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5화
“뜨거운 찻물은 다른 이에게 시중받는 게 좋겠군요.”
적나라한 지적에 셀리나의 얼굴이 시뻘게졌다.
‘저, 정신 차리자.’
셀리나는 아이린의 곁을 보필하는 이 새 일이 좋았다. 대성당의 분위기도 좋았고, 깨끗한 옷과 음식들도 좋았다. 무엇보다 자신을 향하는 아이린의 따뜻한 눈빛이 좋았다.
이렇게 좋은 새 직장인데, 차 한 번 제대로 따르지 못해 고용주의 남편에게 밉보여 잘리고 싶진 않았다.
필사적으로 떨림을 진정시키는데 갑자기 아이린이 찻잔을 내려놓았다.
“아이린?”
“아, 죄송해요. 속이 조금 안 좋아서.”
그 순간이었다.
셀리나는 여태껏 그저 얼음 조각 같기만 했던 이안의 얼굴에 처음으로 표정이라는 것이 스쳐 지나가는 것을 발견했다.
그 표정의 이름도 셀리나는 알 것 같았다.
“아침에 뭘 잘못 먹었습니까? 많이 불편하다면 검사를 받아 보죠.”
표정의 이름은 분명, 염려와 걱정이었다.
곁에서 보는 셀리나의 기분이 다 간질거릴 정도로 적나라한.
괜히 뺨이 붉어지는 것을 느끼며 셀리나는 찻주전자를 정리했다.
하긴, 그 억만금을 줘도 구하기 힘들다던 용의 발톱까지 먹일 정도라면 이안의 부인 사랑은 짐작할 만했다.
그로부터 몇 시간 뒤.
선배 시녀 렐을 따라다니며 대성당 지리 교육을 받던 셀리나는 문득 어딘가에 시선을 뺏겼다.
‘성기사들…….’
연무장에서 성기사들이 훈련에 매진하고 있었다.
기사란 존재는 셀리나가 살아온 시골 마을에서 로맨틱한 이야기의 단골 주인공이었다.
그런 낭만적인 존재가 수십 명이나 자리한 광경에 절로 시선이 홀렸다.
“잠깐 구경하다 갈래요?”
셀리나의 시선을 눈치챈 렐이 배시시 웃으며 말했다.
“아, 그래도 되나요? 감사합니다.”
“잘생겼죠?”
“네?”
뜻밖의 이야기에 셀리나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렐이 킥킥거리며 목소리를 낮췄다.
“조 씨 말이에요.”
“조 씨……? 그게 누군가요?”
“어머. 모르는 거예요? 저기, 저 사람. 지금 수건으로 이마 닦고 있는 견습 기사요.”
“아하…….”
렐이 가리키는 방향을 쳐다본 셀리나는 검은 머리칼에 견습 기사복을 입은 소년을 발견했다.
렐이 속닥거렸다.
“표정이 하나도 없는 게 좀 흠이긴 한데, 저는 마주칠 때마다 좀 설렌다니까요. 제임스에겐 비밀이에요, 후후.”
애인에겐 비밀이라고 말하며 렐이 상기된 얼굴로 웃었다.
‘잘생겼나?’
셀리나는 견습 기사의 얼굴을 잠시 구경해 보았다. 확실히 매끈한 것이 주변 기사들과도 남다른 생김새긴 했다.
‘단장님도 그렇고, 저 견습 기사도 그렇고…… 대성당이란 곳은 엄청나네.’
이제 보니 대성당은 단순히 아름답고 신성한 장소일 뿐만 아니라, 미남까지 집약된 곳이었다.
그때 셀리나는 복도에서 반가운 얼굴을 발견했다.
‘어, 아이린 님이다.’
“셀리나 양? 렐 양!”
아이린 역시 셀리나와 렐을 발견하곤 웃으며 다가왔다.
살가운 미소에 셀리나는 마음이 봄눈처럼 녹는 것을 느꼈다. 저 웃음이 좋았다. 거절당할 것을 무서워하지 않고, 기꺼이 호의를 보내는 저 미소가.
“교육받고 있던 중이었군요?”
“네, 대성당 지리에 대해 많이 배우고 있어요.”
