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2화
“네? 보상이라니…….”
됐다!
속으로 환호하며 나는 일단 당황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그런 말씀 마세요. 저도 놀랐지만, 탑주님도 놀라셨겠죠. 차마 예상치 못했던 일이셨을 테니까요.”
‘예상치 못했던’에 강세를 팍팍 넣어 내가 말했다.
의도대로 리젤로의 눈썹이 살짝 굳었다. 자존심에 흠이 난 모양이었다.
이때다. 나는 박차를 가했다.
“따지고 보면 저희 둘 다 피해자인 셈이죠.”
“아뇨. 무슨 말씀이십니까.”
리젤로가 굳은 얼굴로 말했다.
“천공섬은 마땅히 제가 지켰어야 할 제 영역이었고, 고객님께서는 초대받은 손님이었습니다. 당연히 제가 보상해 드려야죠.”
“아…….”
“저를 더 부끄럽게 하지 마세요.”
그렇게 말하는 리젤로는 아주 진지해 보였다. 늘 어딘가 장난스러워 보이던 모습은 온데간데없었다.
음. 이쯤 하면 됐겠지?
나는 마지못한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시군요. 그렇게까지 말씀하신다면, 저도 받아들이겠어요.”
“감사합니다.”
“그래서, 보상안에 대해서 말인데요.”
보상으로 결론이 나자마자 나는 빠르게 태세 전환을 했다.
이안이 그런 나를 쳐다보며 묘한 표정을 지었다. 드디어 눈치라는 것이 생긴 모양이었다.
“탑주님께선 혹시 생각해 둔 것이 있으신가요?”
“어떤 걸 원하시나요? 금전? 보석? 뭘 요구하셔도 제 쪽에서 최대한 맞춰 드리겠습니다.”
“돈이라뇨. 그런 건 필요 없어요. 보석도, 이안 님께서 워낙 많이 사 주셔서……. 음. 뭐가 좋을까?”
나는 생각에 잠긴 척 이리저리 고개를 갸웃거렸다.
“아, 그렇지. 탑주님께서는 마법사시죠?”
“네? 예, 그렇죠.”
당연한 것을 지적당한 리젤로가 눈을 끔뻑였다.
나는 환히 웃으며 말했다.
“그러시면 특별한 의뢰도 들어주실 수 있겠네요!”
“아, 의뢰.”
주 종목을 만났다는 듯 리젤로의 눈이 반짝였다.
“고객님도 아시다시피 마탑에서는 다양한 의뢰를 수주하죠. 별것 아닌 심부름부터 위험천만한 고급 의뢰까지 다양합니다. 말씀만 해 주세요. 제가 무엇을 해 드리면 될까요?”
“으음, 흐으음…….”
나는 곤란하게 침음을 흘리다가, 조심스레 이야기했다.
“사실 원하는 게 있기는 한데요.”
“무엇인가요? 어서 말씀해 주세요!”
“난도가 조금, 있는 마법인 것으로 알고 있어서…….”
“고객님.”
리젤로가 황당한 얼굴을 했다.
“제 입으로 말하긴 그렇지만, 저는 마탑의 주인입니다. 다른 건 몰라도 마법에 관한 한 절 따라올 자는 대륙에 없죠.”
자기 입으로 말하긴 그렇다고 한 주제에 리젤로가 술술 잘도 말했다.
나는 곤혹스러운 표정으로 턱을 만지작거렸다.
“으음, 하지만…… 정말 어려운 마법이기는 할 거예요.”
“대체 무슨 마법이기에 그러시나요? 어서 말씀을 먼저 해 보세요.”
“그게…….”
조금 더 뜸을 들이며 나는 살짝 이안 쪽을 돌아보았다. 그는 이제 아예 기가 막히단 얼굴을 하고 있었다. 내 연기자적 재능은 이제 볼 만큼 봤으면서, 새삼스러운 반응이었다.
“복원 마법이라고, 알고 계시나요?”
마침내 이야기를 꺼내자 리젤로가 크게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입니다. 바로 몇 달 전에도 의뢰받은 전적이 있는걸요. 장소가 가지고 있는 기억을 환상으로 되풀이하고 싶으신 거지요?”
“네! 맞아요. 바로 그거예요. ……가능할까요?”
“고객님.”
리젤로가 정색했다.
“몇 번 더 말하게 하시나요. 제게 그 정도는 아무것도 아닙니다.”
“정말요? 그렇게까지 말씀해 주시니 마음이 놓이네요. 그런데, 이게…… 사실은, 장소가 조금 문제여서요.”
“장소요?”
“네에.”
곤란한 얼굴로 뜸 들이자 리젤로가 답답한 듯 어깨를 으쓱였다.
