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01화 (101/161)

101화

황제의 목소리는 분노로 가득 차 있었다.

“네놈이 내 동생에 대해 잘못된 정보를 제보하지 않았나?”

“그게 저자입니까?”

이안의 눈이 서늘히 번득였다. 등골에 쭈뼛 소름이 돋는 것과 함께 에드워드는 직감했다. 이 자리를 무사히 넘기지 않는다면 제 목숨을 남아나지 않으리란 걸.

“폐하. 제가 함정에 빠졌습니다.”

이안 뒤로 삐죽이 보이는 분홍색 머리카락을 노려보며 에드워드가 외쳤다.

“저것이 절 골탕 먹인 겁니다. 비밀 통로에 대해 알려 준 것도, 반역 모의에 대해 제보한 것도 저것입니다!”

에드워드의 통렬한 외침에 여기저기서 수군거림이 터져 나왔다.

“저것?”

“지금 성녀님을 두고 저것이라고 한 거야?”

에드워드가 황급히 덧붙였다.

“저 여자는 성녀 같은 게 아닙니다. 제 하수인입니다!”

“성녀 아이린이 네놈의 하수인이라고?”

황제가 당장이라도 찢어 버릴 듯 에드워드를 노려보았다.

“미쳐 버린 거냐?”

“믿어 주십시오, 폐하. 확실한 증거가 있습니다!”

에드워드가 다급히 외쳤다. 근위 기사들이 혼란스러운 눈으로 서로에게 눈짓했다.

‘증거가 있다니, 저게 대체 무슨 소리야? 성녀님이 실은 성녀님이 아니라는 증거가 있다고?’

‘당장 불경죄로 잡아넣어야 하는 것 아니야?’

쏟아지는 눈총 속에서 에드워드가 아이린을 가리켰다.

“저 여자의 허벅지를 걷어 보십시오!”

“미친놈.”

“제정신이 아니군!”

마침내 참지 못하고 근위 기사들이 한 마디씩을 내뱉었다.

이 많은 사람 앞에서 레이디의 허벅지를 걷어붙이라니. 제정신인 신사라면 결코 입 밖으로 낼 수 없는 말이었다.

황제는 분노하다 못해 차갑게 식은 눈으로 에드워드를 노려보았다.

“내게 감히 지금, 성녀의 허벅지를 걷어 보라 명령한 게냐?”

“거기 확실한 증거가 있습니다. 그것만 확인한다면 절 믿어 주실 수 있을 겁니다! 76번!”

아이린이 있는 방향을 노려보며 에드워드가 고함쳤다.

“당장 이리 나와 사실대로 고하지 못해!”

이안의 어깨 뒤로 아이린이 살그머니 고개를 내밀었다.

에드워드를 바라보는 아이린의 금색 눈이 토끼처럼 커져선 물기를 머금고 있었다. 그 모습에 막심은 절로 탄식을 터뜨렸다.

‘저렇게 당황하시다니.’

갑자기 은밀한 시간을 방해받은 데다가, 웬 놈팡이에게 성녀가 아니라는 모욕을 받은 것으로도 모자라 이번엔 허벅지를 까라는 희롱까지 당하다니.

막심 자신이 아이린이라 하더라도 이 상황이 견딜 수 없을 만큼 수치스러울 것 같았다.

‘폐하께서 저놈을 당장 두들겨 패라 하면 기꺼이 명령대로 할 텐데!’

뻔뻔한 에드워드를 노려보며 막심은 이를 부득 갈았다.

“좋아. 이실직고하지 않겠다면 내가 그러게 만들어 주지!”

에드워드가 씨근덕대며 한 손을 들어 올렸다.

그러고는 거창한 동작으로 집게손가락과 엄지를 비볐다.

“…….”

“…….”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에드워드가 마법이라도 부리는 줄 알고 경계했던 막심은 허탈한 기분이 들었다. 에드워드가 당황한 얼굴로 재차 손가락을 비벼 댔다.

“이럴 리가 없는데. 왜 반응이 없…… 혹시 참고 있는 거냐? 하! 참을 수 있는 고통이 아닐 텐데!”

