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5화
* * *
일주일 안에 평기사 시험에 합격하겠다는 포부를 밝힌 뒤 엘리엇은 방을 나섰다.
나는 그가 떠나간 자리를 잠시 걱정스레 바라보다가, 이안을 흘겨보았다.
“무리한 걸 요구하셨어요.”
“그 정도도 무리인 그릇이라면 애초부터 그른 겁니다.”
나는 이안을 기막히다는 눈으로 쳐다보았다.
나이롱 성녀인 나지만, 막 기사단에 입단한 햇병아리가 평기사 시험에 합격하는 게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는 알고 있었다.
‘본인이 잘났다고 남들도 자기 기준으로 생각하면 안 되지!’
물론, 우리 엘리엇은 평범한 남들이 아니긴 하지만.
조금 걱정스럽긴 했지만, 솔직히 마음이 그리 무겁지는 않았다.
엘리엇이라면 성공할 것이다. 원작의 독자였기 때문에 가질 수 있는 믿음이었다.
“그나저나, 곧 세례식이 있네요. 저분의 세례명은 정하셨어요?”
“조.”
“네?”
“‘조’로 정했다고 말씀드렸습니다.”
“조?”
황당한 나머지 목소리가 높아졌다.
조가 누군데. 어디 사는 놈인데?
생각지도 못한 이름에 나는 입을 떡 벌렸다.
“농담이시죠?”
“진담입니다만.”
이안이 내게 툭 시선을 던졌다.
“중요합니까, 그게?”
중요하지. 당연히 중요하지!
내 엘리엇에게 조라는 이름은 어울리지 않았다. 엘리엇에겐 섬세하면서도 우아한 ‘엘리엇’ 외에는 어떤 이름도 어울리지 않았다.
“조라니. 무슨 이름이 그렇게 성의 없어요? 무슨 뜻인데요?”
혹여나 성인의 이름을 본뜬 걸지도 몰라.
그러나 내 기대는 다음 순간 산산조각 났다.
“처음 봤을 때, 조로 만든 짚 위에 엎어져 있었으니까.”
첫 만남?
뒷골목에서의 첫 만남을 떠올린 나는 이마를 짚었다. 그때 엘리엇은 불량배들에게 떠밀려 짚 위에 엎어져 있었다.
이름의 유래가 무슨 이런 식이야. 나는 분개해서 외쳤다.
“애 이름을 그런 식으로 아무렇게나 지으면 안 되죠!”
“그럼 어떻게 지어야 합니까?”
뻔뻔스레 묻는 어투에 말문이 막혔다.
그야, 태어난 날짜와 시간을 용한 분께 가져가거나, 집안 대대로 내려오는 돌림자를 쓰거나…… 아무튼 이안처럼 성의 없이 지어서는 안 됐다.
“루시안에게 의견을 물으니, 원래 이름이란 태어난 날의 날씨나 태어난 장소 등에서 따 와 짓는 경우가 많다더군요. 나야 그 녀석이 언제 어디서 태어났는진 알 리 없으니, 처음 발견했을 때를 기준으로 삼을 수밖에 없지 않습니까?”
이안이 제법 논리정연한 척을 했다.
믿긴 힘들지만, 아무래도 진심으로 그 이름이 마음에 든 눈치였다.
나는 더 기가 막혀선 외쳤다.
“첫 만남이 좋은 기억이었던 것도 아니잖아요! 이름을 부를 때마다 그때 기억을 되살아나게 할 셈이에요? 그러다 부정적 정서라도 형성되면 어떡해요?”
“고작 이름 때문에 말입니까?”
“사람에게 가장 중요한 게 그 이름이에요! 아무튼 조는 안 돼요. 절대 안 돼요.”
“도대체가.”
이안이 삐딱하게 고개를 기울였다.
“왜 이렇게까지 흥분하는 건지 모르겠군요. 그러면 그대가 한번 지어 보십시오. 긍정적 정서가 형성될 만한 이름 말입니다.”
어디 내 작명 센스를 지켜보겠다는 듯 이안이 지그시 나를 내려다보았다.
나는 생각에 잠긴 척 몇 초간 뜸을 들인 후 말했다.
“엘리엇이요. 엘리엇이라는 이름은 어떤가요?”
“좀 느끼하군요.”
가차 없는 평가에 나는 발끈했다.
“무슨 말씀이세요! 어딜 봐도 제가 생각한 이름이 훨씬 나아요. 이미지와 딱 어울리지 않나요?”
“지나치게 장식적입니다만. 젠체하는 느낌도 들고.”
“젠체한다니…… 허, 참. 이안 님, 몰랐는데 감각이 좀 없으시네요?”
