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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0화 (100/161)

100화

깊이 후회하면서도 막심은 동료 기사들과 함께 테라스를 열어젖혔다. 황제의 명령에 불복종해도 역시 결과가 죽음인 것은 마찬가지였다.

‘적어도 이안 님께선 우릴 단칼에 죽여 줄 거야.’

울며 겨자 먹기로 들이닥친 테라스는 몹시 넓었다. 테라스보다는 공중 정원에 더 가까울 만큼.

“아무 곳에도 보이지 않습니다.”

기사 한 명이 근위 기사단장에게 속닥거렸다. 이안의 존재를 의식한 듯 아주 작고 속삭이는 목소리였다.

“다, 단장님. 저길 보십시오.”

그때 또 다른 기사 한 명이 어딘가를 가리켰다.

테라스 반대편으로 문이 나 있었다.

“……저긴가.”

근위 기사단장이 굳은 목소리로 말했다.

막심은 그가 그다음 말을 하지 않길 바랐지만, 기사단장은 마침내 명령을 뱉고 말았다.

“진입한다.”

근위 기사들은 대열을 맞춰 또 다른 문을 향해 빠르게 달려들었다.

문은 불투명해 그 너머가 보이지 않았다. 문을 둘러싼 기사들이 서로를 바라보곤 잠시 눈짓을 주고받았다.

근위 기사단장이 조용히 숫자를 셌다. 셋. 둘. 하나.

쾅!

“항복하십시오!”

거세게 외치며 근위 기사단장이 먼저 문을 박차고 들어갔다.

막심은 그 짧은 순간 그에게 진심으로 존경의 마음을 품었다.

그런데 뭔가 이상했다.

‘응?’

죽음조차 불사할 사람처럼 박차고 들어간 기사단장이 그 자리에 굳어 있었다.

덩달아 당황한 근위 기사들이 교통 체증에 걸린 마차들처럼 기사단장 뒤에서 머뭇거렸다.

뭐야. 대체 왜 저러시지?

막심은 귀신이라도 본 듯 굳어 버린 기사단장과 같은 곳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그 역시 마찬가지로 굳어 버렸다.

‘어?’

문 안에는 과연 성기사단장이 있기는 했다.

문제는 그 안에 있는 것이 성기사단장 혼자가 아니라는 점이었다.

이안의 무릎 위엔 웬 다른 사람 한 명이 앉아 있었다. 자세히 말하자면, 아름다운 레이디 한 명이.

솜사탕 같은 분홍색 머리를 풀어 헤친 그녀는 이안의 목덜미에 매달리듯 기대 있었다. 도대체 무슨 짓을 하고 있었는지 둘의 옷깃은 모두 반쯤 풀어 헤친 상태였다.

무엇보다도 둘은 고개를 겹친 채 다정히 입술을 맞추고 있었다.

‘세상에.’

벼락 맞은 나무처럼 딱딱히 굳은 와중에도 막심의 시선만은 멈추지 않았다.

옷깃 너머로 드러난 이안의 피부에는 분홍색 립스틱 자국이 물감처럼 번져 있었다. 촉촉이 젖어 있던 레이디의 벌꿀색 눈이 당황으로 물든 것이 보였다.

분홍색 머리. 금색 눈. 그리고 성기사단장의 무릎을 의자처럼 사용하고 있는 저 모습.

‘서, 성녀님이다.’

깨달음과 동시에 성기사단장이 입술을 움직였다.

“……무슨 짓이지?”

이안이 짜증 가득한 맹수처럼 느리게 몸을 일으켰다.

먼저 아이린을 제 등 뒤로 숨긴 이안이 들이닥친 기사들을 한 명씩 둘러보았다.

“이게 무슨 짓이냐고 물었는데.”

그 목소리는 저승사자의 것처럼 낮고 소름 끼쳤다.

입술에 립스틱 자국이 묻어 있는데도 그의 모습은 숨쉬기 힘들 만큼 위압적이었다. 그가 몸을 일으키자, 신장 자체가 그렇게 차이 나는 것은 아닌데도 마치 거인을 마주한 듯 막심은 기가 죽었다.

‘우리가 대체 무슨 짓을 한 거지?’

막심은 이안의 말에 대답할 수 없었다. 그조차도 대답을 모르기에.

