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8화
* * *
“……에는 분명 이상이 없으십니다.”
“그런데 왜…….”
“조금만…… 보시면…….”
“곧 차도가…….”
물속에 잠겨 있는 것처럼 소리들이 웅얼거리며 들려왔다.
“……이린. 내 말…… 립니까?”
“성녀님! 흐윽.”
여러 목소리가 물결처럼 흘러왔다가 사라졌다.
따뜻한 바다 위를 유유히 유영하고 있는 기분이었다. 할 수만 있다면 한참 동안 더 여기서 움직이지 않고 싶었다.
“……이린. 정신을 좀…… 보십시오.”
그런데, 어떤 목소리가.
“얼마나 오래 자는 겁니까…….”
자꾸만 귓전을 어지럽혀서, 좀처럼 무의식 속에 잠겨만 있을 수가 없었다.
머지않아 무의식 속에 숨어 있는 것도 지겨워졌다.
슬슬 일어나고 싶어.
하지만, 세상에서 가장 무거운 건 눈꺼풀이라던가. 그 말을 증명하듯 좀처럼 눈을 뜰 수가 없었다.
하는 수 없이 나는 또 한 번 꿈에 잠겨 들었다.
여러 가지 꿈이 찾아왔다. 고아원에서의 기억, 소연이와 처음 만난 날, 대학 입학 소식을 들었던 날…….
얼마나 많은 꿈을 꾸었을까.
마침내 의식이 수면 위로 헤엄쳐 올라오기 시작했다.
“……흐음.”
의식이 돌아오자마자 나는 나른하게 기지개를 켰다.
대체 얼마나 오래 잔 건지, 온몸이 뻐근하기까지 했다.
‘늦잠인가?’
왜 아네트가 깨우지 않았지?
의아해하는데 갑자기 목소리가 들려왔다.
“아이린?!”
깜짝이야.
나는 화들짝 놀라 그제야 눈꺼풀을 열었다.
이안의 얼굴이 시야 가득히 들어왔다.
‘뭐, 뭐야.’
일어나자마자 이안과 시선이 마주친 것은 처음이었다.
사람이 자는 걸 내내 지켜보고 있었던 거야?
공처럼 커다래진 눈으로 이안을 올려다보자 그가 질끈 입술을 깨물었다.
“얼마나, 오래 누워 있었는지 압니까.”
내가 늦잠을 그렇게 오래 잤어……?
머릿속이 아직 몽롱하고 혼곤했다. 나는 혼란 가득한 얼굴을 한 채 기억을 더듬어 보았다.
어젯밤에 대체 무슨 일이 있었지?
“제가…… 콜록.”
입을 열자, 오랫동안 쓰지 않은 것처럼 성대가 메말라 있었다.
기침하자 이안이 미간을 찡그리곤 내게 물잔을 가져다주었다.
‘웬일이지.’
이안의 친절이 부담스럽도록 어색했으나, 나는 일단 물을 벌컥벌컥 들이켰다.
“윽.”
그런데, 들이켤 때마다 가슴에 욱신거리며 통증이 일었다.
“괜찮습니까.”
이안이 득달같이 물어왔다.
나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이곤, 다시금 입을 열었다. 목을 축인 덕에 이번엔 목소리가 제대로 나왔다.
“제가, 얼마나 잔 거죠?”
“꼬박 이틀.”
“이틀?! 윽.”
놀란 나머지 목소리를 높이자 또 가슴에 통증이 일었다. 멍이 든 것처럼 둔탁한 통증이었다.
“흥분하지 마십시오.”
이안이 타이르듯 말했다.
하지만 나는 황당함을 가라앉힐 수가 없었다.
“아니, 제가 잠을 이틀이나 잤다고요? 농담하시는 거죠. 무슨 늦잠을 그렇게까지 잔단 말이에요?”
“늦잠?”
이안이 기막힌 얼굴을 했다.
“지금 늦잠이라고 했습니까?”
“네?”
“……기억, 안 나는 겁니까?”
뒤늦게 이안이 미간을 좁혔다.
기억? 무슨 기억?
……그제야, 뒤늦게 잠들기 전의 기억들이 몰려들었다.
천공섬.
이안과 했던 입맞춤. 아니, 정확히 말하면 할 뻔했던 입맞춤.
그 뒤로 이어진 리젤로와의 대화. 그리고…….
“헉.”