“어떤 장소이기에 그러시는 거죠. 황제의 침실에 침투해 달라는 의뢰는 아닐 것 아닌가요?”
“……음.”
아예 틀린 예시는 아니었기에 나는 애매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리젤로의 눈이 커다래졌다.
“……진심인가요, 고객님? 아니, 황제 폐하의 침실이 가진 기억을 봐서 뭐 하려고요?”
“아뇨, 아뇨. 그게 아니라.”
얼른 손사래 친 내가 말했다.
“부탁드리고 싶은 장소가 황궁인 것은 맞아요. 정확히 말하자면…….”
나는 구체적인 의뢰 내용을 털어놓기 시작했다.
리젤로의 표정이 시시각각 심각함을 더해 갔다.
* * *
“흠, 흐흠.”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마차 창밖을 내다보는데, 아네트가 웃으며 말을 걸어왔다.
“오늘 유달리 기분이 좋아 보이시네요, 아이린 님.”
“그래요? 날씨가 좋아서 그런가.”
진짜 이유는 따로 있었다.
리젤로와의 거래에 마침내 성공했기 때문이지.
내 의뢰 내용을 전부 들은 리젤로는, 십 분 동안이나 아무런 말이 없어 나를 불안하게 했다.
더 자존심을 긁었어야 했나, 아니면 더 죄책감을 자극했어야 했나.
후회하던 무렵 리젤로가 마침내 고개를 끄덕였었다. 복원 마법을 시전해 주겠다고.
‘심지어 무료로, 말이지.’
나는 검은 작살에 맞았던 가슴께를 문질러 보았다. 충격적인 사건이긴 했지만, 나름대로 전화위복이 된 걸지도 몰랐다.
“거리에 사람들이 북적거리네요.”
아네트 옆에 앉아 있던 셀리나가 감탄했다.
현재 우리가 타고 있는 마차는 고급 의상실이 밀집해 있기로 유명한 거리를 지나고 있었다. 거리는 잘 차려입은 신사 숙녀들로 가득해 활기가 넘쳤다.
“황궁 무도회가 곧이라 그런 모양이에요.”
아네트가 꿈꾸는 듯한 눈으로 말했다.
“매년 화려하기로 수도에 아주 정평이 난 무도회니까요.”
“정말인가요?”
셀리나가 호기심을 보이자 아네트는 신이 난 듯했다.
“그럼요. 무도회장 샹들리에엔 다이아몬드가 수백 개나 달려 있대요. 드레스는 다들 휘황찬란해서 눈 둘 곳도 없다고 하고, 음식도 전부 입에서 살살 녹는 것들뿐이라더군요.”
“와아…… 그런 곳에 초대받으시다니, 아이린 님은 역시 대단하세요!”
셀리나가 순수히 감탄했다. 나는 속으로 픽 웃음을 흘렸다.
‘정작 훗날 그런 곳에 밥 먹듯 가게 될 사람은 다름 아닌 너란다.’
아직 제 운명을 모르는 셀리나가 정신없이 차창 밖을 구경했다.
나는 넌지시 그런 그녀에게 말을 걸었다.
“어때요? 셀리나 양도 함께 가는 건.”
“네?”
“황궁 무도회 말이에요.”
“……네?”
설마 그 이야기일 줄은 생각도 못 했는지 셀리나가 멍하니 내게 고개를 돌렸다.
“아네트 양에겐 이미 함께 가자고 말해 놓았었어요. 셀리나 양도 같이 가면 더 재미있을 것 같은데. 어떤가요?”
“제, 제가요. 그런 곳에…… 정말요? 그래도 되나요?”
풋풋하기 그지없는 반응에 나는 속으로 웃음을 흘렸다.
“물론이죠. 으음, 혹시 불편하다면 다른 사람도 더 초대해 볼까요? 셀리나 양도 안면이 있는 사람…… 아! 예를 들면, 엘리엇 군이라거나?”
황궁 무도회는 화려한 만큼 로맨틱한 장소였다.
그런 장소에서 둘이 시간을 보내게 한다면, 원작에서처럼 사랑에 빠지는 것도 시간문제일 터였다.
‘물론 이번 황궁 무도회는 마냥 낭만적이기만 하지는 않겠지만…… 뭐, 아무튼.’
그런데 내가 넌지시 던져 본 아이디어에 셀리나가 대번에 질색했다.
“제가 그분과 안면이 있다고요? 딱히요.”
“어…… 요즘 꽤 시간을 자주 보내고 있다고 하지 않았던가요?”
아네트 말로는, 셀리나와 엘리엇이 복도에서 몇 번 대화 나누는 장면이 목격되었다고 했었다. 그래서 내심 굉장히 흐뭇해하고 있던 참이었다.
