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9화
“흣.”
차갑게 식은 입술을 가르고 말캉한 것이 밀려들어 왔다.
처음으로 맞이한 타인의 체온이 낯설어서 나는 허덕이며 이안의 옷깃에 매달렸다.
본능적으로 알 수 있었다.
여태껏 내가 이안과 해 왔던 입맞춤은 아이들 장난에 불과했구나.
깊숙이 겹쳐져 서로를 탐하는 키스는 등골이 쭈뼛 설 만큼 생소하고 중독적이었다.
이안은 모든 것이 뜨거웠다. 얽힌 입술부터, 내 목에 감긴 손가락까지, 모든 것이 다.
나를 전부 녹여 버릴 듯 따스한 체온에 속절없이 무너진 나는 더 깊은 온기를 갈구했다.
“읏…….”
벅찬 호흡에 헐떡이면서도 나는 이안에게 더욱더 매달렸다.
그에게서부터 전해져 오는 열기가 몸속 깊은 곳까지 침투해 나를 기분 좋게 덥혔다.
‘더…… 더.’
코로 숨을 쉬는 것마저 잊어버릴 만큼 나는 입맞춤에 열중했다.
그렇게 얼마나 오랫동안 얽혀 있었을까.
하나인 것처럼 섞여 있던 이안의 체온이 거짓말처럼 빠져나갔다.
“응……?”
나는 그제야 눈꺼풀을 열어 몽롱한 눈으로 이안을 올려다보았다.
입술을 뗀 이안이 내 어깨를 살며시 밀어내고 있었다. 천공섬에서 키스를 거절했던 그때처럼.
‘싫어.’
나는 본능적으로 생각했다.
멀어지는 건 싫었다. 아직 이렇게 추운데, 몸이 이렇게 떨리는데.
위로해 주었던 게 농락이었던 것처럼 내게서 다시 온기를 앗아가게 두고 싶지 않았다.
“가지 마요.”
희미하게 속닥거리며 나는 이안의 목깃을 끌어당겼다. 힘이 하나도 들어가지 않은, 깃털보다도 미약한 손짓이었다. 그런데도 이안이 당황한 듯 끌려왔다.
“아이린.”
내 이름을 부르는 목소리가 낮게 가라앉아 있었다. 끝이 갈라진 음성에 귓가로 오싹 소름이 돋았다.
끌려오다 만 채 이안이 내 어깨를 부여잡았다. 날 말리려는 듯 그의 눈동자에 힘이 들어가 있었다. 천공섬에서 보았던 그 눈빛이었다.
“……진정됐다면, 이제 치유사를-”
눈을 꼭 감은 채 나는 그의 입술에 버드 키스를 했다.
새가 쪼는 것 같은 입맞춤에 이안의 몸이 굳었다.
그래도 입술을 열어 주지는 않았다. 나는 한 번 더 그의 입술 위에 입맞춤을 남겼다. 그래도 열어 주지 않아서, 한 번 더. 또 한 번 더.
몇 번 정도 더 그렇게 허락을 요구했을까.
어느 순간 이안의 손이 내 뒷머리를 휘어잡았다. 낮은 신음과 함께 그의 체온이 다시금 내 입술 사이를 파고들었다.
“흐읏.”
숨소리가 새어 나가자, 그조차 삼키겠다는 듯 이안이 더 깊이 입을 맞췄다. 머릿속을 녹여 버릴 것처럼 기분 좋은 열기가 다시금 나를 덮쳤다.
주체하지 못할 만큼 벅찬 기분이 들었다. 이 감정을 해소할 길이 없어 나는 속절없이 이안에게 매달렸다. 그의 뒷목을 감싸고 등을 끌어안자 이안이 움찔 굳었다.
두 몸이 틈 하나 없이 맞물렸다. 내 가슴 위로 이안의 심장박동을 느낄 수 있었다. 그의 심장은 크고 빠르게 뛰고 있었다. 내 것이 꼭 그렇듯이.
조금 더 그와 가까이 닿고 싶었다. 이미 약간의 거리도 없이 꼭 끌어안고 있으면서도, 더 깊숙이 몸을 겹치고 싶었다.
이 열망은 어떻게 해소하면 좋은 걸까. 몸을 차게 식히던 한기는 이제 온데간데없어졌는데, 이제 나는 다른 이유로 괴로웠다.
“조금, 더…….”
