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2화
* * *
“수뇌부들이라. 그래, 그렇단 말이지.”
에드워드가 정신없이 손바닥을 비비며 중얼거렸다.
“그런 자리를 급습한다면 부정 못 할 증거를 잡을 수 있겠군. 그렇게만 된다면 황제도…….”
에드워드의 혼잣말은 멈추지 않았다. 흥분해 제 앞에 선 나는 안중에도 없는 듯했다. 아니면 나 따위는 원래부터 신경도 안 쓰이는 존재이든지.
“정확한 시간은 언제지?”
어느 순간 에드워드가 홱 나를 바라보며 물었다. 나는 미리 정해 놓은 대답을 돌려주었다.
“자정이에요. 대성당이 통째로 잠들어있을 시간이죠.”
“자정이라…… 그래. 좋아. 괜찮은 시간대군.”
“급습하실 건가요?”
평이한 어투로 묻자 에드워드가 나를 노려보았다.
“대어를 물어 온 건 좋은데, 좀 기어오르는군. 질문도 할 줄 알게 됐나? 그건 왜 궁금하지?”
“제가 주인님들의 계획을 제대로 알고 있어야 확실히 보필할 수 있을 테니까요.”
“어떻게 보필하겠단 말이지?”
“밤의 대성당은 감시가 삼엄해요. 반역도들이 눈치채지 못하도록 접근하려면 평범한 경로로 접근해선 안 될걸요. 제가 감시를 피할 수 있는 비밀 통로를 알아요.”
“하…… 그렇단 말이지.”
에드워드가 비릿한 미소를 지었다.
“꽤 충성스러운데. 유능하기도 하고 말이야. 언제부터 이렇게 쓸 만한 개가 됐지?”
“쓸모 있어지려 노력했지요.”
나는 공손히 고개를 숙이며 대답했다.
“이번 일이 제게 다시 없을 기회란 건 잘 알아요. 중요한 기회이니, 잘 해내면 그만큼 합당한 보상도 돌아오겠지요.”
“보상이라. 뭘 원하지?”
“요즘 반짝이는 것들의 맛을 조금 알아 버려서요.”
시선을 내리깔며 말하자 에드워드가 재밌다는 듯 웃었다.
“아아. 돈과 보석을 원하는 건가? 이안이 널 온갖 값비싼 보석과 드레스로 치장 중이란 소문은 익히 들었지. 그래, 돈맛은 한번 보면 빠져나오기 힘들지. 그 정도 보상이야 물론 우리도 네게 내려 줄 수 있어.”
“감사합니다.”
꾸벅 고개 숙이자 에드워드가 킥킥거렸다.
“다행이네.”
“…….”
“난 또, 언감생심 자유 같은 걸 꿈꾸고 있는 건가 걱정했지 뭐야.”
“그럴 리가요.”
무감한 목소리로 말하자 에드워드가 흡족한 듯 고개를 끄덕거렸다.
“역시 주제를 잘 알고 있군. 비싼 다이아몬드 목줄 정도야 채워 줄 수 있지만…….”
에드워드가 내게로 고개를 숙였다. 음험한 목소리가 귓가를 파고들었다.
“그래 봤자 넌 우리 개라는 걸 잊지 마.”
“예.”
“이번 일은, 잘했다. 일이 성공적으로 풀린다면 네게 두둑한 보상을 약속하지. 하지만.”
에드워드가 오른손을 들어 올렸다.
“칭찬 한 번 받았다고 기고만장해진다면 곤란하겠지?”
그렇게 말하며 에드워드가 오른손 검지와 엄지를 서로 비볐다.
일전, 약혼식에서 본 적 있는 동작이었다. 저 동작과 함께 문신이 있는 허벅지 부위에 불에 타는 듯한 고통이 덮쳤었다.
나는 반사적으로 허리를 숙이곤, 허벅지를 감싸 안으며 신음했다.
“흐으윽……!”
“후후.”
고꾸라진 내 위에서 에드워드가 즐거운 듯 웃었다.
“네 주제를 언제나 잊지 않고 기억하라고. 넌 머리부터 발끝까지 우리 소유라는 사실을 말이야.”
고통에 몸부림치는 척 바닥에 주저앉으며 나는 재빨리 머리를 굴렸다.
