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99화 (99/161)

99화

“네. 하루에 너무 많은 진도를 나가면 체할지도 모르니까요.”

누가? 내가.

뒷말은 가까스로 삼키며 나는 황급히 등을 돌렸다.

“그러니 오늘은 여기까지예요. 빨리 돌아가죠. 날이 밝으면 사람들이 올지도 모르니.”

“새벽 한 시입니다만.”

“정말요? 벌써 시간이 그렇게 됐네요.”

횡설수설하며 뒤돌아선 나는 최대한 티 나지 않게 내 뺨을 착 쳤다.

‘제발 정신 차려라, 이서연.’

고작 입맞춤 때문에 이안 앞에서 이렇게 동요한 티를 낼 순 없었다. 그래, 고작 입맞춤 때문에.

비록 태어나서 타인과는 처음 맞대 본 입술이었지만.

“어서 돌아가요.”

문제는 돌아가 봤자 이안과 한 침대에서 잠을 청해야 한다는 점이었다.

그 사실을 떠올린 나는 질끈 눈을 감았다.

그래도 차라리 불을 다 끌 수 있는 침실 안이 여기보다는 낫다. 그렇게 생각하며 빠르게 걸음을 옮기려던 때였다.

“아이린.”

커다란 손이 내 어깨를 잡았다. 나는 움찔 굳어 그 자리에 멈춰 섰다.

“싫었습니까?”

등 뒤에서 들려온 목소리에 나는 눈을 크게 떴다.

대답이 없자 이안이 재차 물었다.

“이렇게 도망칠 만큼 싫었던 거냐고 물었습니다.”

“……좋고 싫고의 문제가 아니잖아요. 어차피 연습일 뿐인걸요.”

아까 했던 말을 앵무새처럼 되풀이하자, 등 뒤에서 묘한 소리가 들려왔다. 헛웃음 소리인지 한숨 소리인지 분간할 수 없는.

잠시 뒤 이안이 말했다.

“어차피 연습일 뿐이다. 틀린 말은 아니군요.”

이때까지와 확연히 다른, 얼음처럼 차가운 목소리였다.

나는 이안의 표정을 확인하고 싶었으나 차마 시선을 돌리지 못했다.

나란히 침실로 돌아가는 동안 우리 사이엔 정적만이 흘렀다.

* * *

황실 근위대 소속 막심은 자신의 일에 자부심이 큰 편이었다.

당연한 일이었다. 황실 근위대라면 모든 기사가 우러러볼 지위였으니. 명성답게 황실 근위 기사들은 수행하는 작업들도 고상하기 짝이 없었다.

그런데 오늘의 임무는 평소와 어딘가가 달랐다.

‘대체 왜 이런 일을 해야 하는 거지?’

한밤중, 몰래 대성당에 침입하며 막심은 지울 수 없는 의문을 떠올렸다.

그는 영광스러운 근위 기사였지 첩보원이나 도둑놈이 아니었다. 신성한 대성당에 마치 찔리는 게 있는 사람처럼 숨어드는 일은 좀처럼 달갑지 않았다.

‘근위 기사단장님은 왜 이런 일을 해야 하는지 설명도 안 해 주시고.’

무엇보다 거슬리는 건 근위 기사단장 옆에 시종일관 서 있는 남자의 존재였다.

기사단장이 ‘비첸 남작님’이라 부르는 존재는, 마치 제가 기사단장의 상사라도 된 듯 시종일관 거들먹거리는 태도였다. 게다가 그는 실제로 아까부터 기사단장에게 명령을 내리고 있었다.

‘황제 폐하께서 붙이신 사람인가.’

이해가 안 가는 일투성이였으나, 어쩌겠나. 상사가 까라면 까야지. 심지어 그 상사가 까마득한 황제 폐하라면 더더욱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진입하라.”

그러나 근위 기사단장이 누가 봐도 수상한 비밀 통로를 가리키며 그렇게 명령한 순간, 막심의 찝찝함은 극에 달했다.

‘뭔데. 이 통로는?’

커다란 그림에 걸려 있던 장치를 해제하자, 그 뒤로 통로가 나타났다. 어디로 통하는지도 알 수 없었다.

