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3화
“황제가 한 짓이군요.”
나는 꾹 주먹을 말아쥐며 말했다.
“증거를 인멸해 놓은 거네요.”
“복원 마법의 존재도 모를 정도로 바보는 아니니까.”
이안은 복원 마법이라는 가능성에 대해 어떠한 기대도 걸고 있지 않은 듯했다.
하긴, 십 년도 훌쩍 넘는 기간 동안 복수의 칼을 갈아 온 그가 이 방법을 생각해 보지 않았을 리 없겠지.
하지만 왜일까. 나는 그 가능성에 계속해서 눈길이 갔다.
‘원작에서는 어땠지?’
원작의 클라이맥스는 블록버스터가 따로 없었다.
황궁이 폭파되고, 무너진 잔해에 사람들이 깔려 다쳤다. 목숨을 잃은 사람도 부지기수였다.
그 아수라장 한가운데에 여주인공, 셀리나도 있었다.
폭발에 휘말린 셀리나는 무너지는 궁 속에 갇히고 말았다. 워낙 거대한 폭발이었기에 잔해를 치우는 일만도 쉽지가 않았다.
마침내 잔해를 모두 들어내었는데도 그 안에서 셀리나는 발견되지 않았다.
그때 엘리엇은 그야말로 미쳐 버렸다. 초조함과 절망에 제정신을 잃은 묘사가 지금도 생생했다.
셀리나의 시체라도 발견되었다면 체념했을 텐데, 잔해 속에선 그녀의 머리카락 하나조차도 찾아볼 수 없었다. 미친 사람처럼 하루 종일 잔해만 뒤지고 다니던 엘리엇은 어느 순간 마탑에 찾아갔었다.
‘거기서 리젤로에게 복원 마법을 의뢰했었지.’
황궁이 폭발하던 당시, 셀리나를 잃어버렸던 그때 그 장소가 지닌 기억을 되살리기 위한 복원 마법을.
엘리엇이 고용한 건 리젤로뿐만이 아니었다. 마탑 소속이든, 소속이 아니든 모든 마법사에게 복원 마법을 마치 경매처럼 의뢰했다.
그때 그가 내건 보상은 바로 자기 자신이었다.
‘이안을 물리치면서, 엘리엇의 주가는 최대치를 달리고 있을 시점이었지.’
그런 엘리엇 자체를 보상으로 내걸었으니 당연히 마법사들은 앞다투어 지원했다.
그 뒤엔 또 복잡한 내용의 에피소드가 진행되었지만, 중요한 건 이거다. 아무튼 엘리엇의 거래는 성공했었다는 것.
‘폭파로 완전히 박살 난 황궁에도 마법사들은 어떻게든 복원 마법을 시전했었어.’
황제가 폐궁을 어느 정도까지 망쳐 놓았는지는 알 수 없었다.
하지만, 원작에서 엘리엇이 결국 셀리나를 찾아냈듯 우리 역시 증거를 찾아낼 수 있지 않을까?
“이안 님.”
결심한 나는 이안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이안이 경계 어린 눈으로 그런 나를 마주 보았다.
“이번엔 또 무슨 꿍꿍이입니까?”
“네? 꿍꿍이라뇨.”
내 결심을 전달하기 일보 직전이었는데, 뜬금없는 이안의 딴지에 김이 팍 새 버렸다.
“그대가 그런 표정을 할 때면 늘 나를 당혹스럽게 만드는 말이 뒤따랐던 것 같아서.”
“……종종 이안 님은 저를 일곱 살짜리 사고뭉치처럼 표현하시는 것 아세요? 그거 굉장한 모욕이랍니다.”
우아하게 지적하자 이안이 어깨를 으쓱였다.
“설마. 그대를 일곱 살이라고 생각했다면 아무리 연기라고 해도 그런 짓을―”
이안의 말이 뚝 끊겼다.
‘그런 짓’이 어떤 짓인지 짐작해 냄과 동시에 볼이 뜨끈하게 달아올랐다.
‘갑자기 그 얘기는 왜 꺼내는 거야?!’
제정신인가, 이 사람!
