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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8화 (98/161)

98화

나는 그림자를 뒤로한 채 밤의 대성당을 조심스레 거닐었다.

이안의 집무실은 항상 문 앞을 기사들이 지키고 있어 선약이 없다면 접근하기가 불가능하지만, 그곳으로 통하는 문이 오직 하나만 있는 건 아니었다.

나는 그림자를 이 층의 제일 끝 방으로 안내했다.

방 안에 걸린 커다란 그림 앞에서 간단한 조작을 마치자, 곧 장치가 동작하며 그 너머로 숨겨져 있던 계단이 드러났다.

“여기예요.”

그림자를 돌아보며 내가 말했다.

“이 계단을 죽 올라가면 그 사람의 집무실에 진입할 수 있어요.”

“그는 이 비밀 통로의 존재를 모릅니까?”

그림자가 신중한 눈으로 계단을 살피며 말했다.

“그럴 리가요. 물론 알고 있죠. 대부분 이 통로는 집무실 쪽에서 접근을 막아 놓는 탓에 사용이 불가능해요. 하지만 계획 당일이라면 이야기가 다르죠. 그때는 통로가 늘 열려 있을 거예요.”

낮게 목소리를 깔며 나는 이어 말했다.

“반역도들이 쉴 새 없이 이 통로를 드나들어야 할 테니까요.”

“……좋습니다.”

그림자가 무겁게 고개를 끄덕였다.

“주인님들께 확실히 전달하도록 하겠습니다. 또 그분들께 전할 말은 없습니까?”

“따로 전할 말은 없어요. 하지만, 개인적으로 당신께 부탁을 좀 드릴게요. 제가 이번 작전에 얼마나 절박한지, 얼마나 많은 걸 걸었는지 그분들께 잘 전달되도록 해 주세요.”

“…….”

“저, 이번 일에 정말 모든 걸 걸었거든요.”

“그렇겠죠.”

그림자가 나지막이 중얼거렸다.

“실패하면 당신 목숨은 그자 손에 달아날 테니.”

“이안 님이 아니더라도, 실패했다간 주인님들 역시 절 가만두지 않겠죠. 이 저주의 존재는 아시잖아요?”

시간제한 저주가 새겨져 있던 허벅지 부근을 가리키자, 그림자는 잠시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이번 임무를 성공적으로 수행해도, 그 저주가 해제되는 일은 없을 겁니다.”

“알아요.”

나는 건조하게 대답했다.

“그런 건 바라지도 않아요. 그렇게까지 멍청하진 않으니까. 그저 이전보다는 조금이라도 편하게 살고 싶을 뿐이에요. 그러니까.”

그림자를 똑바로 쳐다보며 내가 말했다.

“그분들께 제 이야기, 잘 전달해 주세요.”

“……알겠습니다.”

그림자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의 시선이 잠시 무언가 할 말을 담고 나를 바라보았다. 그러나 그 이상 그림자가 목소리를 내는 일은 없었다.

머지않아 그림자는 허공 속으로 연기처럼 사라졌다.

“……뭐지.”

혼자 남겨진 나는 생각에 잠겼다.

역시, 저 그림자. ‘진짜 76번’, 즉 내 몸의 원래 주인과 아는 사이인 것 같은데.

‘계획에 영향을 끼칠 만한 요소는 아니겠지.’

그렇게 생각하며 고개 돌리려던 순간이었다.

“무슨 생각 중입니까?”

어둠 속에서 또 하나의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나는 목소리가 들린 방향을 가볍게 노려보았다.

“인기척 좀 내주세요.”

“숨기는 게 습관이라.”

뻔뻔스레 말하며 이안이 내게로 다가왔다.

“이야긴 잘되었습니까?”

“그럼요. 물론이죠.”

자신 있게 대답한 나는 조금 뒤 심각한 목소리로 말했다.

“거짓말이 점점 더 느는 것 같아요.”

“내가 보기에 당신은 타고났습니다.”

“타고난 거짓말쟁이라고요, 제가? 그거 칭찬은 아니죠?”

“마음대로 생각하십시오.”

그렇게 말한 이안이 내게로 성큼 다가왔다.

내 이마 가까이로 고개 숙인 그가 나지막이 말했다.

“……불쾌한 냄새가 나는데.”

“네? 저한테서요?”

“그자가 당신에게 접촉했습니까?”

“아…… 니오?”