‘우리는 대성당의 비밀 통로로 잡입해서, 평화롭게 놀고 있던 귀족들을 포박하고, 성기사단장의 개인 방을 박차고 들어가선 성녀님과 성기사단장의 은밀한 시간을…….’

방해했다.

정리하고 보니 이렇게 괴이쩍을 수가 없었다. 막심은 자신들이 무슨 짓을 저지른 건지 믿을 수가 없어 머릿속이 멍했다.

“붙잡았나!”

등 뒤에서 황제의 목소리가 들렸다.

굳은 와중에도 반사적으로 근위 기사들이 황제를 위해 자리를 터 주었다.

“아우여.”

근위 기사들 사이로 기세등등하게 걸음을 옮기며 황제가 말했다.

“이 제보를 받고 내가 내 귀를 얼마나 의심했는지 모를 거다. 어떻게 내 피를 나눈 네가 나를―”

거기까지 말한 황제의 입술이 멈췄다.

그제야 이안이 무슨 모습을 하고 있는지 발견한 모양이었다.

잠깐 당황한 황제가 곧 가까스로 말을 이었다.

“……해치기 위해 이렇게 반역 모의를 벌였단 말이냐?”

“반역 모의라 하셨습니까, 형님?”

이안이 그렇게 물으며 제 옷깃을 잠갔다. 헛웃음 어린 목소리가 낮게 가라앉아 있었다.

막심과 기사들은 천천히 제 옷깃 단추를 잠그는 이안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평생 수도에서 지내 오면서, 이안이 이렇게까지 흐트러져 있는 모습을 보는 건 난생처음이었다.

‘그야 당연히 그렇겠지.’

막심은 속으로 절규했다.

‘사랑하는 분과 은밀한 시간을 보내고 계시던 중이었으니까!’

이 방을 급습한 순간 이안과 아이린이 어떤 모습이었는지 떠올린 막심은 볼을 새빨갛게 붉혔다. 그건 농익은 부부의 모습이었다. 서로를 향한 욕심으로 가득한, 세상에 오직 둘밖엔 보이지 않는.

“제가 정말 형님을 칠 계획을 세우고 있었다면, 과연 이런 몰골이었겠습니까?”

손등으로 입술에 묻은 립스틱 자국을 지우며 이안이 말했다.

아까까지만 해도 기세가 등등하던 황제는 그 말에 대답하지 못했다. 이안이 차갑게 웃었다.

“어디서 무슨 말을 듣고 오신 건진 모르겠지만.”

“…….”

“이 아우, 실망했습니다. 고작 유언비어 따위에 지는 신뢰라니요.”

서늘한 목소리에 황제의 손끝이 움찔거렸다.

“나는, 확실한 제보를.”

“무슨 제보 말입니까.”

이안이 짜증스레 말하며 재킷을 벗어 등 뒤에 숨겨 놓은 아이린에게 가리듯이 덮어 주었다. 이 와중에도 그 손길이 다정하고도 정중해 막심은 침을 꿀꺽 삼켰다.

“내가 대성당 한복판에서 반역 모의를 벌인다고? 설마 그런 제보를 진심으로 믿으신 겁니까?”

신랄한 이죽거림에 황제의 표정이 무섭게 굳었다.

“내가 속았다고 말하고 싶은 거냐?”

“성서 해석본 토론 모임을 갖던 중이었습니다.”

이안이 성가신 목소리로 말했다.

“요즘 부인께서 성서에 대한 관심이 부쩍 높아지셔서. 학식 높은 분들과 관련 이야기를 나누는 자리를 마련했지요.”

“성서 모임?”

황제가 짐짓 여유로운 듯 픽 미소를 지었다.

하지만 그 입꼬리가 굳어 있는 것이 가까이 서 있는 막심에겐 보였다.

“그렇다면 더 이상하지. 성서 모임을 갖다가 왜 손님들만 내버려 두고 둘만 이런 곳에 있었단 말이냐? 단둘이, 이런 밀실에서. 이런 파렴치한 꼴을 하고 말이다.”

황제가 일부러 과장되게 이죽거렸다. 이안의 말을 반박할 논리가 떠오르지 않으니 일단은 일차원적으로 공격하려는 속셈이 뻔했다.

손님들을 초대해 두고 단둘이 은밀한 시간을 즐기다 대놓고 들킨 상황.

교양을 중시하는 여느 귀족 부부라면 입술을 깨물 만큼 수치스러울 상황이기는 했다. 그러나 이안은 거리낌 없이 대답했다.