“정 그러면 본인이 직접 고르게 하죠.”
이안이 성가셔졌다는 듯 어깨를 으쓱였다.
“장담컨대 조를 고를 겁니다.”
성격 나빠 보이는 미소를 머금으며 이안이 말했다. 나는 굳게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요, 그럼. 당사자의 의견을 전적으로 따르는 걸로 해요.”
흥.
이안이 아무리 훼방을 놔 봤자 엘리엇은 엘리엇이다. 운명이 그에게 정해 준 이름인걸.
하루빨리 엘리엇을 엘리엇이라고 부를 수 있게 된다면 좋겠다. 지금은 자연스레 튀어나오려는 이름을 꾹꾹 억누르느라 여간 불편한 게 아니었다.
* * *
“……사실인가?”
억눌린 음성이 어두운 방을 울렸다.
“방금 고한 말이 사실이냐고 물었다!”
쨍그랑.
값비싼 크리스털 병이 벽에 부딪혀 사정없이 깨져 나갔다.
황제, 라시드 앞에 무릎 꿇은 자가 더 깊이 머리를 조아렸다.
“모두 여지없는 사실입니다, 폐하. 정보원으로부터 입수한 틀림없는 정보이니까요.”
“그놈이…… 감히. 어찌 감히 내게.”
황제가 주먹을 부서져라 쥐었다. 손톱이 박힌 손바닥에 핏방울이 배었다.
“말씀드렸지 않습니까? 폐하. 경을 너무 믿지 마시라고.”
폭포처럼 흘러내리는 붉은 머리칼을 쓸어올리며, 황후가 안타까운 목소리로 속삭였다.
“폐하께서는, 한번 신뢰를 주게 되면 여간해선 의심하지 않으시죠. 성정이 곧으시다는 증거입니다만, 세상이 워낙 흉흉하기에…… 폐하처럼 맑은 성정을 지닌 분들께서는 늘 마음을 다치시더군요.”
황좌 옆에 붙듯이 다가간 황후가 나지막한 한숨을 내쉬었다.
“내가 저를 어찌 키웠는데.”
황제가 이를 악물었다.
“선친께서 그렇게 돌아가신 이후, 나는 그놈을 부모처럼 키웠다. 그 점은 레하트 제국의 온 국민이 알고 있을 터.”
“범 새끼를 품어 오신 것이지요.”
황후가 속살거렸다.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습니다. 그자의 간교한 속셈을 알게 되었으니…… 이쪽에서 먼저 선수를 치면 되는 것이지요.”
“너.”
황제가 무릎 꿇은 남자, 에드워드를 핏발 선 눈으로 노려보았다.
“혹여나 잘못된 정보라면, 네놈들이 어떤 꼴을 당하게 될지는 알고 있겠지?”
“물론입니다, 폐하. 틀림없는 정보이니 그 점은 의심하지 말아 주십시오.”
깊이 고개 숙인 에드워드가 말했다.
“중요한 것은 그 간악한 반역도의 뿌리를 당장 뽑아내는 것입니다. 이렇게 무시무시한 음모를 미리 알려 드릴 수 있게 되어 얼마나 다행스러운 마음인지 모릅니다.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폐하?”
에드워드의 물음에 황제는 한동안 말이 없었다. 바닥을 뚫어 버릴 듯 노려보던 황제가 마침내 입을 열었다.
“내 눈으로 직접 확인하겠다.”
“몸소 현장을 덮치시겠습니까?”
“그래. 만약 내 아우가 정말 내 목을 칠 준비를 하고 있다면…… 직접 굽어봐 줘야 하는 것이 도리 아니겠느냐.”
어두운 눈빛을 번득이며 황제가 말했다.
에드워드가 그런 황제를 올려다보며 물었다.
“그렇다면, 현장을 적발한 다음에는 어떻게 하실 계획이십니까?”
“국법상 반역도는 즉결 사형이지. 하지만.”
황제가 비릿한 미소를 머금었다.
“내 아우는 형장의 이슬로 스러지기엔 너무 아까운 인재이기는 해. ……그래, 좋아.”
잠시 생각에 잠긴 듯 턱을 쓰다듬던 황제가 말했다.
“그래도 한 배를 타고 나온 아우인데, 잠시 길을 잘못 들었다 해서 곧바로 내쳐서야 안 되겠지. 형님 된 도리로서, 나는 아우에게 두 번째 기회를 줄 생각이다.”
“폐하, 그 말씀은.”
“그래.”
황제가 낮게 킥킥거렸다.
“그놈의 몸뚱이는 네놈들에게 넘기겠다. 어디 한번 잘 갱생시켜 보거라.”