‘꼭 대성당에 도둑질이라도 하러 온 것 같군…… 돌아가기 전에 신상에 기도라도 하고 가야겠어.’

대대로 독실한 신자 집안에서 자라온 막심은 이 상황이 몹시도 달갑지 않았다.

속으로 투덜거리면서도 막심은 앞 기사를 따라 통로 안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통로를 따라 계단을 오르는데, 오르면 오를수록 위에서부터 희미한 소리가 들려왔다. 사람들의 웃음소리 같았다.

통로의 끝에 다다르자 근위 기사단장이 기사들을 돌아보았다.

“여기서 잠시 대기한다.”

기사단장이 조용히 속닥거렸다. 여전히 꺼림칙한 기분을 떨치지 못한 막심은 기사단장의 표정이라도 읽어 보기 위해 그를 뚫어져라 쳐다보았다.

그때 기사단장이 절도 있는 동작으로 경례했다.

“오셨습니까. 명령 기다리고 있습니다.”

막심은 긴장한 채 뒤를 돌아보았다. 근위 기사단장이 경례할 대상은 대륙에 한 명밖엔 없었다.

‘헉. 황제 폐하다.’

황제, 라시드가 어느새 저 아래에서부터 계단을 올라오고 있었다.

기사들이 빠르게 양옆으로 물러나 황제를 위한 공간을 만들었다.

오만한 걸음걸이로 그 사이를 지나온 황제가 통로 끝을 노려보았다. 사람들의 웃음소리와 이야기 소리가 끊이지 않는 저 통로 밖을.

“여긴가?”

“예, 폐하. 이곳입니다.”

비첸 남작이 문을 가리켰다.

터질듯한 긴장이 통로 안을 가득 메웠다. 몇 초의 시간이 더 흐른 뒤였다.

“진격하라.”

황제의 나지막한 명령과 함께 기사단장이 통로의 출입문을 박찼다.

와장창, 요란한 소리와 함께 문이 힘없이 풀썩 쓰러졌다.

“뭐, 뭐야?”

“꺄아악!”

저 통로 밖에서 혼란스러운 비명이 들려왔다.

기사들이 일사불란하게 통로를 빠져나갔다. 덩달아 빠져나간 막심은 펼쳐진 광경에 잠시 당황했다.

‘뭐지?’

통로 바깥에는 우아하면서도 넓은 방이 펼쳐져 있었다.

그 방에서 꽤 많은 수의 귀족들이 삼삼오오 모여 와인을 마시고 있었다. 누가 봐도 한가로운 사교 모임의 한가운데였다.

“다, 당신들은?”

갑작스러운 습격에 당황한 귀족들이 근위 기사단복을 알아보고는 혼란스러운 눈을 했다.

황제가 뒤에서 일갈했다.

“신속히 제압하라! 단 한 명도 놓치지 말고.”

“폐, 폐하?! 이게 대체 어찌 된 일― 우웁!”

황제에게 따져 묻던 귀족 한 명의 입에 재갈이 쑤셔박혔다. 황제가 입을 가로막힌 귀족을 바라보며 이죽거렸다.

“아드마르 백작이 아니오. 설마 그대까지 이런 곳에 있을 줄은 몰랐는데.”

“으읍, 으으읍?!”

아드마르 백작이 튀어나올 듯 눈을 크게 뜨곤 무어라 외쳤으나, 재갈 탓에 내용은 들리지 않았다.

기사들의 손에 빠르게 제압당하고 있는 귀족들을 돌아보며 황제가 말했다.

“눈에 익은 얼굴들이군. 아니, 외무대신도 있질 않나. 믿을 수가 없군.”

이 사람들이 전부 반역도라고?

명령대로 귀족들을 제압하면서도 막심은 내심 혼란에 빠졌다.

이 귀족들은 막심 역시 잘 알고 있는 사람들이었다. 그만큼 황궁에도 자주 드나드는 영향력 있는 인사들이었다.

‘이렇게 많은 사람이 반역도인 거라면, 우리나라 좀 큰일 난 거 아니야?’

더군다나 이곳에는 외무대신과 대법관도 있었다.

