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93화 (93/161)

93화

이안이 말없이 나를 올려다보았다.

머지않아 따스한 체온이 뺨을 감쌌다. 내 고개를 부드럽게 당기는 손길에 나는 속절없이 끌려갔다. 눈을 함부로 깜빡였다간 속눈썹이 닿을 것처럼 가까운 거리에, 이안이 있었다.

살며시 고개를 기울인 이안이 속삭였다.

“이렇게 말입니까?”

나지막한 속살거림에 입술이 간질거렸다.

나는 대답하지 못했다. 조금이라도 움직였다간 입술과 입술이 닿아 버릴 것 같아서.

‘닿아야 하는 게, 맞지만.’

언제까지고 결혼식 때처럼 가짜 입맞춤으로 사람들을 속여 넘길 순 없었다.

입술조차 닿지 않는 입맞춤 흉내 따위로는 교활한 황제를 속일 수 없을 것이다.

그걸 잘 알고 있으면서도, 몇 초 뒤 나는 눈을 질끈 감았다.

“오, 오늘은.”

벌떡 이안의 무릎 위에서 일어나며 내가 말했다.

“여기까지 하도록 하죠.”

내 손길에 가슴팍을 떠밀린 이안이, 그대로 소파에 비스듬히 누운 채 나를 올려다보았다.

“벌써 끝입니까? 예상한 것보다 짧군요.”

이안의 말투는 마치 나를 도발하는 것 같았다.

나는 슬며시 그를 흘겨보았다. 각종 연애 소설과 로맨스 드라마로 무장된 나도 이렇게 긴장되는데, 저 인간은 왜 저리도 멀쩡해 보이는 건지 얄미운 기분이 들었다.

“배려해 드린 거예요.”

“저를 말입니까?”

“네. 한꺼번에 너무 진도를 빨리 나가면 이안 님이 체하실지도 모르잖아요?”

“하.”

이안이 헛웃음 쳤다.

“그럴 것 같습니까?”

“무시하는 건 아니고요. 아무래도 이안 님은 이성을 만나신 경험이 전혀 없으시니까요.”

틀린 말은 아니지 않냐는 내 눈빛에 이안의 입매가 삐딱해졌다. 소파에 비뚤어지게 앉은 채 그런 표정을 짓고 있으니 상당히 불량해 보였다.

지레 찔린 나는 괜스레 어깨를 으쓱였다.

“왜 그렇게 쳐다보시죠. 틀린 말은 아니잖아요?”

“뭐. 그렇긴 합니다만.”

소파에서 일어난 이안이 닿을 듯 나를 스쳐 지나갔다. 스치기 직전 그가 말했다.

“그렇다고 내가 아무것도 모르는 건 아닙니다.”

“…….”

나는 아무런 대꾸도 하지 못하고 그 자리에서 굳어 버렸다.

‘무슨 뜻이지?’

쿵쿵 울리는 심장을 진정시키기 위해 나는 애를 써야 했다.

‘진정해. 그래 봤자 이안이야.’

얼굴과 몸은 불경하기 짝이 없지만, 그래 봐야 원작자가 공인한 순결남이다.

이 분야에 있어서만큼은 내가 백 퍼센트 우위를 차지할 수 있었다.

‘소연아, 내게 힘을 줘.’

나는 소연이와 밤새도록 꺅꺅거리며 탐독한 19금 로맨스 소설들을 떠올리며 심장을 가라앉혔다.

이안이 뭘 좀 알아 봤자, 그런 지식들을 탐닉한 나를 당해 낼 수 있을 리 없었다.

‘중요한 건 기세야. 이런 곳에서까지 이안에게 지지 말자고!’

다음 연습 시간엔 더 파격적으로 리드하고 말리라.

굳게 다짐하며 나는 꾹 두 주먹을 쥐었다.

* * *

오늘은 정기 미사가 있는 날.

이안의 표현을 빌리자면 ‘육체적 단련이라곤 소가 닭 보듯 하는 불량 성녀’인 나지만, 그래도 성녀로서 아주 기본적인 본분은 다하고 있었다. 일주일에 한 번씩은 미사에 참석하는 것도 그 노력의 일환이었다.

‘노력이라기엔, 다들 기도하는 동안 눈 감고 다른 생각에나 잠겨 있는 게 전부지만.’

그래도 겉으로 보기에는 그런 내 모습이 꽤 경건해 보이는 모양이었다. 미사가 끝날 때면 다들 흐뭇한 얼굴로 나를 흘긋거리곤 했으니.

미사가 끝나고 돌아가는 길. 대성당 복도를 걷던 나는 기합 소리에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오늘도 열심이시네요, 다들.”