“신혼이지 않습니까, 폐하?”

오늘 날씨에 대해 말하듯 태연한 어투로 이안이 이어 말했다.

“가진 지 얼마 되지 않은 사람인데, 당연히 시도 때도 없이 탐이 나지요.”

뒤에서 아이린의 주먹이 튀어나와 이안의 등을 퍽퍽 때렸다. 이런 상황만 아니었다면 웃음이 절로 나왔을 만큼 사랑스러운 모습이었다.

그 모습을 보니 막심의 죄책감은 더 깊어졌다. 수줍음 많으신 성녀님이 지금 얼마나 고통스러우실까?

“하. 그게 전부라 이 말이냐?”

황제가 반박했으나, 이미 그의 말에는 아무런 논리가 없었다.

“……폐하.”

근위 기사 한 명이 다급히 달려오더니 황제의 귓가에 무어라 속삭였다.

짧은 시간이나마 귀족들을 심문했으나 소득이 없었다는 내용이었다.

“……더 심문을 해 봐야 알겠지만, 아마 정말 아무것도 모르고 여기까지 온 이들 같습니다.”

기사의 보고에 황제가 이를 부득 갈았다.

그 모습을 관망하던 이안이 입을 열었다.

“누굽니까? 폐하에게 이따위 거짓 정보를 속삭인 인물이.”

“…….”

“이름을 말씀해 주시면 제가 직접 처리하러 가죠.”

황제는 한동안 아무 말이 없었다.

아무리 그라고 해도 나인과 손잡았다는 말을 함부로 발설할 수는 없었다.

‘내가 속았다고?’

분노로 황제의 주먹이 떨렸다.

실력 하나만큼은 확실하다는 그놈들의 명성을 믿은 것이 패착이었다.

정확히 말하면 가장 근본적인 원인은 이안을 무릎 꿇릴 수 있다는 생각에 눈이 먼 황제 자신이었지만, 황제의 화살은 자기 자신에게 돌아가진 않았다.

“반역의 증거가 아무것도 나오지 않습니다.”

또 다른 기사가 달려와 황제에게 속닥거리며 보고했다.

‘……제기랄.’

황제가 어금니를 악물었다.

권력의 정점에 선 황제라 해도 아무 증인도, 증거도 없이 성기사단장의 직위에 선 인물을 끌어내릴 순 없었다.

황제는 이를 갈며 마음 깊숙이 다짐했다. 오늘 이 치욕을 선사한 놈들에게 반드시 두 배만큼의 고통을 돌려주겠다고.

“제게 하실 말씀이 있지 않으십니까?”

이안이 황제를 빤히 내려다보며 말했다.

멀쩡한 사람을 반역도로 몰아붙여 쳐들어오기까지 했으니, 응당 사과를 해야 하는 상황이었다.

그러나 라시드는 차마 입술이 떨어지지 않았다.

그럴 줄 알았다는 듯 이안이 차게 웃었다.

“없으시다면 이만 나가 주십시오. 부인께서 많이 놀라셨습니다.”

그렇게 말한 이안은 뒤 돌아 제 부인을 살폈다. 아무도 보지 못하도록 제 몸으로 아이린을 단단히 가리고서.

“……울지 마십시오. 괜찮습니다.”

방금 전 황제를 몰아붙이던 모습은 온데간데없이, 녹을 듯 다정한 어투로 이안이 말했다.

세상에 둘밖엔 남지 않은 듯한 모습에 기사들은 저도 모르게 시선을 돌렸다.

‘정말 금실 좋으신 분들이야.’

‘가엾으신 성녀님. 얼마나 수치스러우실까.’

‘울기까지 하셨다니, 아아.’

절로 차오르는 동정심에 기사들이 고개를 내저었다. 신사로서 이런 모습을 들킨 레이디가 얼마나 수줍고 창피할지 충분히 예상이 가는 바였다.

“……비첸.”

마침내 황제가 입을 열었다. 분노로 갈라진 목소리였다.

“비첸!”

“예, 폐하!”

뒤통수를 맞은 듯 시종일관 멍한 얼굴이던 비첸 남작이, 그제야 황급히 앞으로 달려 나왔다.

황제가 갈아먹을 듯 에드워드 비첸을 노려보았다.

“이게, 대체, 어찌 된 영문인지, 설명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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