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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0화 (110/161)

110화

심장이 마구 퍼덕거리고 얼굴은 자꾸만 더 뜨거워졌다.

걷잡을 수 없이 범람하는 기억들 때문에 정신이 혼미할 지경이었다.

이안에게 매달리고, 멀어지지 말라며 조르고. 추태도 그런 추태가 없었다.

‘그중에서도 가장 심각한 건…….’

그러던 중 나도 모르는 새 기절하듯 잠에 들어 버렸다는 것이다.

이안이 얼마나 황당했을까?

그저 간호하기 위해 열기를 전했을 뿐인데, 환자가 더 키스해 달라며 낯부끄러운 짓을 조르질 않나.

마지못해 응해 줬더니 그대로 곯아떨어지지를 않나.

‘아. 이대로 콱 기절하고 싶다.’

나는 이불 속으로 파고들어 몸을 둥그렇게 말았다.

이대로 기절했다가 깨어났더니 모든 것이 꿈인 거라면 좋겠다. 그런 진상 짓을 벌이고 아무렇지 않게 이안을 마주할 자신이 없었다.

바로 그렇게 생각한 순간이었다.

똑, 똑.

정중한 노크 소리가 방 안을 울렸다.

나는 화들짝 놀라 허리를 곧추세웠다.

“누, 누구세요?”

제발.

제발 아네트여라.

아니면 조안 경, 혹은 셀리나여도 좋았다.

그러나 되돌아온 목소리는 내 기대를 무참히 배신했다.

“접니다.”

심장이 쿵 내려앉았다.

문밖에서 들려오는 이안의 목소리는, 일단은 평소와 다를 바 없었다.

일단은, 말이지.

‘어떻게 해.’

도저히 저 문밖의 이안을 맨정신으로 마주할 자신이 생겨나지 않았다.

하지만 수가 없었다. 이안을 언제까지고 저 밖에 세워 둘 수는 없는 노릇이니까.

나는 도살장에 끌려가는 소의 심정이 되어 간신히 입을 열었다.

“들어오세요.”

잠깐.

지금 내 몰골이 어떻지?

나는 방금 막 잠에서 깨어난 참이었다. 심지어 깨어나기 전엔 꼬박 이틀이나 잠들어 있었다고 했다.

황급히 고개 들어 화장대 옆 거울을 쳐다보자, 다행히 그럭저럭 사람 꼴을 한 여자가 보였다. 뒷머리가 좀 우습게 뻗쳐 있는 걸 빼면.

다급하게 손빗으로 머리를 빗는데 천천히 문이 열렸다.

“아이린.”

나는 얼른 머리 빗던 손을 내리곤, 최대한 무심하게 들리도록 말했다.

“오셨어요.”

“깨어났다는 이야기, 시종에게 들었습니다.”

뭐?

방 안에 시종이 있었어?

알고 보니 내가 잠에서 깨어나 비명 지르고 이불 속을 파고드는 동안, 내 곁을 지키던 시종이 모든 것을 지켜보고 이안에게 내가 깨어났음을 알린 모양이었다.

겨우 진정시켰던 뺨이 또 뜨거워졌다. 아주 망신살이 제대로 뻗쳤다.

“몸은 이제 괜찮아진 것 같군요.”

“네, 이젠 다 나은 듯해요.”

대답하면서도 나는 이안을 쳐다보지 않았다. 아니, 차마 쳐다보지 못하고 있다 하는 편이 맞겠지.

이안은 지금 나를 바라보고 있을까? 바라보고 있다면, 어떤 표정을 짓고 있을까.

어색해하거나 불편해하는 표정이라면, 너무 창피해서 죽어 버릴 수도 있을 것 같았다.

‘도대체 술 한 모금 안 마시고 그게 무슨 추태였냐고!’

“아이린.”

속으로 힘껏 스스로를 매도하는데, 이안의 목소리가 들렸다.

화들짝 놀란 나는 어깨를 움찔 떨었다.

“……네?”

“어제 일.”

이번에야말로 심장이 바닥까지 떨어져 내렸다.

나는 멍하니 허공만 바라보았다. 설마 이렇게 단도직입적으로 이야기를 꺼낼 줄은 몰랐다.

죽을 만큼 창피했지만, 이렇게 된 이상 회피만 할 수는 없었다.

“네, 어제 일이요.”

최대한 담담하게 들리길 기도하며 내가 말했다.

무슨 얘기를 꺼내려는 걸까?

어제 일은 실수였다고, 내 어리광을 너무 많이 받아 준 것 같다고. 서로 잊자는 이야기를 할까?

‘아니지.’

문득 깨달음이 들었다.