대차게 이안을 노려보고 싶었지만, 하필 입술을 겹치던 때의 기억을 상기당하는 바람에 그럴 수도 없었다.
이안이 입속으로 제 혀를 짓씹는 것이 보였다.
다행히 그런 일로 날 놀릴 만큼 불한당은 아니고, 이안 역시 말실수를 한 것이었던 모양이다.
“……그래서.”
노골적으로 말꼬리를 돌리며 이안이 말했다.
“아까는 무슨 말을 하려고 했던 겁니까?”
“아, 음. 그러니까.”
당황으로 메마른 목을 가다듬으며 나는 가까스로 아무렇지 않은 목소리를 냈다.
무슨 말을 하려고 했더라, 중요한 이야기였는데…… 아, 그래.
“마탑에 다시 찾아가죠, 저희.”
“……마탑?”
“탑주님을 만날 필요가 있어요.”
그러자 내 눈을 피하고 있던 이안이 홱 나를 돌아보았다.
“그자가 당신과 다시 대면하게 될 일은 없을 겁니다.”
“이안 님, 그분을 경계하시는 건 이해하지만.”
나는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마탑에서의 사건 이후 이안은 리젤로를 굉장히 싫어하게 되었다.
이건 의미가 컸다. 이안은 사람에 대해 딱히 좋고 싫은 감정을 갖지 않는 편인데, 특별히 리젤로는 몹시 싫어하게 된 것이다. 부정적인 쪽으로의 특별 대우였다.
“그분은 우리에게 해를 끼치지 않을 거예요. 그건 장담해요. ……돈만 제대로 지불한다면 말이죠.”
리젤로는 의뭉스럽기 그지없는 인물이지만, 그를 움직이는 열쇠만 알고 있다면 그만큼 단순한 사람도 없었다.
열쇠는 물론 돈을 말했다.
“전부터 생각한 건데. 마탑주에 대해 꽤나 잘 아시는 것처럼 말씀하십니다?”
이안이 삐딱하게 고개를 기울이며 말했다. 말꼬리까지 빈정거리듯 올린 탓에 몹시 불량스럽게 들렸다.
‘왜 이래, 또.’
아무리 생각해도 이안은 리젤로라는 이름에 예민했다.
나야 원작 독자이므로 리젤로를 믿을 근거가 충분했지만, 이안에게 그런 말을 할 수는 없었다.
“잘 알다뇨. 제가 그분과 무슨 친분이 있다고 그러세요?”
“그런데 어떻게 해를 끼치지 않을 거라고 장담하신다는 겁니까?”
“……짐작한 거죠. 세간의 소문에 의하면, 탑주님은 비용만 지불한다면 손님 대접 하나는 제대로 해 준다고 하더군요.”
“그래서.”
이안이 불쾌한 듯 미간을 좁히며 말했다.
“그자에게 복원 마법이라도 의뢰해 보자, 이건가요?”
“네. 바로 그거예요.”
“그대는 생각보다 순진한 구석이 있군요.”
등받이 깊숙이 몸을 기대며 이안이 픽 웃었다.
애송이 취급당하는 기분에 나는 한쪽 눈썹을 휙 치켜올렸다.
“무슨 말씀이시죠?”
“마탑주가 아무리 돈을 밝힌다고는 하나, 황제와 척질 일을 만들려고 하지는 않을 겁니다. 사업 기반이 이 수도에 있는 이상.”
“…….”
틀린 말은 아니었다.
아무리 리젤로라고 해도 돈만 쥐여 주면 전부 다 해 주는 손쉬운 심부름꾼은 아니었다.
그에게도 의뢰를 받아들이고 거절하는 기준 같은 건 있었다. 황제 몰래 폐궁의 기억을 복원해 달라는 의뢰는 아마 웬만해선 받아들이지 않으리라.
‘……다른 아무나가 의뢰한다면, 그렇겠지.’
하지만 나는 ‘아무나’가 아니었다.
이건 근거 없는 자신감이 아니다. 나는 홱 고개 들어 이안을 바라보았다.
“제가 의뢰한다면 들어주실 확률이 높을걸요.”
“……무슨 말입니까?”