기억을 더듬으며 나는 고개 저었다. 그림자와 대화는 꽤 나누었지만, 내 피부에 닿은 적은 없었다.

“그런 적은 없어요. ……왜요? 뭐가 잘못됐나요?”

덜컥 겁을 집어먹고 묻자 이안이 천천히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냥 그자에게서 나는 냄새가 좀 묻은 것 같군요. 이런 냄새를 맡은 적이 있는데…… 수십 가지 저주에 당한 사람에게서 비슷한 냄새가 났었습니다.”

수십 가지 저주?

나는 그림자를 떠올렸다. 그 역시 나인의 하수인이자 노예다. 내가 시간제한 저주에 당했듯이, 그자 역시 수많은 저주에 당해 있는 것일까?

그렇게 생각하며 나는 내 소매를 킁킁거렸다.

“정말 냄새가 나는 건가요? 저는 아무것도 안 느껴지는데.”

“제가 좀 예민합니다.”

아, 그래. 소드 마스터이시니 어련하시겠습니까.

불량스레 생각하며 나는 이안에게 손을 내밀었다.

“오늘치 연습량, 아직 못 채웠어요.”

“……알고 있습니다.”

이안이 무거운 목소리로 말했다.

“하루라도 넘어가면 큰일이라도 날 듯이 그대가 매일 닦달하니까.”

“당연하죠. 연습이 생명이라고요, 우리는.”

나는 새침하게 어깨를 으쓱였다.

“이안 님은 긴장하면 티가 난단 말이에요. 평소에 긴장할 일이 없어서 그런가.”

내민 손을 까딱이며 내가 말했다.

“순서는 기억하시죠?”

“어련히.”

이안의 손바닥이 내 손을 덮치듯 감싸 쥐었다. 갑자기 스며들어오는 타인의 체온에 괜히 피부가 간질거렸다.

다음으로 이안이 내 허리를 그러쥐었다. 순식간에 왈츠를 추듯 그의 몸과 내 가슴이 맞닿게 되었다.

“지금도 내가 긴장한 것 같습니까?”

나직이 귓가에 내려앉는 속삭임에 나는 입술을 달싹였다.

‘당연하죠. 엄청 티 난다고요.’

생각 같아선 이렇게 대답하고 싶었다.

하지만 그건 사실이 아니라는 게 문제였다.

요즈음의 이안은 스킨십에 있어 이전보다 많이 발전한 모습을 보여 주고 있었다.

가끔씩은 이렇게 밀착해 있으면서도 전혀 긴장한 기색을 보이지 않을 때도 있었다.

바로 지금처럼.

‘……꼭 능숙한 것처럼 보이잖아. 이안 주제에.’

그래. 내 눈앞에 있는 건 이안이다. 생긴 건 이래도 여자 손 한 번 제대로 잡아 본 적 없는 인물이다.

그렇게 스스로를 세뇌하는데도 심장이 가라앉지 않았다.

“왜 대답을 못 합니까?”

채근하는 목소리에 심장이 더 빨리 뛰었다.

마치 능청스러운 한량에게 희롱당하는 마을 아낙이라도 된 기분이었다.

‘말도 안 돼.’

누누이 생각하는 거지만, 이 방면에서만큼은 질 수 없었다.

이안의 등에 손을 얹으며 나는 씩 입꼬리를 올렸다.

“아뇨. 솔직히 말하면, 지금은 티가 안 나세요.”

“……그렇습니까?”

의외의 대답이라는 듯 이안이 한쪽 눈썹을 들어 올렸다.

나는 가볍게 끄덕이며 말했다.

“이 정도 능숙함이면 웬만한 레이디는 전부 홀리시겠어요. 보람이 느껴지네요. 앞으론 저 없이도 다른 분과 잘 해낼 것 같아 다행스럽기도 하고요.”

“…….”

이안은 아무런 대답이 없었다.

내 허리를 감싸 안은 손에 약간 힘이 들어간 것도 같았다. 마치 마음에 안 드는 부분이 있기라도 한 것처럼.

“보람차시다니 다행이군요.”

차가운 목소리로 그렇게 말한 이안이 나를 더 바짝 끌어안았다.

“진도는 예고했던 대로 나가실 겁니까?”

“……그럼요. 당연하죠.”

어젯밤 내가 무슨 예고를 했는지 떠올리자 절로 눈앞이 아찔해졌다.

그럼에도 아무렇지 않은 척 대답하자 이안은 조금 당황한 듯했다.