손끝으로 이안의 뒷목을 긁으며 나는 알지도 못하는 것을 요구했다.
내 속삭임에 날 안은 이안의 팔이 바위처럼 딱딱해졌다.
“이안 님.”
여태껏 스킨십에서만큼은 이안의 스승을 자처했던 나는 어디로 간 걸까.
지금 내가 할 줄 아는 거라고는 이안의 이름을 부르는 것뿐이었다.
이 애타는 기분을 어떻게 달래야 할지, 이안이라면 혹여 방법을 알고 있지 않을까 해서.
“좀 더, 가까이…….”
물기 어린 목소리로 내가 말했다.
이안으로부터 급히 숨 들이켜는 소리가 들렸다.
여유 없는 손짓으로 그가 나를 끌어안았다. 목덜미를 부여잡는 손길이 그답지 않게 다소 거칠었다.
빈틈없이 맞물린 체온 탓에 머릿속이 속절없이 녹아내렸다.
그 탓일까. 둑이 풀린 듯 눌러 놓았던 감정들이 흘러넘치기 시작했다.
돌아가야 할 곳에 대한 향수라거나, 거짓말들에 대한 책임감이라거나.
그런 감정들이 알게 모르게 나를 오랫동안 짓누르고 있던 모양이었다.
그리고, 절대 그럴 리 없다는 걸 누구보다 잘 알면서도.
마치 이안이 그 모든 걸 알고 나를 위로해 주는 것 같은 착각이 들었다.
한심한 착각이었다. 모든 진실을 알게 된다면 누구보다 나를 경멸할 사람은 바로 이안이었으니까.
“아이린.”
열기로 가득 찬 목소리가 내 이름을 불렀다.
이안은, 자신이 품에 안고 있는 사람이 성녀는커녕 ‘아이린 그레이스’조차 아니란 걸 알까?
‘물론, 알 리가 없지만.’
자꾸만 드는 바보 같은 생각에 나는 자조적인 웃음을 흘렸다.
웃고 있는데도, 어째서일까.
눈시울이 더운 물기로 젖어 들기 시작했다.
뜨거운 체온 속에서 나는 서서히 기절하듯 잠에 빠져들었다.
* * *
“……아이린.”
지독히 낮게 가라앉은 목소리가 속삭였다.
그러나 이름의 주인은 눈을 뜰 생각을 하지 않았다.
제게 안겨 잠들어 버린 여자를 품속에서 다독이며, 이안은 멍하니 허공을 노려보았다.
방금까지 뇌를 활활 불태워 버릴 듯하던 열기는 순식간에 온데간데없이 사라졌다.
울고 있었다. 아이린이.
단순히 생리적인 눈물이 아님을 이안은 잘 알고 있었다.
벌꿀 같은 금안이 젖어 들어가기 시작하면서, 그녀에게서 미약하게 흐느끼는 소리가 났던 것을 이안은 똑똑히 기억했다.
아이린은 정말로, 울고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자신은 그런 그녀에게 홀려 눈먼 짐승처럼 덤벼들었다.
‘미친 새끼.’
찬물처럼 밀려들어 오는 자괴감에 등골이 서늘했다.
아이린이 왜 울었는지, 무엇이 그녀를 슬프게 했는지 이안은 알 수 없었다.
다만 자신의 행위가 그녀를 위로하기는커녕, 더 몰아붙이고 말았다는 사실만은 적나라하게 알 수 있었다.
이안은 이 순간 악마나 배교도보다도 자기 자신이 더 혐오스럽게 느껴졌다.
멈췄어야 했다는 걸 알고 있다.
성력을 흘려보내는 수준에서 행위를 그만뒀어야 했다.
아이린이 저를 끌어당긴 건 그녀가 평정심을 잃은 환자였기 때문이었다.
그걸 잘 알고 있으면서도, 자신은.
“제기랄.”
지독한 자기혐오에 이안은 주먹을 말아쥐었다.
하지만 일단은, 아이린을 편하게 만드는 것이 우선이었다.
아이린의 상체를 안아 든 이안은 그녀를 조심스레 침대 위에 눕혔다. 그러고는 천천히 머리를 들어 베개 위에 제대로 올려놓았다.
“으음…….”
잠든 아이린이 옅게 신음하며 뒤척였다.
그 입술이 마찰에 붉게 부어오른 것을 본 이안은 심장이 선득해지는 것을 느꼈다. 반은 자책으로, 또 반은 욕망으로.
