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94화 (94/161)

94화

“네? 반경이 어쨌다고요?”

그새 엘리엇은 멀찍이 떨어져 거의 문에 도착했다.

아직 본론도 안 꺼냈는데, 벌써 가려는 건가? 당황한 내가 앞으로 발을 내디뎠다.

“가려는 건 아니죠?”

“성녀님. 거기 계셔 주시-”

그때, 똑, 똑.

두 번의 형식적인 노크 뒤 문이 열렸다.

“윽.”

열린 문에 등을 맞은 엘리엇이 짧게 신음했다.

문 사이로 들어선 이안이 그런 엘리엇에게 차가운 시선을 던졌다.

“너는.”

“단장님.”

엘리엇이 황급히 고개를 숙였다. 그런 엘리엇을 이안이 탐탁잖게 내려다보았다.

“네가 왜 여기 있지?”

“단장님, 그것이.”

“제가 불렀어요.”

엘리엇을 바라보는 이안의 눈빛이 마치 얼음장 같았다. 불쌍한 소년을 위해 나는 얼른 나섰다.

“그대가?”

이안이 이번엔 나를 돌아보았다. 그의 불쾌감 어린 시선이 내 뒤편의 티 테이블을 훑었다.

“팔자 좋군요. 남편은 초과 근무에 시달리는 동안 부인께선 한가로이 티타임이라.”

오랜만에 칼퇴근한 인간이 뭐라는 거야.

얼토당토않은 시비에 기가 막혔다. 게다가 평소 이안은 내가 뭘 하며 놀고먹든지 한 번도 이렇게 핀잔준 적이 없었다.

하필 엘리엇 앞에서 오늘따라 왜 이러는 거람. 나는 목소리를 잔뜩 죽이고 속닥거렸다.

“왜 이래요, 갑자기? 저한테 불만 있으면 이따가 말로 해요. 지금은 저분이 듣고 있잖아요.”

“들으면 안 됩니까?”

“안 되죠! 우린 화목한 신혼부부라고요. 잊으신 건 아니죠? 그렇죠, 여보?”

‘그렇죠, 여보?’라고 말하는 대목에선 목소리를 한껏 키웠다. 엘리엇에게까지 들리도록.

애교스레 슬며시 이안의 팔 위에 손을 올리는 것도 잊지 않았다. 하마터면 우리의 관계가 사실 불화와 불신으로 가득 차 있다는 걸 들킬지도 몰랐다.

이안이 내가 손으로 감싼 제 팔을 내려다보더니, 낮고 조용히 속삭였다.

“철면피.”

“감사해요. 더 발전해야죠.”

뻔뻔스레 말하자 이안이 픽 헛웃음을 흘렸다. 그가 무어라 대꾸하기 전에 나는 얼른 다시 입을 열었다.

“단순한 티타임은 아니었어요. 저분께 볼일이 있어 와 주십사 청한 것이거든요.”

“말씀하십시오, 성녀님.”

엘리엇이 긴장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이안 역시 내게 의아한 눈길을 던졌다.

나는 더 지체하지 않고 본론을 꺼냈다.

“이 주 뒤, 제 호위를 맡아 주고 계신 조안 경께서 한동안 휴가를 다녀오실 예정이에요.”

우연히 조안 경의 어머니께서 심한 병환을 앓고 계시다는 사실을 알게 된 나는 그녀에게 강제 휴가를 선사했다.

조안 경의 어머님이라면 일전 성마석 사건 때 나도 뵌 적이 있었다. 어머니가 생사를 헤매고 있다는데 조안 경을 내 곁에만 붙들어 맬 수는 없었다.

“때문에 그동안 제 호위에 공석이 생기는데, 그 자리를 당신이 맡아 주셨으면 좋겠어요.”

“……네?”

“아이린.”

두 남자가 동시에 말했다.

이안이 미간을 좁힌 채 내게 으르듯 말했다.

“갑자기 그게 무슨 결정입니까? 그대의 임시 호위조는 이미 편성을 마쳐 놓았습니다.”

“감사해요. 그 자리에 저분도 함께하도록 해 주세요.”

“어, 어째서입니까?”

엘리엇이 당황한 얼굴로 물었다.

“아이린. 조안 경은 소드 마스터를 내다볼 정도의 인재입니다. 그녀를 대체할 임시 호위조 역시 최소 상급 기사들로만 구성되어 있고.”

이안이 굳은 목소리로 말했다.

“그대의 호위조는 아직 견습 딱지도 떼지 못한 애송이의 놀이터가 아닙니다.”

대놓고 폄하당했는데도 엘리엇은 자존심 상해하는 기색이 아니었다. 오히려 맞는 말이라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짧게 한숨을 내쉬었다.

‘역시 쉽게 받아들여지지는 않는구나.’