그렇게 말하며 연신 손가락을 비비는 에드워드는 정신이 나간 사람 같았다. 막심이 보기에 진작에 정신 병동에 들어갔어야만 하는 환자였다.

막심은 이젠 그의 비신사적인 행동에 화가 나는 것뿐만 아니라 애잔한 기분이 들기까지 했다.

“이, 이안 님.”

아이린이 떨리는 목소리로 속삭였다.

“저 무서워요.”

“가, 가증스러운 것!”

에드워드가 노성을 토했다. 그러자 아이린이 깜짝 놀라 다시금 이안의 어깨 뒤로 숨었다.

“그 더러운 혀를.”

아이린을 제 뒤로 숨긴 채 이안이 검을 빼 들었다.

“지금 당장 두 동강 내 주겠다.”

“이, 이안 님. 속고 계신 겁니다!”

에드워드가 화들짝 놀라 이번엔 이안에게 애원하듯 외쳤다.

“저 여자는 우리의 하수인입니다. 우리가 이안 님의 침실에 숨어들도록 시킨 것이지요! 어떻게 저것이 이안 님을 구워삶은 것인지는 모르겠으나, 속으신 겁니다!”

“오늘 내뱉은 한마디 한마디를 후회하게 해 주겠다.”

공기조차 얼려 버릴 듯 서늘히 얼어붙은 눈으로 이안이 말했다.

검을 빼든 채 제게 다가오는 이안을 바라보며 에드워드가 비틀비틀 뒷걸음질 쳤다.

“이안 님, 제발 제 말을 한 번만 들어 보십시오. 저 여자의 허벅지를 한 번만 들춰 보시면 됩니다! 지금이라면 저주가 발동되어 문양이 뚜렷이 드러나 있을 겁니다!”

“폐하.”

차갑게 불타는 눈을 한 이안이 낮게 뇌까렸다.

“이런 정신병자는 대체 어디서 주워 오신 겁니까?”

“이안 님, 제발!”

그때 가늘게 떨리는 목소리가 끼어들었다.

“이안 님.”

이안은 뒤를 돌아보았다.

아이린이 겁먹은 표정으로 이안의 손목을 부여잡고 있었다.

“저, 괜찮아요.”

“아이린.”

“이대로라면 그냥 저 사람을 처단한다 해도, 저에 대한 의구심은 여기 계신 분들의 뇌리에 남아 있겠죠.”

‘아뇨, 성녀님!’

막심이 깜짝 놀라 생각했다.

‘누가 저런 미친놈의 말을 귀담아듣습니까!’

막심에게 아이린은 그냥 미친개에게 물린 가엾은 희생양일 뿐이었다.

하지만 아이린의 말이 틀린 건 아니었다. 이 자리에 있는 기사 중 누군가는 에드워드의 말이 만에 하나 진실일지도 모른다고 의심하고 있을지 몰랐다.

“그러니, 여기서.”

아이린이 결심한 듯 표정을 굳히곤 이어 말했다.

“의심의 여지를 없애겠어요.”

“아이린. 그럴 필요 없습니다. 루시안! 부인께서 쉬실 수 있도록 어서 침실로 모셔가라.”

“아뇨.”

아이린이 고개를 내저었다.

“전 정말 상관없어요. 제가 이안 님을 속였다는 의심을 받는 것보단, 이까짓 피부 좀 내보이는 편이 나으니까.”

그렇게 말하며 아이린이 치맛단을 반쯤 접어 올렸다.

‘으악!’

반사적으로 막심은 두 눈을 질끈 감았다. 그러나 다음 순간, 에드워드에게서부터 튀어나온 탄식 소리에 다시 눈을 떴다.

“이, 이게 무슨.”

드러난 아이린의 허벅지는 새하얗고 매끈했다.

우유로 만들어진 것처럼 투명한 피부에서 잡티 한 점 찾아볼 수 없었다.

에드워드가 말한 문양 같은 것은 그림자도 보이지 않았다.

“이, 이럴 리가 없는데.”

에드워드가 횡설수설하며 다시금 손가락을 비볐다.

여전히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어, 어째서 문양이. 저주가 어디로 갔지? 아, 그, 그래.”