방금까지 여유롭게 나를 비웃던 이안이 돌연 표정을 굳혔다.
“역시 그자와 무슨 친분이라도―”
“있죠. 친분.”
나는 자신 있게 미소 지었다.
“마탑에 성마석을 쥐여 준 게 저잖아요.”
물론 정확히 말하면 내가 쥐여 준 건 아니다. 발견한 것 역시 리칼리온 마을 사람들이지 나는 아니었다.
하지만 다행스럽게도, 리젤로는 성마석을 발견해 낸 주역이 나라고 생각하는 것 같았다.
아직 성마석 연구가 많이 이루어지지는 않았다. 하지만 리젤로라면 지금도 그 마석이 지닌 어마어마한 가치를 알아보고 있을 터였다.
‘그리고 리젤로는 은원을 잊지 않지.’
즉, 성마석을 안겨다 준 나는 리젤로에게 일종의 은인이나 다름없는 셈이라는 이야기였다.
“탑주님과 독대하게 해 주세요. 제가 거래를 받아들이도록 그 사람을 설득해 볼게요.”
“…….”
나를 빤히 바라보던 이안이, 잠시 뒤 입가를 일그러뜨리며 한숨 쉬었다.
“제가 그걸 허락할 것 같습니까?”
“왜 반대하시는 거죠? 그분이 위험한 사람이라?”
“그런 차원의 이야기가 아닙니다.”
답답한 듯 이안이 미간을 좁힌 채 나를 지그시 바라보았다.
“그댄 전혀 모르는군요. 그자가 당신을 볼 때 어떤 표정과 눈빛을 하는지.”
그게 무슨 소리지?
의아함에 눈을 크게 뜬 순간이었다.
똑똑, 바깥에서 노크 소리가 들렸다.
“아이린 님, 차를 달여 왔어요.”
소곤소곤 속삭이는 목소리에 긴장이 탁 풀려 버렸다.
셀리나의 목소리였다.
“들어와요.”
셀리나가 조심조심 찻주전자 담긴 트레이를 밀며 들어왔다.
방금까지 이안과 나누던 대화에도 불구하고, 그 모습을 보니 절로 흐뭇한 기분이 들었다.
‘최선을 다하는 것 좀 봐.’
셀리나는 시녀 교육을 아주 성공적으로 이수하고 있었다.
수도 예절은 배워 본 적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타고난 기품과 우아함 덕에 셀리나의 학습 속도는 무척이나 빨랐다.
지금 역시, 찻잔에 차를 따르는 동작이 한 폭의 그림처럼 어여쁘기 그지없었다.
‘……아니, 잠깐. 좀 떨리고 있기는 하네.’
자세히 보니 찻주전자를 쥔 손끝이 조금 떨리고 있었다.
왜 그러지? 아침에는 아주 잘 따랐는데…… 아. 혹시.
나는 이안을 돌아보았다. 나 혼자뿐이었던 아침과 달리, 지금 이 자리에는 이안이 있었다.
그러고 보니 이안과 셀리나는 여태 만난 적이 없었다.
‘지금이 둘의 첫 만남, 이구나.’
그 사실을 상기하자 문득 가슴이 쿵쿵 뛰기 시작했다.
나는 살며시 이안과 셀리나를 번갈아 바라보았다.
지금이 바로 둘이 처음 만나게 된 순간이라 생각하니, 셀리나의 떨림이 이해가 되었다.
셀리나에겐, 첫사랑을 처음으로 맞닥뜨린 순간일 테니까.
‘……저 죄 많은 인간.’
나는 무심한 얼굴로 차를 홀짝이는 이안을 말없이 노려보았다.
저 모습이 오늘따라 이렇게 얄미워 보일 수가 없었다. 나조차 내 감정이 이해가 되지 않을 정도로.
셀리나가 손끝을 계속해서 떨자, 이안이 흘긋 그쪽을 바라보았다. 그러자 셀리나의 손끝이 더 사정없이 떨리기 시작했다.
나는 그 모습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어쩐지 입맛이 썼다.
누군가가 사랑에 빠지게 되는 순간을 목도하는 게, 흐뭇하지 않을 때도 있다는 걸 처음 알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