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07화 (107/161)

107화

노이즈로 소란스럽던 머릿속이 뚝 멎었다.

우릴 두고 소곤거리던 귀부인들의 속삭임도 멎은 것 같았다.

정적 속에서 나는 이안을 멍하니 올려다보았다.

지금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 걸까.

왜 입맞춤을 하지 않았지?

여태껏 이안은 내가 스킨십 연습을 요구했을 때 한 번도 거부한 적이 없었다. 이 방면에서만큼은 그랬다.

그랬던 사람이, 갑자기 왜.

짧은 침묵 끝에 마침내 이안이 입을 열었다. 내게서 시선을 빗겨 내린 채.

“이만 자리를 옮기죠.”

내게 닿을 뻔했던 그 입술에서 흘러나온 목소리에, 나는 살짝 숨을 멈췄다.

아무런 감정도 느껴지지 않는, 삭막할 정도로 사무적인 목소리였다.

“……왜죠?”

나는 간신히, 아무렇지도 않은 목소리를 내는 데에 성공했다.

가슴이 둔탁하게 뛰고 있었다. 이안이 나를 밀어낸 것에 충격이라도 받은 것처럼.

이런 상태를 숨기기 위해 나는 더더욱 평상시와 다를 바 없는 표정으로 말했다.

“애정 행각을 보여 주기 더할 나위 없이 좋은 장소잖아요. 낭만적이고, 귀족들도 가득하고.”

“불필요한 연기는.”

이안이 딱 자르듯 말했다.

“오히려 도움이 안 될 겁니다. 남발하지 않기로 하죠.”

그 말에 심장이 찬물을 끼얹은 듯 차가워졌다.

불필요한 연기.

이안이 나와의 키스를 불필요한 연기라고 표현했다.

그래. 더할 것도, 덜할 것도 없이 칼로 자르듯 정확한 표현이었다.

그런데 어째서인지 마음이 바늘로 찔리는 듯 따가웠다.

왜 내가 이런 기분을 느끼는 걸까. 그런 의문을 느낄 새도 없이, 내 입은 먼저 멋대로 움직이고 있었다.

아무렇지 않은 미소를 걸친 채. 마치 자기방어 기제가 작동한 로봇 같았다.

“아. 그래요?”

비스듬히 웃으며 내가 말했다.

“이안 님께서 생각하시는 적재적소가 따로 있는 줄은 몰랐네요.”

“…….”

“다음엔 미리 말해 주세요. 언제 어디서 키스해야 불필요한 연습이 아니게 될지. 제가 의욕이 넘쳐 과했나 보네요.”

더 미소를 띠며 나는 덧붙였다.

“아시다시피, 제가 좀 매사에 열심히 임하려는 면이 있잖아요.”

지나치게 빈정거리지는 말자.

그랬다간 내가 동요한 걸 들키게 될지도 모르잖아.

그런 생각에 나는 더 일부러 오연히 미소 지었다.

그런 나를 이안이 입술을 굳게 다문 채 내려다보았다.

착각일까?

나를 바라보는 그 눈동자에 순간, 수없이 짙은 감정들이 휘몰아치는 것처럼 보였다.

하지만 나는 그런 내 느낌이 무의미하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내가 그에게, 아니. 우리가 서로에게 그렇게 복잡한 존재가 아님을 잘 알고 있었으니까.

‘철저한 윈-윈 관계지, 우리는.’

나는 그에게 얻을 것이 있고, 그 역시 마찬가지다.

이보다 더 명확한 관계가 있을까?

간단한 관계인 만큼, 복잡한 감정과 생각은 끼어들 필요가 없었다.

그렇게 생각을 정리하면서도 내 가슴은 불안하게 뛰어 대었다.

알고 있었다.

이렇게 스스로를 타일러야 하는 이유는, 이미 심장이 동요하고 말았기 때문이라는 것을. 이안에게 거부당했다는 그 감각에.

‘바보 같네.’

나는 스스로를 향해 냉소를 흘렸다.

애초에 이안 에스테반은 타인과의 접촉을 극도로 싫어하는 인물이다. 그 상대가 이성이라면 더더욱 그랬다.

나와 피부와 입술을 맞댔던 건, 오로지 눈속임을 위해 싫은 접촉을 감내하고 있었던 것일 뿐.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잖아, 난.’

