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1화
“정말인가요?”
나는 그렇게 말하며 이안의 몸을 이리저리 훑어보았다. 이안이 눈매를 굳혔다.
“뭐 하십니까?”
“다친 곳은 없으신가 해서요.”
다행히 겉보기엔 아무런 상처도 없어 보였다. 나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결투 같은 게 벌어지진 않은 모양이네요.”
“결투?”
“이안 님, 대놓고 마탑주님을 싫어하시잖아요. 솔직히 저번에도 혼자 속으로 아슬아슬했다고요. 두 분이 혹시 싸우진 않을까 싶어서.”
“무슨 말입니까, 그게. 내가 어린애도 아니고.”
이안이 같잖다는 듯 헛웃음 쳤다.
하긴, 다 큰 어른들인데. 내가 괜한 걱정을 했나?
그렇게 생각한 순간이었다.
“설령 싸웠다 치더라도 제 몸에 상처는 안 남았을 겁니다.”
“아…… 그러시군요.”
나는 애매한 미소를 지었다.
결국 싸워도 자기가 이긴다는 뜻 아냐?
‘의외로 좀 유치한 구석이…….’
은근슬쩍 속으로 그렇게 생각한 나는 어깨를 으쓱였다.
“아무래도 상대는 마법사인데, 일대일로 겨룬다면 근접해야 하는 기사 쪽이 불리하지 않을까요?”
“제가 상식적인 상성에 좌우될 것 같습니까?”
“좌우되지 않으시는군요. 잘 알겠어요.”
나는 크게 고개 끄덕이며 이안의 말에 공감해 주었다. 이안에게 현재 고운 감정만을 가지고 있진 않은 나였지만, 지금은 그래야 할 것 같았다.
이안이 그런 나를 잠시 못마땅한 눈으로 쳐다보더니, 다시 본론을 꺼냈다.
“그대를 만나고 싶다고 하더군요.”
“저를요?”
나는 눈을 커다랗게 떴다.
이안이 언짢은 표정으로 말했다.
“그대가 아직 깨어나지 못했다고 하자, 그러면 깨어날 때까지 기다리겠다고 하더군요.”
“정말인가요? 그분이?”
“부채감을 가지고 있는 것 같던데.”
“부채감?”
“자기 영역에서 그대가 그렇게 다쳤으니 말입니다.”
“아.”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확실히, 이안의 말이 맞았다. 내가 다친 게 리젤로의 탓이라고 생각해 본 적은 없었지만, 리젤로의 입장이라면 굉장히 찝찝할 수 있을 것 같았다.
“물론 그 부분에선 나도 할 말이 많기도 하고.”
이안의 눈동자에 순간 사나운 빛이 스쳤다.
‘헉. 화났다.’
이안의 눈치를 보며 살아온 지 어언 수개월째.
이제 이 사람이 화가 났는지 정도는 기민하게 알아챌 수 있었다. 지금처럼.
게다가 아무래도 조금 짜증이 난 수준이 아니라, 엄청 심기가 불편한 것 같다.
이안이 이만큼 화내는 모습을 보는 건 자주 있는 일이 아니기에 나는 나도 모르게 조금 쫄고 말았다.
한심해도 어쩔 수 없었다. 소시민인걸.
“……싸우신 건 정말 아니죠?”
“안 싸웠습니다.”
또 그 소리냐는 듯 이안이 딱 잘라 말했다.
“책임을 요구한 건 사실이지만.”
……뭘 어떻게 요구했는데?
묻고 싶었지만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이안의 심기가 정말 많이 불편해 보여서.
‘내가 다쳤다는 사실이, 이안을 이렇게 동요하게 만든 건가?’
그렇게 생각하지 묘한 기분이 들었다.
피부 아래가 간질거리는 듯한, 이제는 조금 익숙해져 버린 기분.
하지만 나는 곧 고개를 가로저었다.
‘뭐. 당연한 일이긴 하지.’
감정 없는 동상처럼 보이지만 이안도 인간이었다. 당연히 계획대로 안 되면 화도 나고 짜증도 날 테지.
내가 그날 거기서 죽어 버리기라도 했다면 이안에겐 굉장한 타격이었을 것이다. 특히 이안 같은 완벽주의자에겐 아주 화가 나는 사건이었겠지.