아네트가 아래를 바라보며 감탄한 목소리로 말했다.

고개를 숙이자, 아래로 일 층의 연무장이 훤히 내려다보였다.

마침 정기 훈련 시간인지, 수십 명의 기사가 검술 훈련에 매진하고 있었다.

‘아, 저 애는.’

수십 명의 기사 중 단연 눈에 띄는 존재감이 있었다.

갈색 머리통을 발견한 나는 빙그레 미소를 지었다. 엘리엇이었다.

검술에 문외한인 내가 보기에도 엘리엇은 주변 기사들과 어딘가 달라 보였다. 절도 있는 동작에서는 묘한 품위까지 느껴졌다.

‘이게 주인공의 품격인가.’

한참 엘리엇에게 시선을 고정하고 있자, 아네트가 넌지시 물었다.

“구경하고 가시겠어요, 아이린 님?”

“음. 그럼 잠깐 쉬었다 갈까요.”

그러고 보니 엘리엇에겐 따로 전할 말도 있었다.

나와 아네트는 일 층으로 내려가 한동안 기사들의 훈련을 구경했다. 우리뿐 아니라 지나가던 시종들이나, 성당에 들른 귀부인들 역시 흐뭇한 얼굴로 기사들을 지켜보고 있었다.

“오늘은 여기까지!”

몇 분쯤 구경했을까.

훈련 시간이 끝났는지 상급 기사가 짝 손뼉을 쳤다.

방금까지 일사불란하게 훈련하던 성기사들이 푹 한숨을 내쉬거나 뻐근한 근육을 주물렀다.

그들 사이를 헤치고 걸어가자, 나를 발견한 기사들이 깜짝 놀라 자리를 비켜 주었다.

덕분에 머지않아 엘리엇을 발견할 수 있었다.

“안녕하세요.”

엘리엇 앞에 도달한 내가 활짝 웃었다.

엘리엇이 물을 마시다 말고 얼떨떨한 얼굴로 나를 돌아보았다.

“……성녀님?”

“잠깐 할 말이 있는데. 시간 내줄 수 있겠어요?”

엘리엇이 당황한 얼굴로 눈을 끔뻑였다.

* * *

응접실로 엘리엇을 안내한 나는 그에게 다과를 권했다.

“마음껏 들어요.”

“……예. 감사합니다.”

엘리엇이 어색한 눈으로 각색의 쿠키들이 담긴 접시를 내려다보더니, 마지못한 듯 그중 레몬색 쿠키를 집었다.

‘음. 취향 확실하군.’

레몬색은 여주인공 셀리나의 머리 색이었다. 장차 엘리엇은 셀리나의 머리칼에 입을 맞추며 ‘여기서 좋은 냄새가 나.’라는 대사를 날리는 청년으로 성장할 예정이었다.

벌써 셀리나 바라기다운 면모를 본 기분에 나는 흐뭇한 미소를 머금었다.

“안 그래도 찾아뵈려 했었습니다.”

쿠키를 입에 대지도 않은 채 엘리엇이 입을 열었다. 긴장한 표정이었다.

“나를? 왜요?”

“트란셀에서 저를 도와주셨던 것에 감사 인사를 제대로 드리지 못하기도 했고, ……제가 성녀님을 대모로 원한다고 지목하는 바람에, 곤란하셨을 것 같아서.”

“아. 그건 놀라긴 했어요.”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싫거나 곤란했던 건 아니에요. 그냥 놀랐을 뿐이지. 그건 왜 그랬던 거예요?”

엘리엇이 곤란한 듯 입술을 깨물었다.

“대모를 구하지 못하면 세례도 못 받고, 당연히 성기사도 될 수 없다고 절 속인 무리가 있었습니다. 당장 대모가 되어 줄 사람의 이름을 대야 한다고 했죠.”

저런.

나는 나지막이 혀를 찼다. 엘리엇이 텃세 부리는 놈들 때문에 아직 대성당에서 인맥을 만들지 못한 것을 겨냥한 모양이었다.

‘못된 녀석들.’

“당시 대모가 되어 줄 여자 어른의 이름은 성녀님밖에 떠오르지 않아서…… 저도 모르게 말했습니다. 죄송합니다.”

“죄송할 건 없어요. 오히려 기뻤는걸요? 진심으로 당신의 대모가 되어 주고 싶기도 했고. 누군가 대모가 되어 달라고 절 지목한 건 처음이었거든요.”

“정말입니까?”

내 흔쾌한 대답에 엘리엇이 놀란 눈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그런데 왜…….”