에드워드가 아이린에게로 비틀거리며 다가갔다.

“분장이군. 분을 덮어서 문양 위를 가린 거야! 분장을 지우면 바로 문양이 보일 겁니다!”

아이린의 허벅지를 직접 쓸어 보기라도 할 기세로 에드워드의 발걸음이 빨라졌다. 깜짝 놀란 아이린이 드레스 자락을 놓곤 다시금 이안 뒤로 숨었다.

‘저런 미친놈이!’

에드워드의 도를 넘은 막장 행위에, 막심을 비롯해 기사도가 몸에 밴 기사들이 본능적으로 에드워드 앞을 가로막았다.

“감히 내 부인을 희롱한 죄는.”

기사들을 옆으로 치워 내며 이안이 에드워드에게로 다가갔다.

“죽음으로도 갚기 힘들 거다.”

검 끝으로 에드워드의 이마를 겨냥하며 이안이 말했다.

“하, 한 번만. 한 번만 더 기회를 주십시오.”

예리한 검 끝에 이마를 찔리면서도 에드워드가 횡설수설했다.

“뭔가 잘못된 것이 틀림없습니다. 이럴 리가 없습니다. 분명 저주가 걸려 있어야 하는데. 분명.”

“저주?”

이안이 차갑게 헛웃음을 내뱉었다.

“내 성녀께 저주가 걸려 있다고?”

막심 역시 깜짝 놀랐다. 성녀에게 저주가 걸려 있다니. 신성 모독도 이런 신성 모독이 없었다.

“그러니까, 제 말은.”

“내 부인의 정인으로서도, 엘룬교의 신도로서도 네놈은 도저히 용서할 수가 없겠군.”

더는 들을 가치도 없다는 듯 이안의 에드워드의 말을 잘랐다.

“포박하라.”

어느새 집결한 성기사단원들이 즉시 그의 명령을 수행했다.

“지하 심문실로 이동시켜.”

“이, 이안 님. 제 말을 들어 보십시오! 이안 님!”

포박당해 질질 끌려가면서도 에드워드는 외치길 멈추지 않았다.

그가 고함칠 때마다 아이린의 어깨가 놀라 움찔움찔 튀었다.

“부인.”

이안이 그런 아이린의 등을 감싸 안았다.

“방으로 돌아가서 쉬십시오. 오늘 일에 대해선 아무것도 생각하지 말고.”

“먼저 돌아가서 미안해요, 이안 님.”

아이린이 어깨를 잘게 떨며 말했다.

“너무 놀라서…… 조금 쉬어야 할 것 같아요.”

“그런 말씀 마십시오. 이런 일을 겪게 해 제 마음이 가장 아픕니다.”

이안이 나지막이 속삭였다.

지켜보고 있는 막심의 눈시울이 다 붉어질 정도로 안타까운 광경이었다.

‘이안 님께 저런 면모도 있었구나…….’

수도의 보석을 다 가져다 바칠 정도로 성녀를 끔찍이 사랑한다는 소문은 익히 들었지만, 막상 두 눈으로 보니 파급력이 달랐다.

막심은 저도 모르게 둘의 사랑을 마음 깊이 응원하게 되었다.

“고마워요, 이안 님.”

눈가를 닦은 아이린이 짐짓 씩씩한 표정을 지었다.

“저, 그럼 먼저 들어가 볼게요.”

“예. 루시안, 성녀님을 잘 보필해라.”

“네, 단장님. 저만 믿으십시오.”

루시안이 아이린을 데리고 조심스레 퇴장했다. 기사들이 그런 그녀를 위해 얼른 길을 비켜 주었다.

‘성녀님…… 부디 놀란 마음 잘 치유하시길.’

멀어지는 아이린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막심이 기도했다.

아이린이 시야에서 사라지자마자 이안의 표정이 돌변했다.

서리처럼 얼어붙은 표정으로 이안이 황제를 돌아보았다.

“형님께서 데려온 놈 때문에 제 부인께서 큰 상처를 입으셨습니다. 어찌하실 생각이십니까?”

“…….”

황제가 이를 지그시 악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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