“믿어 주셔서 감사드립니다, 폐하.”
에드워드가 이마가 바닥에 닿도록 고개를 조아렸다.
“절대 실망시켜 드리는 일은 없을 겁니다. 폐하께서는 최고의 무기를 얻게 되실 겁니다. 지성은 없고, 오로지 폐하의 뜻대로만 움직이는 최강의 살육 인형을 말이지요.”
“잊지 마라.”
황제가 차가운 눈으로 에드워드를 노려보았다.
“네놈들의 부귀영화도, 몰락도 내 손에 달렸다는 걸.”
“여부가 있겠습니까.”
에드워드가 빙그레 웃으며 말했다.
“거듭 말씀드리는 대로, 이 에드워드. 절대 폐하를 실망시키지 않을 겁니다.”
* * *
책사에겐 여러 중요한 업무들이 있다.
계획 짜기, 타임라인 정리하기, 불안 요소 검토하기 등등.
인맥 관리 역시 그중 하나였다.
“코델리아 님!”
나는 활짝 웃으며 코델리아를 반겼다.
여전히 반짝반짝 사랑스러운 모습의 코델리아가 새침한 표정을 지었다.
“누구인가 했더니, 통 얼굴 보기가 힘든 그대군요.”
살짝 토라진 티를 내는 것이 이렇게 귀여울 수가 없었다.
나는 얼른 그녀에게 바짝 다가가며 말했다.
“저도 요즘 코델리아 님을 뵙지 못해 얼마나 심심했는지 몰라요. 간밤엔 글쎄, 제 꿈에까지 나오셨다니까요.”
“내가요? ……흠. 내가 아이린 양 꿈에서 뭘 하던가요?”
“저와 향긋한 차를 마시고, 꽃구경을 하며 놀아 주셨답니다.”
코델리아가 새침히 시선을 내리깔았다. 내 꿈에 자신이 나왔다는 게 나쁘게 들리진 않은 모양이었다.
오늘은 코델리아와 함께 쇼핑을 하기로 한 날이었다.
건국제가 훌쩍 가까워진 탓인지 제도 전체가 묘한 흥분에 휩싸여 있었다. 우리뿐만 아니라, 기분 전환 삼아 쇼핑 나온 귀족들 때문에 고급 상점가가 전에 없이 북적이고 있었다.
“어머, 이 깃털 장식. 코델리아 님께 딱 어울리겠어요.”
깃털 모양 핀을 코델리아의 머리에 대어 본 나는 진심으로 감탄했다. 금색 머리칼이 하얀 깃털로 장식되니 정말 천사 같았다.
“최고예요, 코델리아 님. 거울 한번 보실래요?”
“음. 내가 하기엔 너무…… 뭐랄까. 발랄하지 않겠어요?”
나는 속으로 풋 웃음을 터뜨렸다. 코델리아는 스스로의 이미지를 굉장히 원숙하고 어른스럽게 생각하고 있었다. 그 때문에 사랑스럽고 귀여운 액세서리엔 선뜻 손이 안 가는 모양이었다.
“발랄한 느낌인지는 모르겠지만, 확실한 건 코델리아 님께 아주 잘 어울린다는 거예요.”
“……흐, 흠. 뭐, 아이린 양의 안목이 좋다는 건 익히 알고 있으니. 믿고 구매해 보죠.”
새침한 대답에 나는 생긋 웃었다.
“잘 생각하셨어요!”
그렇게 말하며 나는 여느 영애들이 그러듯 코델리아의 팔짱을 꼈다. 코델리아는 다소 놀란 눈치였으나 팔을 빼지는 않았다.
좋아. 잘되고 있군. 나는 남몰래 살짝 음흉한 미소를 지었다.
나는 코델리아를 진심으로 좋아한다. 그러나 그것과 별개로, 코델리아 베르나데트라는 레이디가 이 제도에서 굉장한 영향력을 끼치는 인물인 것은 사실이었다.
‘코델리아 베르나데트, 그리고 베르나데트 백작가까지. 내 편으로 만들어 두면 반드시 큰 도움이 될 거야.’
이렇듯 인맥 관리까지 공들이는 책사라니.
진심으로 이안은 내게 계약금 외 추가로 월급을 지급해야 하는 건지도 모르겠다.
그렇게 생각하는데, 어디선가 이상한 소리가 들렸다.
“가시라고요, 손님. 여기가 어딘지 몰라요?”
“한 번만 감정해 주시면 되잖아요……! 딱 한 번만 해 주시면 제 말을 믿게 되실 거예요.”
애처로운 목소리에 고개를 돌리자, 흙먼지 뒤덮인 밝은 금발이 눈에 들어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