어느 정도 각오하기는 했다.

하는 수 없지. 나는 플랜 B에 돌입하기로 했다. 이 패는 웬만하면 꺼내 들고 싶지 않았지만, 이 남자들이 협조해 주질 않으니 어쩔 수 없었다.

“좋아요. 솔직히 말할게요. 저, 당신의 미래를 봤어요.”

“네?”

“…….”

엘리엇이 눈을 휘둥그레 떴다. 이안은 말없이 나를 바라보았다.

예지 카드는 정말 웬만해선 꺼내고 싶지 않았다. 그러나 이왕 뽑아 든 패이니, 화려하게 활용할 생각이었다.

“잘 들어요. 지금으로부터 한 달 안에.”

으스스하게 목소리를 깔고 말하자, 엘리엇이 저도 모르게 긴장한 듯 표정을 굳혔다.

“당신에게 서쪽에서 귀인이 찾아올 거예요.”

“……네?”

“그건 또 무슨 소립니까?”

이번에도 두 남자가 동시에 말했다.

나는 두 남자를 모두 무시하고 말을 이었다.

“아주 귀엽고, 사랑스럽고, 생기발랄한 귀인이 말이에요.”

“예……?”

“구김이 좀 있었던 당신 인생을 다리미처럼 쫙쫙 펴 줄 귀인이네요.”

암. 그렇고말고.

나는 셀리나를 떠올리며 고개를 끄덕거렸다. 셀리나와 엘리엇은 그야말로 천생연분 그 자체였다. 서로의 결핍을 메워 주는 퍼즐 조각들이라고나 할까.

엘리엇은 몹시도 혼란스러워 보였다.

“성녀님. 무슨 말씀인지 저는 잘.......”

“믿어요.”

“네?”

“무슨 말인지 모르겠다면, 그냥 믿으라고요.”

이안이 무미건조하게 두 번 손뼉을 쳤다.

“방금 꽤 사이비 교주 같았습니다.”

뭐라는 거야. 그래도 명색이 성녀인 부인에게 못 하는 말이 없네.

이안을 슬쩍 노려본 나는 다시 본론으로 돌아갔다.

“그리고 제가 본 미래에서 당신은 제 호위 기사 역할을 수행하고 있었어요. 귀인과 만나는 미래를 현실로 만들려면, 제가 봤던 그 미래처럼 당신은 제 호위를 맡아 주어야 해요.”

알고 있다. 내 말이 상당한 억지 논리라는 건.

그렇기에 나는 일부러 더 엄숙한 표정을 지었다. 마치 진짜 신의 목소리를 들은 성녀처럼.

이렇게 해서라도 나는 엘리엇을 내 호위 기사로 만들어야 했다. 이유는 간단했다.

아마 한 달 안에 여주인공이 수도에 상경할 거고, 나는 그녀를 어떻게든 주워 올 것이다.

아직 성녀로 발현할 때는 아닐 테니, 일단은 내 시녀로 임시 취직을 시킬 생각이었다. 그렇게 되면 셀리나는 나와 거의 모든 일거수일투족을 함께하게 될 거다.

그리고 그건 내 호위 기사가 된 엘리엇 역시 마찬가지일 거다.

‘안 그래도 천생연분인 청춘 남녀가, 한 공간에서 그렇게 오랜 시간을 보낸다면?’

눈이 맞는 건 시간문제겠지.

둘의 로맨스가 원작과 다소 달라지기는 하겠지. 원작 소설을 사랑하던 나로서 그건 아쉬운 부분이긴 했다. 하지만 어쩔 수 없었다.

이안과 라시드의 격돌이 원작보다 한참 당겨지게 된 이상, 남주인공과 여주인공의 로맨스도 속성으로 이루어져야 했다.

‘억지 부려서 미안하다, 엘리엇.’

나는 엘리엇에게 건넬 수 없는 말을 속으로만 삼켰다.

‘하지만 내겐 너희들의 사랑의 힘이 꼭 필요해.’

사랑의 힘이라니.

나도 내가 이렇게 아동용 변신 마법 소녀물 같은 대사를 떠올리게 될 줄은 몰랐다.

그러나 두 주인공의 사랑에는 정말로 특별한 힘이 있었다. 내 계획에 반드시 필요한 힘이.

“죄송합니다, 성녀님. 저는 아직 잘 이해가…… 그 귀인이라는 사람이 그렇게나 중요한 건가요? 누군지는 모르겠지만 제겐 별로 필요 없을 것 같―”

“어허. 뭘 모르는 소리!”

나는 화들짝 놀라 엘리엇을 타박했다.

남주인공이 여주인공을 부정하다니. 앞으로 제가 그 귀인의 발닦개가 될 운명인지도 모르고!