나는 황급히 내 가슴을 내려다보았다.
마지막 기억대로라면, 내 가슴은 검은 작살을 맞고 구멍이 뚫려 있었어야 했다.
“구, 구멍이.”
내 가슴을 더듬으며 다급히 중얼거리자 이안이 한숨을 내쉬었다.
“만져 볼 필요 없습니다. 구멍은 안 났으니까.”
“하지만, 그 작살같이 생긴 게…… 여기 맞았었는데.”
“안 맞았습니다. 엄밀히 말하자면, 맞았다고도 할 수 있겠지만.”
그게 도대체 무슨 애매모호한 소리야?
나는 해명을 요구하는 눈으로 이안을 돌아보았다. 이안이 굳은 얼굴로 말했다.
“내가 그대에게 준 아티팩트.”
나는 그 말에 무의식적으로 아티팩트를 착용한 손목을 더듬었다.
이안이 내게 이것을 건넨 뒤로, 나는 한 번도 몸에서 떼 본 적 없었다.
“거기 깃든 방어 마법이 발동했습니다. 화살이 그대를 꿰뚫지 못하도록.”
“저, 정말인가요?”
나는 멍하니 내 손목에 감긴 아티팩트를 내려다보았다.
이 조그만 녀석이 정말 그런 기특한 일을 했단 말이야?
이안의 말이 사실이라면, 이 아티팩트는 내 생명의 은인이었다.
“그런데, 왜 이렇게 가슴이 아픈 거죠?”
나는 혼란스러운 얼굴로 내 가슴을 문질렀다.
말할 때마다 울리는 둔탁한 통증이 사라지지 않았다.
“치명상을 입는 건 막았지만, 문제가 있었습니다.”
“문제요?”
“화살의 마력과 아티팩트에 담긴 마력. 그 둘이 충돌하면서 폭발이 일어나 그대에게 영향을 끼친 겁니다.”
“아…….”
나는 살짝 입을 벌렸다.
설명을 듣긴 했지만 솔직히 제대로 이해되진 않았다.
“그래서 제가 이틀이나 잠에 들어 있었던 건가요?”
“네. 장기가 손상되거나 큰 부상을 입은 건 아닙니다. 하지만.”
이안이 말끝을 흐렸다. 그 모습에 덜컥 불안이 들었다.
“하지만요?”
“……기분이 어떻습니까? 지금.”
이안이 대답 대신 뜬금없는 말을 했다.
나는 멍하니 내 기분을 되돌아보았다.
“글쎄요. 일단 크게 움직이면 가슴 부근이 좀 욱신거리긴 해요. 충돌이 일어난 부작용이겠죠? 그리고, 음…….”
곰곰이 스스로를 살피던 나는 문득 내 팔을 감쌌다.
“조금…… 추워요.”
“춥다고?”
이안의 얼굴이 굳었다.
나는 불안스레 고개를 끄덕거렸다. 얼음을 삼킨 듯 몸속 깊은 곳으로부터 시린 기분이 들었다.
의식하기 시작하자 그 기분은 더 강해졌다.
“네. 왜 이렇게 춥지…… 이상하다.”
그렇게 말하며 나는 이불을 끌어당겼다.
추워. 이상할 정도로 추웠다.
입술이 덜덜 떨리기 시작했다. 이불을 더 꼭 끌어당기자, 이안이 거칠게 혀를 찼다.
“젠장.”
“저, 감기에 걸렸나 봐요.”
그것도 아주 지독한 독감에 걸린 게 틀림없었다.
나는 감기 한 번 안 걸리는 건강 체질이었는데. 소연이가 바보라서 감기도 안 걸리는 거라고 놀리곤 했었는데.
이렇게 강렬한 추위가 낯설어서 나는 나도 모르게 동아줄을 붙잡듯 이안을 올려다보았다. 그가 입술을 깨물곤 내 이불 안으로 파고들어 왔다.
“감기가 아닙니다.”
나는 얼음이 되어 버린 듯 딱딱히 굳었다.
이안의 팔이, 그의 가슴이 이불 대신이 된 듯 나를 감싸 안았다.
이건 무슨 뜻이지?
나는 간신히 입술을 열어 물었다.
“감기가, 아니라뇨?”
“그대는 지금 마력 과다 증세에 시달리고 있는 겁니다.”
“마력 과다 증세…….”
나는 멍하니 그 말을 되풀이했다.