원작 독자로서 나는 이안의 그런 특성을 아주 잘 알고 있었다.

* * *

그 뒤의 산책은 다소 삭막한 분위기에서 이루어졌다.

남들 눈을 의식해 팔짱을 끼고는 있지만, 나와 이안 사이에서 오가는 말은 없었다.

“…….”

“…….”

나는 속으로 혀를 찼다.

분위기가 이렇게 가라앉아선 안 되었다. 적어도 남들이 보기에 우린 더없이 화목한 한 쌍처럼 보여야 했다.

‘그걸 나만 알고 있는 건 아닐 텐데.’

나는 남몰래 이안을 노려보았다. 아까부터 조개라도 된 듯 입을 꾹 다물고만 있는 내 가짜 남편을.

‘사기는 나 혼자 치지, 응?’

내가 가만히 있어도 본인이 먼저 살갑게 말 붙여 보려는 노력을 왜 하지 않느냔 말이다.

심지어 오늘의 이안은 평소보다도 차디차게 얼어붙어 있었다. 이젠 그나마 이안에게 익숙해진 나조차 말 붙이기 힘들 만큼.

어쩔 수 없지.

얼어붙은 분위기를 풀기 위해 마지못해 입을 열려던 순간이었다.

“여기 계셨군요, 고객님.”

화사한 얼굴로 리젤로가 등장했다.

내 팔짱을 끼고 있던 이안이 앞으로 한 걸음 나섰다. 마치 나를 제 뒤로 숨기듯이.

“무슨 일이지, 마탑주.”

“이안 님께서도 계셨군요!”

당연히 봤을 거면서 리젤로가 뻔뻔히 말했다.

이안의 심기가 한층 더 불편해진 것이 느껴졌다.

“두 분, 구경은 많이 하셨나요? 어떠십니까? 저와 우리 마탑의 역작이.”

리젤로가 흐뭇하게 웃으며 주변을 한 바퀴 둘러보았다.

나는 솔직한 감상을 말했다.

“놀랐어요. 무척 인상적이네요.”

이미 원작을 통해 천공섬에 대한 묘사를 읽은 나조차도 이 장소는 놀라웠다.

리젤로가 뿌듯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거렸다.

“전부 고객님 덕분이죠.”

“제 덕이요?”

“이 천공섬을 띄우고 있는 동력은, 모두 성마석으로부터 나온 거니까요.”

평소라면 부담스러워 부인했을 거다.

하지만 나는 천천히 고개를 주억거렸다.

“그렇네요.”

섬을 휘 둘러보며 내가 덧붙였다.

“제 공도 일정 이상 있기는 해요. 그렇죠?”

“빼지 않으시는군요.”

리젤로가 재밌다는 듯 쿡쿡거리며 웃었다.

“맞아요. 우리 마탑 모두 고객님께 큰 은혜를 입었죠.”

“어머. 그렇게까지 생각한 적은 없었는데.”

나는 리젤로의 말을 덥석 물며 활짝 웃었다.

“하지만 그렇게 말해 주시니 감사하네요. 마탑의 은인 역할, 감사히 맡을게요.”

“하하하.”

리젤로가 눈을 반달 모양으로 접어 가며 웃었다.

“역시 오늘도 재밌으시군요. 본인 입으로 마탑의 은인이라고 하신 분은 고객님이 처음이세요!”

“어머나, 그것도 영광이네요.”

“아이린.”

화기애애한 대화에 차가운 목소리가 끼어들었다.

리젤로를 등지고 나를 바라보며 이안이 낮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말하지 않았습니까? 외간 남자에게 함부로 빚졌다는 말은 하지 말라고.”

“그래서요?”

“반대도 마찬가집니다.”

하.

나는 가볍게 헛웃음을 쳤다.

한 시간 동안 침묵을 지키다가 겨우 한다는 말이 이거라고?

“어째서요? 제게 빚지게 만들 수 있다면 저야 환영이죠. 게다가 상대가 무려 마탑주인데.”

이안에게만 들리도록 속닥거리자, 그가 한쪽 눈썹을 치켜세웠다.

그러거나 말거나.

나는 시야에서 이안을 치우고 다시금 리젤로를 바라보았다.