역시, 예상대로 나인은 내가 시간제한 저주를 풀었다는 사실을 알지 못하고 있다. 원작에서 여주인공이 친구의 저주를 풀어 주었을 때에도 그랬듯이.
“기억…… 하겠습니다.”
한참 몸부림치던 내가 헐떡이며 대답했다.
그럭저럭 괜찮은 연기였는지, 올려다본 에드워드는 우월감에 흠뻑 젖은 얼굴을 하고 있었다.
* * *
늦은 저녁 시간.
대성당으로 돌아온 나는 내 침실을 향해 곧장 걸어갔다. 나를 알아본 문지기들이 침실 문을 열어 주었다. 안으로 들어서려던 나는 잠시 멈칫했다. 안에 선객이 있었다.
“왔습니까?”
소파에 걸터앉아 서류를 들여다보고 있던 이안이 나를 돌아보았다. 웬일로 일찍 퇴근한 모양이었다. 아직도 종이 쪼가리를 들여다보고 있는 걸 보면 완전한 퇴근도 아닌 듯했지만.
“네에.”
외출용 레이스 장갑을 벗으며 나는 가볍게 한숨을 내쉬었다.
이안의 시선이 나를 향해 있는 것이 느껴졌다. 그를 향해 고개 돌린 나는 생긋 웃으며 말했다.
“걸려들었어요.”
“그렇습니까.”
서류를 옆으로 치운 이안이 내 앞까지 성큼성큼 걸어오더니, 뜯어보는 눈으로 나를 훑었다.
“다친 곳은?”
“없어요. 그럴 일 없을 거라고 했잖아요.”
일단 나인에게 나는 아직 상품 가치가 충분한 노예다. 그런 나를 다치게 할 리가 없었다.
“나인은 일주일 뒤 자정에 이안 님의 집무실을 급습할 거예요. 삼 층으로 통하는 비밀 통로 역시 알려 줬어요.”
나는 나인에게 아주 값어치 있는 정보를 전했다. 이안이 반역도라는 정보 정도면 S급 정보 특급일 것이다.
나인이 열혈 애국자들도 아니고, 단지 반역도들을 숙청하기 위해 이안의 집무실을 급습하려 들진 않을 터.
그놈들은 이 구미 당기는 정보를 가장 값지게 사 줄 자를 찾아가겠지.
그리고, 이안이 반역을 꾸미고 있단 정보에 가장 동요할 이는, 당연히.
‘황제겠고.’
“지금쯤 나인은 황제와 흥정하느라 바쁘겠네요.”
나인이 제공한 정보를 들은 황제는, 길길이 날뛰고 있을까? 아니면 이안이 그럴 리 없다며 믿지 못하고 있을까.
아마 둘 다일 것이란 생각이 들었다.
라시드는 이안을 누구보다도 경계하고 의식하지만, 그만큼 제 형제의 충성이 자신을 향하고 있음에 크나큰 우월감을 느끼는 인간이었다.
‘아마 십중팔구, 반역 현장을 제 눈으로 목격하려 들 테지.’
일주일 뒤 이안의 집무실엔 아무래도 수많은 손님이 들어찰 듯했다.
폭풍 전야의 예감에 나는 천천히 숨을 가다듬었다.
긴장되지 않는다고 하면 거짓말이었다.
점검하고 또 점검한 계획이지만, 어딘가에 허점이 숨어 있을 수 있었다. 그걸 대비하기 위해서는 그날을 위해 수많은 시뮬레이션을 돌려보는 수밖에 없었다.
‘그런 의미에서.’
나는 소파로 걸어가 이안에게 손짓했다.
“오늘도 연습해야죠.”
“…….”
이안의 표정에 순간 탐탁잖은 기색이 스쳐 지나갔다.
그렇게 싫나? 나랑 연습하는 게.
괜히 입술이 삐죽여졌지만, 그의 입장도 이해가 안 가는 것은 아니었다.
이 연습이라는 게, 아무래도…… 평범한 연습은 아니니까.
그래도 어쩔 수 없었다.
‘우리 계획을 완벽하게 성공하려면 이 연습은 필수적이니까.’
“얼른 소파에 앉아 주세요.”
민망함을 감추기 위해 일부러 엄격한 어투로 말하자, 이안이 낮게 한숨을 내쉬었다.
비협조적인 분위기와 달리 그는 순순히 소파에 앉았다. 나는 잠깐 머뭇거리다가, 그의 무릎 위로 살며시 걸터앉았다.