“엘룬 신께서 괜히 제게 그런 예지를 보여 주셨겠어요? 반, 드, 시. 현실로 만들어 내야 하는 미래이기 때문에 보여 주신 것이 틀림없어요.”

쐐기 박듯 말한 나는 이번엔 이안을 돌아보았다.

“그러니 이안 님께서도, 이번 인선에 동의해 주시겠죠?”

“반대합니다.”

태연한 목소리로 이안이 말했다. 가타부타 설명도 없이.

다 들어 놓고도 아직 초를 친단 말이야? 황당해진 나는 눈을 가늘게 뜨고 이안을 노려보았다.

“이안 님. 제 말 못 들으셨어요? 이분이 귀인을 만나려면 반드시―”

“귀인이고 뭐고.”

이안이 불량하게 눈썹을 찡그렸다.

“실력이 모자란 자는 그대의 호위가 되지 못합니다.”

“…….”

“이 점에서 타협할 생각은 없습니다. 설령 그대 본인이 부탁한다 하더라도.”

이안이 목소리는 농담기를 찾아볼 수 없이 진지했다.

나를 지키는 일에 대해 저렇게까지 진지하게 말하는 모습을 보니, 어쩐지…… 조금 기분이 이상해졌다.

‘하긴, 계약 파트너인 내가 잘못되기라도 하면 상당히 골치 아파지겠지.’

한숨을 내뱉은 뒤 내가 물었다.

“어떻게 하면 이분을 제 호위로 넣어 주실래요?”

“글쎄.”

이안이 느리게 어깨를 으쓱였다.

“일주일 안에 견습 딱지를 뗀다면 생각해 보죠.”

“네에?”

“그래 봐야 여전히 햇병아리겠으나, 그 정도 열정이라면 기회는 줘 볼 수 있을 것 같군요.”

나는 기가 막혀 입을 벌렸다.

일주일 안에 평기사 시험에 합격하라니. 성기사단에 입단한 지 이제 얼마 되지도 않은 엘리엇에겐 무리한 요구였다.

저 인간의 고집을 어떻게 꺾는담. 고민하는데 엘리엇의 목소리가 들렸다.

“해내겠습니다.”

“……네?”

나는 이번엔 엘리엇을 돌아보았다. 지금 우리 애가 뭐라고 한 거지?

“일주일 안에 평기사 자격을 얻어 오겠습니다, 성녀님.”

“잠시만요.”

나는 황급히 입을 열었다.

“무리할 필요 없어요. 이안 님은 제가 설득해 볼 테니 일단 진정해요.”

“아니오, 성녀님.”

엘리엇이 결심한 얼굴로 고개를 저었다.

“대부님께서 내려 주신 첫 과제. 무슨 일이 있어도 수행하겠습니다.”

“……대부라 부르지 마라. 듣기 간지러우니까.”

이안이 불쾌한 듯 이마를 찡그렸다.

* * *

“흐아악!”

마차가 크게 덜컹이자 소녀가 비명을 질렀다.

마차 바퀴가 도랑에 단단히 잘못 빠진 모양이었다. 몇 번 바퀴를 들어 올리느라 끙끙거리던 마부가 머리를 긁적거렸다.

“어이쿠, 이거 미안하게 됐구먼.”

마부가 소녀에게 말했다.

“마차가 하도 낡아서 걱정되긴 했는데, 이제 수명이 다 된 것 같아. 미안하지만 여기서부턴 걸어가야 할 것 같소.”

“네? 여기서요? 갑자기요……? 목적지까지 많이 남았는데요?”

“마차가 사망했으니 어쩔 수 없질 않소. 내가 아가씨를 업고 갈 수도 없는 노릇이고 말이지.”

말을 마차와 분리하며 마부가 말했다.

“그럼, 남은 여행길 무사히 마치길 바라오. 길은 이쪽으로 쭉 가기만 하면 되니까!”

“저기요!”

마부가 읏차, 하는 소리와 함께 말에 올라타더니 먼저 길을 떠났다. 소녀가 다급히 외쳤다.

“아니, 저기요. 손님을 길바닥에 버리고 가는 법이 어디 있어요. 저기요!”

목놓아 외쳤지만 마부와 말은 멀어져만 갔다.

수도까지 앞으로 만 하루만큼의 거리가 남은 상황. 소녀가 망연자실히 먼 하늘을 바라보았다. 싹싹 긁어모아 댄 마차 삯이었는데, 하필이면 사기꾼 놈이 모는 마차를 골라 타고 말았다.

“내 인생은 대체 왜 이 모양 이 꼴이냐…….”

주르륵 땅바닥 위로 미끄러지며 소녀가 한탄했다. 레몬을 닮은 금빛 머리카락이 산들바람에 흩날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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