그러나 정작 엘리엇의 후견인으로 선 건 이안이다. 그걸 떠올렸는지 엘리엇이 당혹스러운 얼굴을 했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나는 넌지시 물었다.

“이안 님이 너무 혹독하게 구나요?”

“네? 아, 아닙니다. 단장님께선 과분한 가르침을 내려 주고 계십니다.”

거기까지 말한 엘리엇이 혼잣말처럼 덧붙였다.

“……그날 대련 이후로 뵌 적은 없지만.”

“뭐라고요?”

나는 대경실색했다.

대부가 되어 주기로 해 놓고서 여태 애를 방치해 놓기만 했다고?

이해가 안 되는 건 아니었다. 이안이 몸이 열 개여도 모자랄 만큼 바쁘다는 건 익히 알고 있었으니까.

‘그래도! 애를 거두기로 했으면 책임을 져야지! 자라나는 청소년에게 관심은 필수적이라고.’

나한테서 뺏어 데려가 놓고 정작 저는 방치하다니. 엘리엇처럼 훌륭한 인재를 말이다.

아무래도 이따 밤에 만나면 한 마디 해야겠어. 다짐하는데 엘리엇이 우물쭈물 말했다.

“저는 괜찮습니다. 그날의 대련만으로도 큰 가르침이 되었거든요. 그런 경지가 있다는 것은 처음 보았습니다.”

“보여 주기만 하면 뭘 해요! 어떻게 도달하는지도 알려 줘야지.”

분통을 터뜨리자 엘리엇이 곤혹스러운 듯 시선을 내리깔았다.

의도치 않게 엘리엇을 곤란하게 만들었다는 것을 깨달은 나는 흠, 헛기침을 했다.

“아무튼. 당신의 대모가 되어 주고 싶었단 이야기는 진심이에요. 비록 새치기를 당했지만.”

어깨를 으쓱이며 말하자 엘리엇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새치기라면…….”

“당신의 대부가 되겠다고 이안 님이 고집을 부렸거든요.”

“예?”

엘리엇이 멍한 눈을 했다.

“단장, 님께서요?”

“네. 안 믿기나요?”

“하지만 단장님께서 왜…….”

고아 출신에 보잘것없는 자신인데, 그가 왜 대부가 되어 주겠다고 고집을 피웠냐는 거겠지.

엘리엇의 뒷말을 짐작한 나는 싱긋 미소 지었다.

“글쎄요. 당신의 재능을 알아보신 게 아닐까요?”

“제 재능…… 말인가요?”

“네. 그날 이안 님과의 대련 현장에 저도 있었잖아요. 당신을 상대하는 일에 이안 님이 흥미를 갖고 있다는 게 느껴지던걸요.”

사실이었다.

원작에서도 이안은 엘리엇의 검에 대한 재능을 인정했었다. 하지만 그 대목을 읽지 않았더라도 그날 대련에서 이안이 지루해하지 않았다는 것쯤은 짐작할 수 있었다.

‘그 인간 성격에, 별 볼 일 없거나 지루했다면 그 자리에 일 초도 더 안 있었을 테니까.’

삼선승제고 뭐고 그냥 한 합을 주고받자마자 훌훌 자리를 떴겠지.

픽 웃으며 그런 생각을 하는데 엘리엇이 갑자기 내 눈치를 살피기 시작했다.

“아. 그…… 대련이요.”

“…….”

그 어색한 목소리에 나는 뒤늦게 그날의 내 추태를 떠올렸다.

젠장. 그래. 그새 기억에서 지워졌을 리가 없지.

대체 대성당에 그날 일이 무어라 소문이 나 있을까. 대련 중에 갑자기 남편을 덮친 변태 부인?

대답이 두려워 나는 차마 묻지 못하고 시선을 돌렸다.

노크 소리가 들린 것은 그때였다.

“아이린 님! 이안 님께서 집무실을 나서셨어요. 곧 이리로 오실 것 같아요!”

“네?”

뜻밖의 소식에 나는 눈을 크게 떴다.

이 시간에? 아직 해가 지지도 않았는데 퇴근이라고?

“오 분 안에는 도착하시지 않을까 싶어요!”

“그렇군요. 고마워요.”

내일은 해가 서쪽에서 뜨겠네.

그런 생각을 하는데 엘리엇이 벌떡 소파에서 일어났다. 급하게 일어나는 바람에 소파 다리가 바닥에 끌리며 기긱, 괴이쩍은 소리를 냈다.

“음? 왜 그래요?”

“반, 반경 이 미터.”

핏기 가신 얼굴로 엘리엇이 중얼거리며 내게서 뒷걸음질 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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