른다.”

“예?!”

“한시가 급해. 그러니 어서.”

하인츠 경이 이를 악물었다.

“함께 나가죠, 전하!”

이안과 하인츠 경이 서로 등을 맞대곤 적들과 대치했다.

괴한은 허리춤에 차고 있던 쌍검을 치켜들었고, 그물총 든 남자는 총을 다시금 이안에게 조준했다. 마법사 역시 또 다른 문양을 짚으며 마법을 시전했다.

안 그래도 독 안개로 자욱한 궁 안은, 순식간에 아수라장이 되었다.

아비규환 같은 전장 속에서, 칼 부딪히는 소리와 비명만이 들렸다.

“끄악!”

다행히 그 속에서 아직 이안의 비명이 들리진 않았다.

나는 덜덜 떨면서도 눈을 좁혀 간신히 눈앞을 분간했다. 저 너머, 성검으로 그물총 든 남자를 몰아붙이고 있는 이안이 보였다.

그 뒤를 괴한이 덮쳤지만 다행히 하인츠 경의 검이 괴한의 어깨를 먼저 그었다.

“크억!”

괴한이 비틀대며 어깨를 감쌌다. 베인 상처에서 피 보라가 뿜어져 나왔다.

“끄어…… 억!”

벌어진 상처 속으로 독 안개가 스며들어 갔다.

동료들이 손써 볼 새도 없이 괴한이 보랏빛 거품을 물며 쓰러졌다. 초점 없는 눈을 부릅뜬 채. 절명한 것 같았다.

“제기랄! 젠장, 젠장!”

마법사가 거칠게 외치며 로브 자락을 걷어붙이곤 왼쪽 허벅지 위 문양을 눌렀다. 그러자 불로 만들어진 화살이 현현하여 하인츠 경을 노렸다.

동시에 그물총 든 남자가 품속에서 침을 꺼내 이안을 겨냥했다.

“안 돼!”

나는 필사적으로 외치며 그물총 든 남자에게 달려들었다.

예상치 못한 개입이었는지 남자가 비틀대며 중심을 잃었다.

“뭐, 뭐야!”

남자가 던지려던 독침을 손에 쥔 채 허우적댔다.

검으로 불화살을 내치던 하인츠 경이 내 쪽을 바라보곤 당황한 목소리로 외쳤다.

“전하, 저 여잔 누굽니까?!”

“나도 몰라. 무시해!”

“무시하지 마! 살려 줘!”

이안의 목소리에 내가 버럭 외쳤다.

그물총을 든 남자가 독침의 타깃을 나로 바꿨다. 독침 쥔 손이 곧장 내게로 내리찍혔다.

“꺄아악!”

저 침에 정수리가 뚫려도 이상하지 않은 거리였다.

공포에 얼어붙은 나는 비명을 내질렀다.

그런데, 수 초가 지나도 머리를 파고드는 감각이 없었다.

“도무지 정체도, 쓸모도 모르겠군, 당신!”

검신으로 남자를 후려치며 이안이 외쳤다.

“나가서 비명이라도 질러 봐. 목청 하난 쓸 만한 것 같으니까!”

사나운 외침에 나는 반박 한 번 하지 못하고 엉금엉금 기듯이 물러났다.

이안의 말이 맞았다. 나는 여기서 할 수 있는 일이 아무것도 없었다. 지금 나의 최선은, 이 궁 밖으로 나가 누구에게라도 이 상황을 알리는 것이었다.

‘결계가 이중, 삼중으로 쳐져 있다고 들은 것 같지만…… 뭐라도 해 봐야지!’

그렇게 생각하며 후들후들 떨리는 다리로 몸을 일으킨 순간이었다.

“끄아아악!”

마법사의 비명이 들렸다.

돌아보자, 하인츠 경이 마침내 마법사를 제압하는 데 성공한 것이 보였다.

그물총 든 남자도 방금 이안이 처리한 참이었다. 이제 궁을 나서기만 하면 되었다.

“좋았어! 얼른 도망치죠!”

드디어 희망이 보였다.

나는 이안과 함께 궁을 빠져나가려 했다.

그러나 이안은 출구를 찾기는커녕, 위로 올라가는 계단을 향해 달려갔다.

“이안! 뭘 하는 거예요!”

목이 터져라 외쳤지만 돌아오는 대답은 없었다.

다만 머릿속에서 이안의 생각이 들려왔다.

[아바마마께서, 어쩌면 아직 이 안에.]

망할. 나는 이를 악물었다.

이안은 아직 선황이 살아 있을지도 모른다는 희망에 사로잡혀 있었다.

당연한 일이었다. 선황이 죽은 미래를 알고 있는 나와 달리, 이안은 그저 괴한이 제가 황제를 죽였노라 떠드는 것을 들은 게 전부였으니까.

하지만 이안이 이 위에 있을 선황의 시체를 확인하고 희망을 접도록 마냥 내버려 둘 수는 없었다.

‘곧 이놈들의 한패가 들이닥칠 거야.’

아까 분명 마법사가 외쳤었다. ‘길드에서 곧 들이닥칠’ 거라고. 그러기 전에 이곳을 벗어나야 했다.

“이안!”

그러나 날개라도 돋친 듯 빠르게 뛰쳐나가는 이안을 가로막을 순 없었다.

하는 수 없이 나는 이안의 뒤를 따라나섰다.

자욱한 독 안개 때문에 앞이 안 보이는데도 이안은 쏜살같이 잘도 뛰어다녔다.

순식간에 이 층 제일 안쪽까지 도달한 이안이, 커다랗고 화려해 보이는 문을 벌컥 열어젖혔다.

간신히 그를 따라잡은 나는 하마터면 이안의 등에 코를 부딪힐 뻔했다.

“이안! 얼른 여길 떠야…….”

황급히 외치던 내 말꼬리가 흐려졌다.

이안은 석고를 부은 듯, 그 자리에 그대로 굳어 있었다.

이안이 바라보는 방향을 함께 쳐다본 나는 그와 마찬가지로 굳어 버렸다.

널따란 방 한가운데에 커다란 침대가 놓여 있는 것이 보였다.

그리고, 그 침대 위 한 남자의 시체가 있었다.

‘아.’

내 손이 덜덜 떨렸다.

침대 위의 시체에는 목이 없었다.

원래부터 그랬다는 듯, 목 없는 시체가 평온한 자세로 침대 위에 누워 있었다.

나는 저 없어진 목의 행방을 알 것 같았다.

청부 살인 표적의 목을 가져가는 것은 나인의 전통적인 수법이었다.

‘목표를 죽였다는, 가장 확실한 증거니까.’

몇 초간 굳어 있던 이안이 침대로 다가갔다.

부검하듯 이안의 손이 목 없는 시체의 이곳저곳을 뒤졌다.

그러면 그럴수록 그의 얼굴에서 빛이 사라져 갔다.

사라지고 없는 목 위를 더듬으며 이안이 입술을 달싹였다.

“……폐하?”

그 속삭임에 나는 입술을 질끈 깨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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