“……정말로?”

“어차피 연습이잖아요.”

나는 스스로를 설득하듯 말했다.

“진짜도 아니고, 그저 연기일 뿐인걸요.”

“연기면 정말 다 괜찮습니까?”

“네. 목적을 달성하기 위한 일이니까.”

“……역시.”

이안이 낮게 이죽거렸다.

“그대는 타고난 거짓말쟁이군요.”

“여전히 칭찬으론 안 들리네요.”

아무렇지 않은 척 말하고 있지만 실은 그렇지 않았다.

쿵쾅쿵쾅, 폭동이라도 난 듯 심장이 거칠게 뛰어 대고 있었다. 당장이라도 입 밖으로 심장이 튀어나올 것 같았다.

‘침착해.’

나는 이안에게 방금 전 스스로 했던 말을 되새겼다.

어차피 이건 연습일 뿐이다. 전부 가짜고, 연기에 불과했다.

그냥 목적을 이루기 위한 과정일 뿐이야.

그렇게 스스로에게 되뇌며 나는 살며시 눈을 감았다. 그러고는 조심스레 까치발로 섰다. 오늘은 평소보다 조금 더 깊은 진도를 나가야 하는 날이었다.

‘……응?’

슬슬 이안에게 닿아야 할 것 같은데, 아무리 까치발을 서도 닿는 감촉이 나지 않았다.

이건 이안이 전혀 협조를 하고 있지 않은 게 분명했다. 나는 이렇게 힘겹게 까치발 중인데, 그는 고개를 숙이지조차 않고 있는 모양이었다.

‘아무리 경험이 없다 해도 설마 이런 것까지……!’

가르쳐야 하겠어?

그렇게 생각한 순간이었다.

말캉, 따스하고 부드러운 것이 내 입술을 덮쳤다.

깜짝 놀란 나는 나도 모르게 뒤로 달아나려 했다. 그러나 내 허리를 단단히 부여잡은 손 때문에 그럴 수 없었다.

“읍……!”

나는 이안의 어깨를 쾅쾅 두들겼다. 그러나 그는 조금도 물러서지 않고, 오히려 내 허리를 더 끌어안을 뿐이었다.

‘어떻게 해.’

고작 입맞춤이 이렇게까지 벅찰 줄 미처 몰랐다.

그저 입술과 입술이 맞닿아 있을 뿐인데, 고작 그것뿐인데.

심장 속에서 비둘기가 수천 마리 날뛰고 있는 것 같았다.

키스는 어떻게 하는 거더라?

분명 머릿속에는 완벽한 이론이 정립되어 있었다. 고개 각도는 어떻게 해야 하고, 숨은 어떻게 쉬어야 하는지까지.

하지만 이 순간에는 아무것도 떠오르는 것이 없었다. 그저 얼굴에 너무 열이 올라 불이라도 나는 게 아닐까 겁났다.

어떻게 해야 하는 거지, 이다음은.

그런 생각만이 머릿속을 가득 메울 때였다.

맞닿은 입술이 내 아랫입술을 살짝 자극했다. 나도 모르게 입술이 벌어지면서, 입술과 입술이 더 깊숙이 겹쳐졌다.

‘자, 잠깐만. 잠깐만!’

그 시점에서 내 머릿속은 완전히 굳어 버렸다.

몇 년 같은 몇 초가 흐른 뒤. 아무리 때려도 날 놓아주지 않던 이안이 처음으로 팔에서 힘을 풀었다. 맞닿아 있던 입술이 떨어져 나가는 감각이 아주 아득하게 느껴졌다.

“아이린. ……아이린?”

입술 위에서 이안이 속삭였다.

“괜찮습니까?”

누가 봐도 지금 내 상태가 괜찮아 보일 리 없었다.

이런 질문을 받은 것에 자존심이 상할 새도 없었다. 심장이 너무 펄떡거려 정말 이대로 터져 버리는 게 아닐까 걱정됐으니까.

잠시 동안 더 굳어 있던 내가 곧 이안의 가슴을 밀쳤다. 의외로 그는 순순히 밀려났다.

“오늘은.”

새빨개진 얼굴을 들키지 않기 위해 고개 숙이며 내가 말했다.

“여기까지 하는 걸로 하죠. 오늘치 진도는 충분히 나간 것 같으니.”

“충분히?”

이안이 물었다. 그의 목소리는 끝이 조금 갈라져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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