이안이라면. 내가 아는 이안 에스테반이라면 오히려 이 시점에서 내게 사과를 해 올 것 같았다.

내가 아는 그는 이런 방면에 대해서만큼은 고지식하고 보수적이기 짝이 없었으니까.

그렇게 생각하자 어쩐지 기분이 가라앉았다.

정확한 까닭은 알 수 없었다. 하지만, 나는 이안에게 어제 일에 대한 사과를 듣고 싶진 않았다.

그가 내게 키스한 것에 대해 미안해하는 것은 보기 싫었다.

상처받고 싶지 않다는 마음이 재빨리 선수 쳐 내 입술을 움직였다.

“죄송했어요. 어제 일은.”

건너편에서 침묵이 돌아왔다.

나는 재차 입을 열었다.

“아무리 몸이 안 좋았다고 해도, 이안 님께 너무 신세를 졌던 것 같네요.”

“신세?”

되묻는 목소리가 서늘하게 느껴졌다. 나도 모르게 목덜미에 오싹 소름이 끼칠 만큼.

“이안 님도 아시겠지만, 어제는 몸 상태가 정말 안 좋았어요.”

나도 모르게 변명이 흘러나왔다.

내가 변명하고 있다는 사실을 부정하고 싶어 오히려 더 목소리가 차가워졌다.

“그 탓에 추태를 많이 보였네요. 죄송합니다.”

그렇게 말한 나는 작게 고개를 끄덕여 묵례까지 했다.

이안에게서 나지막한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즐거워서 웃는 소리가 아닌, 차가운 헛웃음에 가까웠다.

“아. 그렇습니까. 추태.”

날 선 목소리로 이안이 말했다.

“딱히 사과받으려고 꺼낸 이야기는 아니었습니다만.”

“아뇨. 말씀드릴 건 제대로 말씀드려야죠.”

“많이 부끄러우시긴 한 모양입니다.”

서늘한 비웃음을 섞으며 이안이 말했다.

“내내 나와 눈도 한 번 못 마주칠 정도면.”

“…….”

나는 작게 심호흡하고, 이안을 돌아보았다.

푸른 눈동자가 형형히 빛나며 나를 직시하고 있었다.

“죄송했어요. ……그리고, 감사했고요. 덕분에 몸이 이만큼 나아진 것 같네요.”

이안을 똑바로 마주 보며 그렇게 말하자, 그가 입꼬리를 비스듬히 올렸다.

“미력하게나마 도움이 되었다면 다행입니다. 성녀 하나 지키지 못하는 성기사단장이라는 오명이라도 뒤집어썼다면 큰일 났을 테니.”

그 말에 가슴이 바늘로 찌른 듯 따가웠다.

이안의 말은 마치 성녀라면 어젯밤 침대에 누워 있었던 게 누가 되었든 똑같은 방식으로 위로해 주었으리라는 이야기로 들렸다.

그게 코델리아든, 셀리나든. 단지 성녀라는 이유만으로, 말이다.

나도 모르게 눈에 힘이 들어갔다.

“네. 역시 성기사단장다운 성력이었어요. 그렇게 이상하던 몸이 순식간에 이만큼- 콜록.”

마른기침이 튀어나왔다.

나는 깜짝 놀라 어깨를 움츠러뜨렸다.

아직 미처 가시지 않은 한기가 명치께에 도사리고 있었다.

“아이린?”

차디차던 이안의 표정에 당황이 스쳤다. 그가 내게 빠른 걸음으로 다가왔다.

“왜 그러죠. 괜찮습니까?”

“네. 괜찮…… 아요.”

그렇게 말하는 주제에 나는 나도 모르게 내 팔을 감싸 안았다.

어젯밤, 날 오싹하도록 무섭게 했던 추위가 아직 몸 안에 남아 있었다.

“안 괜찮군요.”

이안이 굳은 얼굴로 나를 내려다보았다.

나는 차마 대답하지 못하고 시선을 내리깔았다. 이 와중에도 눈치 없는 입술이 추위에 덜덜 떨리려 했다.

“아이린.”

“…….”

“이쪽 보십시오.”

이안이 타이르듯 나지막이 말했다.

어떤 표정을 지어야 할지 몰라 고집스레 땅바닥만을 바라보자, 이안이 낮게 한숨을 내쉬었다.

“후유증이 남은 모양입니다.”

“…….”

“그 한기는 당분간 남아 그대를 좀 괴롭힐 겁니다. 치유사도 해결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기에, 그저 견뎌야죠. 아니면.”

살짝 말을 멈춘 이안이 곧 덧붙였다.

“도와줄 사람을 찾거나.”

나는 커다래진 눈으로 이안을 올려다보았다.