몇 마디 담소를 나눈 뒤 아이린은 손을 흔들며 멀어져 갔다. 바쁜 일이 있는 모양이었다. 하긴, 아이린은 늘 바빠 보이기는 했다.
‘매일 노트에 뭔가를 적으시고, 생각에 골똘히 잠겨 계시는 일도 많고 말이야.’
성녀라는 지위는 정말 일이 많은 자리인 모양이었다.
역시 성녀님들은 대단해. 아이린에 대한 존경심을 다시금 다지던 셀리나는, 옆구리를 쿡쿡 찌르는 손가락에 화들짝 놀랐다.
“헉, 온다. 와요!”
“네? 뭐가요?”
“어머, 조 씨. 안녕하세요?”
방금까지 숨죽여 호들갑 떨던 렐이 갑자기 방긋 웃으며 누군가를 반겼다.
렐이 바라보는 방향을 돌아본 셀리나는 또 깜짝 놀랐다.
‘그 견습 기사잖아?’
“안녕하세요.”
방금 구경했던 그 기사가 어느새 눈앞까지 와 있었다.
“네. 안녕하세요?”
“혹시.”
견습 기사가 다짜고짜 본론을 꺼냈다.
그의 시선은 셀리나 뒤편, 멀어지고 있는 아이린의 뒷모습을 향해 있었다.
“아이린 님과 가까우십니까?”
“네?”
이게 갑자기 무슨 질문이람?
당황한 셀리나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분의 시중을 들고 있긴 해요.”
“그렇다면 제 말을 대신 전해 주십시오.”
아이린의 뒷모습을 다시금 바라보며 견습 기사가 말했다.
“이름 추천 감사했다고, 그리고 선택하지 않아 죄송하다고요.”
‘뭐지?’
견습 기사의 시선을 바라보며 셀리나는 눈을 뾰족하게 떴다.
아이린의 뒷모습을 바라보는 눈빛이 어쩐지 좀 아련하게 보였다.
“직접 말씀드리면 되지 않나요?”
“아…… 저는.”
견습 기사가 어두운 얼굴로 고개를 떨궜다.
“아이린 님에게 접근 금지 처분을 받아서.”
셀리나의 눈이 커졌다.
접근 금지 처분?
뭘 했기에 접근 금지 처분을 받지?
셀리나는 잔뜩 경계하며 조심스레 물었다.
“……누가 그런 처분을 내렸는지 여쭤도 될까요?”
“단장님께서 내리셨습니다. 반경 2m 안으로는 접근하지 말라고.”
담담한 대답에 셀리나는 까무러칠 듯 놀랐다.
도대체 무슨 짓을 했기에 남편이 직접 부인에 대한 접근 금지 명령을 내린단 말인가?
“그러셨…… 군요.”
살짝 몸을 뒤로 물리며 셀리나가 경계 가득한 눈으로 견습 기사를 바라보았다.
‘설마, 이 사람.’
아이린 님을 짝사랑하나?
그 감정을 들켰거나, 아니면 무슨 수작을 부려서 이안에게 반경 2m 접근 금지 명령까지 받은 게 분명했다.
‘어떻게 유부녀를……!’
생긴 건 단정하게 생겨선, 이렇게 파렴치한 사람이 다 있다니.
셀리나는 믿을 수 없는 눈으로 견습 기사를 바라보았다.
“대신 아이린 님께 전해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기회가 된다면요.”
딱딱한 목소리에 견습 기사가 의아한 얼굴을 했다.
* * *
“뭐라고요?”
아네트가 전해 온 말에 나는 소스라치게 놀랐다.
“엘리엇 군이 뭘 어쨌다고요?”
“그러니까, 이젠 엘리엇 군이 아니세요.”
아네트가 곤란하게 웃으며 말했다.
“세례명으로 조를 선택하셨다고 하더라고요.”
“말도 안 돼…….”
나는 소파로 주르륵 미끄러졌다.
내 엘리엇을 엘리엇이라고 부를 수 없다니.
‘조는 대체 어디서 굴러온 말 뼈다귀 같은 이름이냔 말이야!’
이게 다 이안 때문이다.
나는 이안을 향해 강한 적의를 불태웠다.
“승복할 수 없어요.”
“네?”