“그럼, 이제 제가 깨어났으니 마탑주님께서 절 보러 오시는 건가요?”
“사과를 하고 싶어하는 듯했습니다.”
“사과라.”
나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리젤로는 언뜻 돈에 미친 장사치처럼 보이지만, 그보다 자존심이 더 강한 인간이었다.
자기가 초대한 장소에서 내가 다쳤으니 확실히 부채감을 느낄 만했다.
‘흐음.’
순간 떠오른 생각에 입가로 미소가 번졌다.
“왜 웃습니까?”
이안이 슬며시 눈썹을 찌푸렸다.
“성녀에게 있어서 마탑주와 만나는 일이 웃음 나올 만큼 기쁜 일은 아닐 텐데.”
참, 나.
나는 기가 막혀 이안을 올려다보았다.
좀 웃었다고 내가 성녀로서의 의무를 다하지 못하기라도 한 것처럼 말하는 게 황당했다.
그렇게 나한테 트집이 잡고 싶나? 망할 인간.
“자리나 마련해 주세요.”
뾰족해진 목소리로 내가 말했다.
“만날 겁니까?”
“네. 그래야죠.”
고개를 끄덕인 나는 혹시 하는 마음에 덧붙였다.
“제가 탑주님과 만나는 게 탐탁잖다는 건 알고 있는데, 설마 막으실 생각은 아니죠?”
“…….”
그러려고 했다는 듯 이안이 입을 다물었다.
어딜 망치려고. 나는 그를 똑바로 쳐다보며 말했다.
“제 인간관계잖아요. 강요하시려는 건 아니겠죠?”
설마.
그런 생각을 강하게 담은 눈으로 이안을 바라보자, 곧 그가 굳은 눈으로 입을 열었다.
“……아닙니다.”
몹시 마지못해 하는 듯한 대답이었지만, 상관없었다.
나는 활짝 웃었다.
“역시, 그러실 줄 알았어요. 고마워요!”
그러자 이안은 잠시 아무런 말도 하지 않고 나를 바라보았다.
왜 그러지?
문득 나는 이안 앞에서 이렇게 크게 미소 지은 게 며칠만이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갑자기 민망함이 밀려왔다. 나는 어색하게 헛기침을 했다.
“흐, 흠. 아무튼. 탑주님은 언제 오실까요?”
“…….”
“이안 님?”
“……그대가. 깨어났다는 기별만 준다면, 오늘이라도 당장 올 것 같습니다.”
“그렇군요. 잘됐네요. 그럼 저 대신 탑주님께 말씀 좀 부탁드려요.”
“알겠습니다.”
그렇게 말한 이안이 또 잠깐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몇 초 뒤에야 그가 입을 열었다.
“……오늘은 어떻습니까?”
나는 움찔 몸을 굳혔다.
뭐가, 하고 묻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나는 내 몸을 돌아보았다. 솔직히 말하면 어젯밤 이안과 한 키스를 마지막으로, 더 이상의 한기는 느껴지지 않았다.
‘이제 아무렇지 않다고 대답해야지.’
그러니 더 이상 날 걱정할 필요는 없다고, 간호 역시 이젠 필요하지 않다고 말할 생각이었다. 그게 사실이니까.
그런데 어째서인지 입술이 곧바로 떨어지지 않았다.
내 침묵을 뭐라고 해석했는지, 이안이 내게 한 발자국 다가섰다.
팔만 뻗으면 나를 안을 수 있을 만큼.
이안에겐 습관이 있었다.
키스하기 전에는 먼저 오른손으로 내 목덜미를 감싸는 습관이.
나는 이안의 오른손이 천천히 움직이는 것을 멍한 눈으로 바라보았다.
그 순간이었다.
“단장님, 계십니까?”
똑똑.
정중한 노크 소리와 함께 루시안의 목소리가 들렸다.
맥이 탁, 풀리는 느낌과 함께 나는 참았던 숨을 내뱉었다.
“……그래.”
이안이 한 박자 늦게 대답했다.
문을 열고 들어온 루시안이 나를 보더니 깜짝 놀랐다.
“성녀님! 몸이 이제 많이 괜찮아지셨나 보군요?”
“아, 네. 걱정해 주신 덕분에요.”
“정말 다행입니다. 어찌나 걱정했던지…… 성녀님을 공격한 놈들은 제가 꼭, 반드시 잡아내겠습니다. 염려하지 마세요.”