눈이 마주치자 이안이 내게 천천히 고개를 가까이했다.

“신세, 라고 했습니까?”

“…….”

“그렇다면 나도 괜한 생각에 복잡해할 필욘 없겠군요.”

어느새 너무도 가까워진 거리에서, 이안이 사특한 악마처럼 속삭였다.

“부인이 남편의 신세를 지는 건 당연한 거니까.”

이게 도대체 무슨 궤변일까.

고민할 새도 없이, 익숙한 체온이 내 입술 위에 내려앉았다.

나도 모르게 숨을 멈춘 채, 나는 눈을 감지도 뜨지도 못했다.

아래로 드리운 이안의 속눈썹이 보였다.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말과 달리 그의 입맞춤은 정중했다.

나는 더 생각하기를 그만두고 두 눈을 감았다.

* * *

“……이린 님.”

“…….”

“아이린 님?”

“으앗! 깜짝이야.”

화들짝 놀라 뒤로 넘어가자 아네트가 놀란 얼굴을 했다.

“정말 못 들으셨어요? 무슨 생각을 그렇게 하고 계신 거예요?”

나는 입을 일자로 꾹 다물었다.

아무리 아네트와 허물없이 친해진 사이라고는 하나, 대낮부터 남자와의 키스나 돌이켜 보고 있었다는 말을 곧이곧대로 뱉을 수는 없었다.

“아무것도요.”

“아이린 님, 어제부터 약간 이상하세요.”

아네트가 고개를 갸웃했다.

“뭔가 멍해 계시달까…… 정말 다 나은 게 맞으셔요?”

내가 며칠 동안 쓰러져 있을 때, 아네트는 매일 몇 시간이나 내 머리맡을 지켰다고 했다.

마침내 깨어난 나와 마주하자 두 눈에 물기를 글썽거리기도 했다.

어떤 못된 놈인지 자신이 꼭 복수해 주겠다며 앙칼지게 말하던 모습이 얼마나 귀엽던지.

그런 아네트이기에 웬만하면 숨기는 것을 만들고 싶지 않았지만, 이번만은 어쩔 수 없었다.

‘그런…… 이야기는, 아무리 여자끼리라고 해도 좀 그렇잖아.’

내가 알기로 아네트는 아직 남자친구 한 번 사귀어 본 적 없다. 그런 그녀에게 이런 이야기는 아직 너무 이를 터였다.

나도 모르게 입술을 만지작거리며 그런 생각을 하는데 아네트가 또 고개를 갸웃거렸다.

“계속 입술만 매만지시는 것도 이상하고.”

“흡.”

정곡을 찔린 나는 이상한 소리를 냈다.

맙소사. 내가 그랬었나?

‘유난도 이런 유난이 없네.’

스스로가 조금 부끄러워졌다.

나와 달리 이안은 입맞춤 몇 번으로 이렇게 혼자 있을 때조차 동요하진 않을 터였다. 동정남에게 여유로 밀린다는 건 몹시 분한 일이었지만, 사실이 그랬다. 그와 입 맞춰 본 당사자인 나는 알 수 있었다.

이안은 키스할 때에는 욕심 많은 사람처럼 집요했지만, 입술을 떼어 낼 때면 거짓말처럼 담백해졌다. 이 접촉에 정말 아무런 의미도 두지 않는다는 듯이.

‘……이안 주제에.’

나 이전엔 여자와 손 한 번 잡아 본 적 없는 주제에, 이런 입맞춤 정도는 닳고 닳을 만큼 해 봤다는 것처럼 그리도 무심한 얼굴이라니.

“앗, 아이린 님. 제가 부른 이유는 사실 따로 있어요. 이안 님이 집무실로 아이린 님을 모셔 오라 명하셨거든요.”

이안. 그 이름에 나는 깜짝 놀랐다.

오늘따라 아네트가 내 정곡을 잘도 찌르고 있었다.

“알겠어요. 지금 가죠.”

한껏 무심한 표정을 장착한 채 나는 이안의 집무실로 향했다.

“왔습니까?”

은색 안경을 낀 이안이 나를 흘긋 바라보았다.

‘그래. 저 태도가 분하단 말이지.’

나와의 입맞춤 따윈, 이런 대낮엔 전혀 떠오르지도 의식되지도 않는다는 듯한 저 얼굴이 말이다.

무덤덤하기 그지없는 표정으로 이안이 본론을 꺼냈다.

“의논할 사항이 있어 불렀습니다.”

“무슨 일이죠?”

“그대가 잠들어 있는 동안, 실은 마탑주와 만남을 가졌습니다.”

뭐? 이안과 리젤로가?

나는 눈을 커다랗게 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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