‘정신 나간 놈.’
여인에 대한 욕구 같은 건 단 한 번도 이안을 괴롭게 한 적이 없었다.
세상에 존재하는 대부분의 쾌락은 이안과는 거리가 먼 이야기였다. 어쩌면 너무 어릴 적 경험한 분노와 복수심 때문에 욕구를 느끼는 부위가 거세된 걸지도 모른다고, 그는 한 번쯤 생각한 적도 있었다.
지금 생각하면 우스운 생각이었다. 자신은 반쯤 앓고 있는 환자를 탐할 정도로 제정신 아닌 놈이었으니.
그때 조용히 노크하는 소리가 들렸다.
“단장님. 들어가도 되겠습니까?”
“……들어와.”
조심스레 문을 열고 들어온 루시안이 침대 쪽의 눈치를 보았다.
아이린은 여전히 잠에 들어 있는 듯했고, 이안의 심기는 어째서인지 아까보다도 훨씬 불편해 보였다.
‘성녀님이 그렇게 걱정되시는 건가.’
아이린이 공격에 맞아 쓰러진 순간부터 지금까지 이안은 한잠도 자지 않았다.
먼저 아이린을 최고 실력의 치유사에게 맡긴 뒤, 그녀를 공격한 배후를 추적했다.
스무 시간 전쯤 마침내 집요한 추적이 성공했었다. 범인은 다름 아닌 나인의 일원이었다.
‘그 더러운 범죄 길드 놈들.’
루시안은 분노로 주먹을 말아쥐었다.
이번 황제와 있었던 사건으로 앙심을 품은 나인이 아이린을 암살하려 들었던 것이다.
‘가엾으신 성녀님.’
아이린이 나인과 무슨 관계인지는 알 수 없었다.
둘 사이에 모종의 인연이 있었음은 루시안도 짐작할 수 있었다. 하지만 그 내막에 대해 자세히 파헤치려 한 적은 없었다. 이안조차 그러려 하지 않고 있음을 알기에, 루시안이 감히 지레짐작하려 할 리 없었다.
그래도 다행히 나인은 아이린에게 방어 아티팩트가 감겨 있음은 알지 못한 모양이었다.
이안이 직접 선사한 그 아티팩트가 아니었다면, 지금 아이린은 처참히 목숨을 잃은 상태였겠지.
아이린에게 마법 작살을 쏘았던 놈은 현재 심문실에 감금된 상태였다.
에드워드 때 쓴맛을 보았기에 자살을 막기 위한 방비도 모두 되어 있는 상태였다.
루시안은 그놈을 실마리로 나인의 본부를 추적할 수 있기를 희망하고 있었다.
“무슨 일이지?”
이안이 높낮이 없는 목소리로 말했다.
언뜻 무미건조하게 들렸지만, 오랜 시간 그를 모셔온 루시안은 현재 그의 기분이 몹시 가라앉아 있음을 짐작할 수 있었다.
그렇게 루시안은 얼른 본론을 꺼냈다.
“마탑 측에서 연락이 왔습니다.”
“…….”
“탑주가 단장님을 직접 뵙고자 하십니다.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이안은 대답 대신, 잠든 아이린의 이마를 한참 동안 내려다보았다.
* * *
“흐으음…….”
나른히 뒤척이던 나는 문득 반짝 눈을 떴다.
착각인가?
바로 얼마 전에도 비슷한 수순으로 잠에서 깨어났던 것 같은데.
‘왜 일어난 기억만 연달아 두 개가 있고, 그 사이의 기억은 떠오르는 게 없…….’
거기까지 생각한 나는 얼음처럼 굳어 버렸다.
떠오르는 것이, 없지 않았다.
‘가지 마요.’
‘조금, 더…….’
“흐으으윽?!”
머리칼을 쥐어뜯으며 나는 이불 위에 코를 묻었다.
한번 떠오르니, 기억이 홍수처럼 밀려들기 시작했다.
이안의 입술이 얼마나 뜨거웠는지, 키스가 얼마나 깊었는지. 내가 얼마나 대책 없이 칭얼거렸는지. 전부 다.
‘미, 미쳤어.’
나는 주르르 침대 위로 미끄러졌다.
얼굴이 불붙은 듯 시뻘겋게 달아올랐다.
내가 도대체 무슨 짓을 저지른 거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