“고마워요.”
나는 희미하게 웃으며 대답했다.
천공섬에서 날 공격한 게 나인이라는 건 확실했다.
악명 높은 암흑 길드에게 암살 시도를 당할 정도로 미움받고 있다는 건 썩 좋은 기분은 아니었다.
불안하고 걱정되지 않는다고 한다면 거짓말이었다.
‘……지켜 주겠지?’
나는 이안을 슬며시 돌아보았다.
나는 이안에게 숨기고 있는 것도 많고, 현재는 특히나 그에게 좋지만은 못한 복합적인 감정을 가지고 있다.
하지만 그래도 이안이 계약을 끝까지 수행해 내리라는 점에 있어서만큼은 언제나 신뢰할 수 있었다.
굳이 불변의 계약석을 떠올리지 않더라도, 이안이라는 사람 자체를 믿었다.
“아, 성녀님. 그러고 보니 마침 잘되었군요.”
루시안이 밝게 말했다.
“마탑에서 보낸 전갈이 도착해 있습니다. 성녀님의 안부를 묻는 전갈이요.”
“아.”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무사히 깨어났다고 전해 주세요.”
이안의 말이 맞았다.
리젤로는 답을 듣고 해가 진 후 바로 나를 찾아왔다.
나는 내 방의 응접실에서 리젤로를 독대…… 할 뻔했으나, 바쁜 줄 알았던 이안이 어디선가 나타나는 바람에 삼자대면을 하게 됐다.
“고객님. 면목이 없습니다.”
만나자마자 리젤로가 사과를 해 왔다.
평소와 달리 장난스러운 표정이 전혀 없는 것으로 보아, 이 사과는 진심인 듯했다.
“아뇨. 제가 원한을 산 일인걸요.”
예의상 한 번 고개 저은 나는 곧 진짜 속마음을 꺼냈다.
“하지만…… 콜록.”
“아이린.”
“고객님?”
크게 기침하자, 두 남자가 한꺼번에 나를 쳐다보았다.
나는 기운 없는 표정으로 이마를 짚었다.
“휴…… 죄송해요. 잠깐 또 한기가 돌아서.”
“한기라면, 설마.”
리젤로가 눈을 크게 떴다. 영리한 마법사답게 그가 곧 사정을 파악했다.
“마력 과다 증세에 당하신 거로군요.”
“아이린. 다 나았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이안이 굳은 얼굴로 나를 추궁했다.
바로 몇 시간 전, 나는 이안에게 다 나았으니 이제 간호는 필요 없다고 말한 참이었다.
“아직도 몸이 추운 겁니까?”
“그게.”
“대답 좀 해 보십시오.”
‘왜 이래. 도움은 못 될 망정!’
나는 찰나에 이안을 노려보았다. 그에게 눈치가 없는 편이라곤 생각한 적 없는데, 왜 이렇게 중요한 순간 나를 곤란하게 하는지 알 수 없었다.
하는 수 없이 나는 더 엄살을 떨었다.
“그런 줄 알았는데…… 좀처럼 낫질 않나 봐요.”
“어째서.”
이안의 표정이 심각하게 굳었다.
“그렇게 매일 성력을 흡수했는데도…….”
이 사람이 지금 리젤로 앞에서 무슨 소릴 하는 거야!
순간 나도 모르게 얼굴이 새빨개졌다.
우리 키스하는 사이예요, 하고 리젤로 앞에서 광고판이라도 들고 서 있는 기분이었다.
‘무, 물론 리젤로에겐 우리가 부부 사이이긴 하지만.’
리젤로 역시 이안의 폭탄 발언에는 아무런 반응도 하지 않았다.
다만 그 역시 심각한 표정을 짓곤 말했다.
“고객님.”
“네? 콜록, 콜록.”
내 기침 소리에 리젤로가 결심한 듯 말했다.
“제 천공섬에서 고객님이 다치신 건 온전히 제 책임입니다.”
“아뇨, 그런 건 아니죠. 제가 부주의했던걸요…… 콜록.”
“고객님.”
리젤로가 처음 보는 진지한 얼굴로 말했다.
“허락해 주세요.”
“콜록, 뭘요?”
“고객님께 합당한 보상을 드릴 수 있도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