마력 과다 증세라면 리칼리온의 동굴에서, 조안 경의 동생이 앓았던 그 증상이었다.
원작에서 말하길, 그건 분명 목숨을 잃을 수도 있을 만큼 무서운 증세랬는데.
덜컥 겁을 집어먹은 나는 속삭이듯 물었다.
“저는 그러면 어떻게 되는 거죠?”
“이 증세엔 뚜렷한 치료법이 없습니다.”
나를 굳게 끌어안으며 이안이 말했다.
“그저 조용히, 마력을 흘려보내는 수밖에.”
조곤조곤한 그의 목소리가 낯설었다.
춥고, 머릿속은 불안했고, 이안의 품에선 낯설면서도 익숙한 향기가 났다.
나는 덜덜 떨리는 입술을 열어 중얼거렸다.
“추워요. 너무…….”
“쉬.”
나지막한 목소리가 나를 안심시켰다.
“곧 괜찮아질 겁니다.”
“저, 추위에 약하단 말이에요. 여름에 태어나서.”
추위가 머리를 마비시키기라도 한 걸까.
내 입술이 어리광 같은 소리를 칭얼거렸다. 이안이 헛웃음 치듯 한숨을 내쉬었다.
“이런 상황에서까지 농담입니까, 당신은.”
“농담이 아닌데요…… 흐으.”
나는 나도 모르게 이안의 품속으로 파고들었다.
너무 추운데, 그의 체온만은 덥고 아늑했다. 설원 속 피어난 유일한 불 같았다.
“방을 좀 더 덥히라 명하겠습니다. 잠시만.”
“안 돼요.”
나는 하인을 부르려 일어나려는 이안의 소매를 붙잡았다.
지금 이안마저 사라지면 정말 동사해 버릴 것만 같았다.
“너무 춥단 말이에요. 떨어지지, 말아요.”
아직도 내 입술은 잘게 떨리고 있었다.
분명 이안이 나를 꼭 끌어안아 주고 있는데, 그의 체온이 이렇게 따스한데.
그런데도 내 몸 안의 추위는 딱히 가라앉는 기색이 없었다. 오히려 몸 안에 더욱더 널리 퍼져 나가는 것 같았다.
“젠장.”
그런 내 상태를 눈치챈 걸까.
이안이 다시금 낮게 혀를 찼다.
다음 순간, 나는 내 턱을 들어 올리는 손길에 멍하니 눈을 크게 떴다.
이안과 눈이 마주쳤다. 나를 똑바로 담고 있는 그 눈이, 점점 내게로 가까워졌다.
‘……어?’
본능적인 예감에 나는 숨을 멈췄다.
천천히 가까워진 이안이 내 입술 위에서 속삭였다.
“지금부터 그대에게 입 맞출 건데.”
“…….”
“싫다면 지금 얘기하십시오.”
쿵.
가슴이 닻을 내린 듯 내려앉았다.
코앞에서 나를 응시하는 이안의 눈동자 때문에 머릿속이 멎어 버린 것 같았다.
갑작스레 그가 내게 키스하려는 이유가 뭔지는, 사실 알고 있었다.
‘내가, 추워하고 있기 때문이야.’
원작에서 읽은 적이 있었다.
성력에는 따스한 기운이 녹아 있다고.
이안의 체온이 더운 이유 역시 그 때문이었다. 성력이 강대하니, 그만큼 그 힘이 녹아 있는 몸 역시 따뜻한 거였다.
내게 입 맞추려는 이유는 그 열기를 내게 전해 주려는 거겠지.
일전에 손을 잡으며 내게 성력을 전해 줬던 것처럼.
그래. 이건 그저 얼어 죽어 가는 날 위한 간호 행위일 뿐이었다.
그런데도 왜 이렇게 심장이 미친 사람처럼 쿵쾅대는 걸까.
“……만약에.”
나는 달싹이며 입술을 열었다.
“싫다고 한다면요?”
왜 그런 말을 내뱉었을까.
어쩌면 바보처럼 동요하고 있는 나 자신이 부끄러워 부린 오기였을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아마 사과하겠지만.”
이안이 나지막이 속삭였다.
“멈추진 않을 겁니다.”
입술 위에서 이루어지는 속삭임이 간지러워, 나는 꼭 눈을 감아 버렸다.
머지않아 내 입술 위로 더운 체온이 부딪혀 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