“네? 아뇨, 전혀요.”
그러나 셀리나가 정색했다.
하도 정색해서 사과를 해야 하나 생각될 정도였다.
“아, 그…… 래요? 왜, 왜일까? 엘리엇 군, 평판이 좋던데요. 셀리나 양과 나이대도 비슷하고! 둘이 잘 맞지 않을까요? 인상도 참 좋던데요.”
“저는 그런 인상, 정말 별로예요.”
“…….”
단호한 대답에 충격받은 나는 말을 잇지 못했다.
셀리나가 입술을 오물거리며 조그맣게 중얼거렸다.
“욕심내면 안 될 걸 욕심내다니…… 최악이야.”
“네? 뭐라고 했어요, 방금?”
“아, 아무것도 아니에요.”
허둥거리며 셀리나가 고개를 내저었다.
그때 갑자기 마차가 멈춰 섰다.
“도로에 마차가 너무 많나 봐요. 정체되어 있네요.”
차창 밖을 내다본 아네트가 상황을 설명해 주었다.
하는 수 없이 잠시 차창 밖이나 구경하는데, 문득 셀리나의 시선이 어느 한 곳에 고정되어 있는 것이 느껴졌다.
그곳에는 할머니와 놀고 있는 어린 여자아이의 모습이 보였다.
‘할머니 생각을 하고 있구나, 셀리나.’
셀리나는 유일한 가족이었던 할머니가 돌아가시면서 수도로 상경한 소녀였다.
할머니와 손녀를 보며 옛 기억이라도 떠오르는지, 셀리나의 시선은 그쪽에서 떨어질 줄을 몰랐다.
그때 갑자기 빗소리가 울렸다.
“어머. 소나기가 오네요?”
아네트의 말에 차창 밖을 내다보자, 갑작스러운 비에 사람들이 깜짝 놀라 달려가는 것이 보였다.
방금까지 벤치에 앉아 정답게 놀고 있던 할머니와 여자아이 역시 당황한 듯했다.
여자아이가 얼른 할머니를 데리고 비를 피하려 했지만, 할머니는 다리가 불편한 듯했다. 할머니가 쉽사리 움직이지 못하는 동안, 소나기가 순식간에 둘을 적셨다.
“아…….”
셀리나가 멍한 목소리를 냈다. 나는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아네트 양. 마차 안에 우산이 있지요?”
“네! 있기는 한데, 설마 나가시려고요? 구두가 다 젖으실 텐데요……!”
확실히 실크로 만들어진 구두라 젖으면 쉽게 망가질 것 같긴 했다. 하지만 내 안의 유교 정신이 고민할 틈도 없이 나를 충동질했다.
우산을 챙겨 막 마차 문을 나설 무렵이었다.
“어?”
아네트가 얼 나간 목소리로 말했다.
“갑자기 비가 그쳤어요!”
“……정말이네.”
차창 밖을 내다보며 나 역시 멍한 표정을 지었다.
방금까지 쏟아지던 비가 거짓말이었다는 듯, 비는 뚝 멎어 있었다.
그뿐이 아니었다. 마치 살아 있기라도 한 것처럼 먹구름들이 스멀스멀 순식간에 흩어졌다. 단 일 분도 되지 않아 맑은 하늘이 다시금 드러났다.
“소나기였나 보네요. 다행이…… 꺅! 셀리나 양?”
풀썩.
셀리나가 실 끊어진 인형처럼 의자 위로 허물어졌다.
아네트와 함께 깜짝 놀라 다가가자, 셀리나가 멍한 표정으로 고개를 들었다.
“아, 죄송해요. 갑자기 좀 어지러워서…… 어?”
차창 밖을 바라본 셀리나가 눈을 크게 떴다.
“아이린 님, 아네트 님. 저길 봐요. 무지개예요!”
그 말에 나는 셀리나가 가리킨 하늘을 함께 바라보았다.
정말 하늘엔 눈부신 무지개가 걸려 있었다.
“…….”
나는 무지개와, 환히 웃고 있는 셀리나를 번갈아 가며 바라보았다.
독자로서의 본능이 외치고 있었다.
‘시작됐구나.’
내가 원작을 읽으며 지켜본 셀리나의 운명이 이제 막 막을 올리기 시작한 것이다.
“셀리나 양.”
나는 침착하게 웃으며 셀리나를 불렀다.
“네, 아이린 님?”
“우리, 돌아가면 함께 케넨 주교님을 뵙죠.”
“케넨 주교님이요?”
셀리나의 눈이 토끼처럼 동그래졌다.
나는 말없이 미소만을 남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