“…….”
“…….”
시선과 시선이 지나치게 가까운 거리에서 맞닿았다.
외간 남자의 무릎에 앉는 건 나에게도 익숙한 행위는 절대 아니었다. 굳이 따지자면 외간 남자는 아니고, 일단 내 남편이긴 하지만…… 솔직히 말하면 그래서 더 어색했다.
‘차라리 생전 처음 보는 남자랑 이러고 있는 거면 덜 어색할 거 같다고!’
그랬다면 그냥 프로페셔널한 배우에 빙의해서 후딱 해치워 버렸을 거다.
하지만, 이안은 내게 이제 생전 처음 보는 사람이 아니었다.
수많은 대화를 나눈 사람이었고, 여러 의미로 감정을 준 사람이기도 했다. 대체로 공포나 반항심, 재수 없음 같은 부정적인 감정이긴 하지만.
“그, 흠.”
괜한 생각을 떨쳐 내기 위해 나는 헛기침했다.
“손 좀, 올릴게요.”
“……그러십시오.”
나는 쭈뼛거리며 이안의 목 위에 팔을 둘렀다.
무릎에 앉은 데다 목을 껴안기까지 하다니.
누가 본다면 그대로 눈을 가릴 만큼 남사스러운 광경이 연출되었다.
‘그나저나 이 인간은, 목까지 단련한 건가. 무슨 목이 이렇게 탄탄해?’
아무리 단련된 인간이라 해도 급소인 목은 부드럽지 않을까 했는데, 그런 내 편견을 비웃듯 이안의 목 너머로 느껴지는 근육은 단단하기만 했다. 마치 긴장한 것처럼.
“그렇게 나무토막처럼 앉아만 있을 거예요?”
민망함을 감추기 위해 나는 일부러 퉁명스레 말했다.
“저만 당신한테 매달리고 있는 것 같잖아요!”
“보채지 마십시오.”
아래에서 불만스러운 목소리가 들려왔다.
뒤이어 나지막한 한숨 소리도 들려왔다. 그리고.
“……이렇게 하면 됩니까?”
탄탄한 팔이 내 허리를 휘어 감았다.
마치 어린아이를 안듯이, 허리가 이안의 한 팔에 감겼다. 그 바람에 나는 이안과 한결 더 밀착되어야 했다.
“……자, 잘했어요.”
내가 웅얼거렸다.
의연하게 말하고 싶었지만, 긴장으로 성대가 굳은 탓에 그럴 수가 없었다.
빈틈없이 달라붙은 이안에게선 좋은 향기가 났다.
다 자란 성인 남성이라고는 믿기지 않을 정도로, 청량하면서도 맑은 향기가.
“다음은.”
이안이 나를 올려다보며 말했다.
나보다 머리 한 개만큼은 큰 그이기에, 이렇듯 내가 내려다보는 구도는 좀처럼 익숙해지지 않았다.
“어떻게 하면 됩니까?”
“…….”
나는 꿀꺽, 침을 삼켰다.
이 연습을 위해 머릿속으로 수십 번 시뮬레이션을 돌렸다.
어떻게 하면 더 파격적이고 파렴치한 자세를 연출할 수 있을지.
머릿속으로 결론 낸 자세는 분명 있는데, 입이 좀처럼 떨어지지 않았다.
그런 내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이안은 나를 가만히 올려다보기만 했다.
“……다음, 은.”
나는 간신히 입술을 열었다.
당황하지 말자, 이서연. 이 무릎 위에 언제까지고 앉아 있을 수는 없잖아. 의연하고 빠르게 해치우는 거야.
코끝을 통해 스며드는 이안의 체향에 머리가 어지러웠다. 대체 성인 남자에게서 왜 이렇게 좋은 냄새가 나는 거지. 분명 값비싼 향수를 쓰는 것이 틀림없었다.
‘정신 차려. 이서연.’
당황하면 헛생각을 하고 마는 내 나쁜 버릇이 또 발동되었다.
나는 황급히 당면한 과제에 다시금 집중했다.
“다음은, ……제 뺨에 손을 올리시면 돼요.”
“그리고?”
답지 않게 말 잘 듣는 학생이 된 이안이 물었다.
나는 무언가에 홀린 듯 나지막이 중얼거렸다.
“고개를 기울여 주세요. 입 맞출 때, 코가 닿지 않도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