만약 이 사람들이 전부 반역도라면 모두 목이 잘릴 텐데, 그건 당장 제국의 앞날을 책임져야 할 사람들이 사라진다는 이야기였다.

그러나 황제의 생각이 거기까지 미치고 있는지는 미지수였다. 그의 눈은 자신을 거역한 이들을 향한 분노와 광기로 번들거렸다.

“모두 다 포박하라. 한 명도 빠짐없이!”

씨근덕거리며 명령을 토해 낸 황제가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그놈은 어디 있지?”

그놈은 또 누굴 말하는 것일까?

이제 막심은 황제가 이번엔 무슨 명령을 내릴지 두려웠다.

그래도 명령은 명령. 아직 포박하지 못한 귀족을 찾아 주위를 살피던 막심은 문득 천장에 그려진 벽화를 발견했다.

‘어?’

천장에는 유려한 초상화들이 그려져 있었다. 하나같이 그 얼굴들이 익숙했다.

기억을 뒤진 막심은 곧 그들이 역대 성기사단장들의 얼굴임을 떠올려 냈다.

‘……그럼, 마지막에 그려져 있는 사람은.’

제일 끝을 향해 시선을 돌린 막심은 침을 꿀꺽 삼켰다. 역시 거기엔 막심이 잘 알고 있는 얼굴이 그려져 있었다. 이안 에스테반의 푸른 눈이 그림임에도 불구하고 살아 있는 것처럼 지상의 난리 법석을 무심히 내려다보았다.

‘잠깐. 역대 성기사단장들의 초상화가 전부 그려져 있는 거라면, 여기는…….’

성기사단장의 집무실이란 이야기다.

그 깨달음과 함께 얼음을 끼얹은 듯 등골이 서늘해졌다.

‘나 지금 성기사단장의 집무실을 침입한 거야?’

“그놈을 찾아!”

황제가 다시금 외쳤다.

그가 찾는 ‘그놈’이 누구일지 추론하기란 어렵지 않았다. 아마 이 방의 주인이리라. 즉…….

‘미친. 지금 성기사단장님께서 역도라는 거야?’

막심의 손끝이 충격으로 떨려 왔다.

“폐하, 방 안엔 보이지 않습니다.”

“저자의 재갈을 풀어라.”

황제가 아드마르 백작을 가리키며 말했다. 강제로 무릎 꿇은 백작이 덜덜 떨며 황제를 올려다보았다.

재갈이 풀린 백작을 내려다보며 황제가 짐짓 자상한 주군인 척 하문했다.

“내 아우는 어디에 있지?”

“폐, 폐하. 이게 도대체 다 어찌 된 영문인지―”

“쉿. 곧 죽을 놈의 우는 소리 따윈 듣고 싶지 않다. 그놈이 어디 있는지나 말해.”

“이, 이안 님이라면, 히끅.”

지나치게 놀랐는지 백작이 딸꾹질을 하기 시작했다. 히끅거리며 백작이 어딘가를 가리켰다.

“하, 한참 전부터 저곳에서 나오지 않고 계셨습니다.”

백작이 가리킨 곳은 집무실 한편으로 널찍이 난 테라스였다. 두꺼운 유리문으로 가로막힌 테라스 너머는 아주 넓어 보였다.

“그래, 그렇단 말이지.”

사냥감을 몰아넣은 사냥꾼의 표정으로 황제가 미소 지었다.

“잡아 와라.”

테라스를 가리키며 황제가 명했다.

황제의 명령이라면 즉시 수행해야 할 근위 기사들이 순간 시간이 멎은 듯 멈칫거렸다.

그들의 머릿속엔 모두 하나의 생각이 떠올라 있을 터였다.

‘이안 에스테반을 잡아 오라고?!’

설마, 농담이시겠지. 아니면 내가 꿈을 꾸고 있거나.

막심은 간절한 눈으로 황제를 바라보았다. 황제가 노한 표정으로 외쳤다.

“당장!”

여기가 내 묫자리구나.

죽는 날이 다가왔음을 직감한 막심이 질끈 눈을 감았다.

성기사단장에게 덤비다가 세상 하직하는 날인 줄 알았다면 오늘 아침 어머님께 인사라도 살갑게 하고 올 걸 그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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