“그렇다면 중간 이름에라도 관여하겠어요. 대부의 아내 되는 자격으로!”
“중간 이름? ……그럼 조 엘리엇 씨가 되는 건가요?”
아네트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왜 이렇게까지 엘리엇이라는 이름에 집착하는지 이해하지 못하는 눈치였다.
“조 엘리엇…… 이상하지 않나? 음, 전달은 해 볼게요. 아! 그러고 보니 조 씨, 아까 셀리나 양과도 마주친 것 같더라고요.”
“어머나.”
나는 홱 아네트를 돌아보았다. 눈이 절로 반짝거렸다.
“좀 더 자세히 말해 봐요.”
“저도 렐에게 들은 거라 잘은 모르지만…….”
“둘이 친해졌다고 하던가요? 분위기가 어땠다던가요?”
나 없을 때 둘이 첫 만남을 갖다니!
아쉬워서 입맛이 다 썼다. 간접 경험이라도 하기 위해 나는 아네트를 채근했다.
“어서 말해 봐요. 셀리나 양이 뭐라고 하던가요? 엘리엇에 대해 한 말은 없나요?”
“아, 있었어요.”
“오! 뭐죠?”
역시 여주인공과 남주인공이니, 처음 만난 순간부터 스파크가 튄 걸까?
나는 두 손을 모은 채 두근거리는 마음으로 아네트의 대답을 기다렸다.
“눈빛이 음흉하대요.”
“……어?”
“되게 경계하던걸요? 잘은 모르지만.”
“……?”
“의외긴 했어요. 조 씨, 되게 담백한 성격이지 않나? 그런 면 때문에 은근히 더 인기가 많은 것 같기도 하고요. 음흉하다는 평은 처음 들어 보네요.”
내 머릿속에 물음표가 가득 들어찼다.
음흉하다니. 내가 알고 있는 ‘음흉하다’의 사전적 정의가 바뀌었나?
‘엘리엇, 도대체 셀리나에게 무슨 짓을 한 거야?’
초장부터 엇나가는 둘의 로맨스에 나는 크나큰 충격을 받아 비틀거렸다.
* * *
천공섬에 대한 이야기로 수도가 한바탕 달아올랐다.
당연한 일이었다. 수도에 집이 있는 사람들에겐 모조리 초대장이 갔으니까.
그러나 모두에게 똑같은 초대장이 간 것은 아니었다.
알고 보니 대부분의 초대장은 내가 받은 보라색 초대장과 달리 하얀색이었다고 한다.
그리고 내게 온 보라색 초대장이 바로 일종의 VIP용이었다.
‘뭐가 다른 건지는 모르겠지만, 일단 좋은 게 좋은 거겠지?’
나는 이 VIP 초대장을 가지고 이안을 끈질기게 설득했다.
저번 마탑 방문의 기억이 영 좋지 않았는지, 이안은 좀처럼 날 마탑에 보내지 않으려 했다.
“차라리 그럼 저 혼자 가겠습니다.”
“절대 안 돼요!”
이안 혼자 리젤로와 만나게 했다간 어떻게 될지 훤했다. 최소 말싸움, 최대 수도가 박살 나는 전투가 벌어지겠지.
리젤로와 거래하는 자리엔 반드시 내가 있어야 했다.
다행히 나는 천공섬 초대장에 적힌 날짜가 다가오기 전에 이안을 설득할 수 있었다.
이안 곁에서 한시도 떨어지지 않기, 돌발 행동은 일절 하지 않기라는 조건을 단 채.
‘아니, 내가 무슨 유치원생이냐고.’
썩 유쾌한 기분은 아니었으나, 어쨌든 두 조건을 수락한 덕에 나는 무사히 이안을 끌고 파티에 참석할 수 있게 되었다.
그렇게 파티 당일이 되었다.
이른 오후부터 외출 준비를 한 나는, 이안과 함께 초대장에 적힌 장소로 향했다. 장소는 수도 성벽 외곽이었다.
도착해 보니 이미 먼저 온 사람들로 인파가 바글바글했다.
‘와…… 잘 꾸며 놨네.’
도착한 곳은 마치 거대한 정원 같았다.
막 물들기 시작한 단풍으로 알록달록한 정경을 바라보며 나는 감탄을 흘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