“아무튼, 탑주님. 일이 이렇게 됐으니 저희, 한층 돈독한 사이가 된 것 맞죠?”

이안의 표정이 구겨지는 게 곁눈으로 살짝 보였다.

리젤로가 나와 이안을 번갈아 바라보더니 고개를 갸웃했다.

“두 분, 혹시 다투셨나요?”

“다투다뇨. 무슨 말씀을.”

활짝 미소 지으며 내가 말했다.

“저흰 언제나 그렇듯 사이가 좋답니다.”

“그러시군요?”

리젤로가 묘한 웃음을 지었다. 나는 크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요. 다시 본론으로 돌아가서, 탑주님. 실은 개인적으로 드리고 싶은 부탁이 있는데요.”

“오?”

리젤로가 입술을 동그랗게 말았다. 싹싹한 상인처럼 방긋 웃으며 그가 말했다.

“저야 영광이죠. 성녀님께 도움이 될 일이 많으면 많을수록.”

이전에도 이미 여럿 리젤로의 도움을 받은 적이 있는 나는 그 말에 찔끔했다.

설마 내가 의뢰한 적이 있다는 걸 이안한테 들키게 만들려는 건 아니겠지?

그런 불안과 달리 다행히도 리젤로는 그 이상 말하진 않았다.

“무슨 부탁인가요?”

“아이린.”

이안이 다시금 나를 불렀다.

“난 아직 이 계획에 완전히 찬성한 적 없습니다.”

나는 답답함에 눈을 찡그렸다.

이안은 여전히 리젤로에게 복원 마법을 의뢰하자는 내 계획에 반기를 들고 있었다. 나로선 답답하기 짝이 없는 부분이었다.

아무리 생각해 보아도 리젤로에게 의뢰하는 것이 최선의 계획이었다.

만에 하나 리젤로가 함부로 입을 놀리거나 황제에게 붙는 것이 걱정된다면, 불변의 계약석을 사용할 수도 있었다.

복원 마법에는 그럴 만한 가치가 있었기에.

이안 역시 내가 생각한 것들을 생각하지 못했을 리는 없었다. 그럼에도 아직까지 반대해 오는 이유가 나는 납득되지 않았다.

‘리젤로가 나를 쳐다보는 눈빛이 마음에 안 든다니. 그게 대체 무슨 이유냐고?’

“이안 님.”

나는 이안을 부르면서도 그에게서 고개 돌려 저 멀리 지상을 내려다보았다.

이렇게 높으니 널따란 수도가 한눈에 내려다보였다.

그중에서도 단연 눈에 띄는 건, 호화롭고도 거대한 황궁이었다.

황금색과 순백색이 어우러진 아름다운 궁전들. 저 한가운데 이안의 아버지가 살해당한 폐궁도 있을 터였다.

그런 생각을 하며 나는 울타리 쪽으로 한 발자국을 디뎠다.

“아이린! 잠깐.”

이안에게서 한 발자국 멀어지자마자 그가 나를 불러세웠다.

다급한 목소리에 이안을 돌아보려던 순간이었다.

치잉―!

금속이 부딪히는 듯한 굉음과 함께 내 몸이 거세게 밀려 나갔다.

“아이린!”

갈급한 목소리가 귓전을 울렸다.

대답하고 싶었으나, 가슴을 덮치는 뻐근한 통증에 정신이 혼미했다.

‘뭐지?’

나한테 무슨 일이 일어난 거지?

무너지는 내 몸을 이안이 안아 들었다.

리젤로는 무섭게 굳은 얼굴을 한 채 바닥에서 검은색을 띤 무언가를 주워들었다. 거대한 화살 같은 모양을 한 물건이었다.

‘저게 지금 내 가슴에 날아왔던 건가?’

저렇게 커다란 게 가슴에 맞았다면, 나는 이미 심장이 뚫려 죽었어야 했다.

하지만 다행히도 나는 아직 멀쩡히 살아 있긴 한 듯했다.

“아이린. 아이린!”

멀쩡히 살아 있는 거…… 맞지?

나는 위로 올려다보이는 이안의 다급한 얼굴을 올려다보며 멍하니 생각했다.

왜 저런 표정을 짓고 있는 걸까. 송장을 앞에 둔 사람처럼.

시야가 서서히 흐려지더니, 곧 까무룩 넘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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