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91화 (91/161)

91화

* * *

“아이린 님! 간식 시간이에요.”

“으응, 잠시만요. 곧 나갈게요!”

아네트에게 외친 뒤 나는 종이와 글씨로 어지러운 책상 위를 내려다보았다.

종이는 생각나는 대로 적은 내 손글씨로 빼곡했다.

전부 내가 기억하고 있는 원작 속 타임라인을 정리한 것들이었다.

‘원작하고는 이미 많은 일이 틀어져서 큰 보탬은 되지 못하겠지만…….’

그래도 몇몇 정보는 여전히 쓸 만할 것 같았다.

예를 들면, 이거.

‘원작 여주인공이 곧 수도에 상경하지.’

여주인공, 아비가엘은 장차 아주 존경받는 성녀가 될 재목이다. 당연히 미리 포섭해 두면 큰 보탬이 될 터였다.

그런 그녀가 제국 구석 시골에서 수도까지 상경하는 게 지금으로부터 두어 달쯤 뒤의 일이었다.

‘단풍 지는 가을에 상경했다는 대목이 있었으니, 대충 그쯤이겠지.’

아무리 원작이 틀어졌다 할지라도, 여태 시골에서 조용히 평화롭게 생활하던 아비가엘에게까지 영향이 가진 않았을 거다.

‘아비가엘은 내가 줍는다.’

그녀는 분명 큰 전력이 될 테다.

그런 계획들이 적힌 종이를 내려다보며 나는 끄응 신음했다.

이안을 구하겠다는 결심은 생각보다도 더 만만한 것이 아니었다.

밤새 고민하고 또 고민한 끝에 내가 내린 결론은 다음과 같았다.

‘반역은 일어나지 않게 할 거야.’

이안이 황좌를 탈취하는 것 자체를 막겠다는 말이 아니었다.

하지만 원작처럼 군대를 끌고 가 황제군과 정면으로 부딪치는 일은 만들고 싶지 않았다.

‘그 과정에서, 이안이 많이 다쳤었으니까.’

아무리 검에 있어 다시 없을 천재라고는 하나, 이안이라 해도 별처럼 많은 황제군을 상대로 털끝 하나 다치지 않는 건 불가능한 일이었다.

실제로 그는 원작에서 큰 부상을 입은 전적이 있었다. 목숨을 잃지 않은 게 천운이었다고 원작에서 서술되어 있던 기억이 있다.

그리고 그런 그의 상처는 나인에게 큰 호재였다. 그 상처 덕분에 나인은 사술을 더 쉽게 시전할 수 있었으니까.

‘아무리 원작을 읽었다곤 해도 전투 중에 다치는 것까지 막을 순 없어.’

그러니 전투가 일어나는 상황 자체를 최소화해야 했다.

전쟁이라는 글자 위에 죽죽 엑스 표시를 한 나는 가만히 생각에 잠겼다.

내 생각에는, 굳이 반역이라는 전쟁을 일으키지 않아도 라시드를 황좌에서 끌어내릴 수 있을 것 같았다.

펜을 두들기며 생각을 정리하고 있는데, 문밖에서 또 아네트가 나를 불렀다.

“아이린 님! 황궁에서 초대장이 왔는데, 바로 확인해 보시겠어요?”

황궁?

황제만 생각하고 있던 찰나 그 단어를 듣자 심장이 찔끔 놀랐다.

애써 아무렇지 않은 척 목소리를 가다듬으며 내가 말했다.

“네, 확인해 볼게요. 가져와 줘요.”

“넵!”

곧 아네트가 황궁에서 온 초대장을 가지고 왔다.

번쩍거리는 황금색으로 만들어진 초대장은 누가 봐도 심상치 않아 보였다.

초대장을 읽은 나는 조용히 중얼거렸다.

“건국 무도회, 라.”

“아, 건국제 무도회 초대장인가요? 그러고 보니 벌써 그런 시기가 되었군요!”

아네트가 반짝이는 눈을 했다.

“신나 보이네요, 아네트 양.”

“당연하죠! 수도 사람 중에 건국제 싫어하는 사람이 있을까요? 한 해 중 최고의 행사인데!”

나 역시 모르는 바는 아니었다.

건국제는 레하트 제국에서 가장 성대하게 열리는 이벤트로, 모든 노동자에게 일주일간의 휴식이 주어지며 그동안 거리에서는 축제가 끊이질 않는다. 그동안 황궁에서는 호화로운 무도회가 열렸다.

“이번 무도회도 황후 폐하께서 직접 개최하시겠죠? 저는 물론 소문만 듣게 되겠지만, 생각만 해도 너무 설레네요. 작년에도 어마어마했다고 들었거든요!”

“아네트 양도 함께 가요.”

“……네?”

황궁에서 열릴 만큼 큰 무도회에는 대체로 한두 명의 시종을 대동할 수 있다. 나는 웃으며 아네트에게 재차 말했다.

“함께 가자고요, 건국 무도회.”

“아이린 님……!”

아네트가 감격한 듯 입을 틀어막았다.

“진짜요? 정말요? 저도 가도 되나요?”

“그럼요. 가면 모르는 얼굴이 잔뜩 있을 텐데, 내 편이 하나라도 더 있어야 저도 든든하죠.”

“아이린 님!”

아네트가 불끈 주먹을 쥐었다.

“저, 확실한 아이린 님의 편이 되어 드릴게요!”

“후후, 고마워요. 그나저나 오늘 저녁 외출을 해야 할 것 같은데 준비를 도와줄 수 있나요?”

“물론이죠! 어디로 가시나요?”

“어떤 남작님이요. 일전에 빚을 진 게 있어서, 갚으러 가야 할 것 같네요.”

“빚이요……?”

아네트가 알쏭달쏭한 표정을 지었다. 나는 대답 대신 희미하게 미소 지으며 찻잔을 입으로 가져갔다.

* * *

“어, 어서 오십시오.”

마차를 맞이한 하인이 당황 섞인 표정으로 나를 힐끔거렸다.

“어떤 분이 오셨다고 고하면 될까요?”

“내 이름은 아이린 그레이스예요.”

“아이린…… 헉, 넵. 잠시만 기다려 주십시오, 성녀님!”

내 분홍 머리카락을 흘긋거리던 하인이, 이름을 듣자 확신을 얻은 표정으로 허둥지둥했다.

잠시 뒤 저택의 집사가 나를 마중 나왔다.

“어서 오십시오, 아이린 님. 갑작스레 방문 주셔서 마중이 허술했던 점 양해해 주십시오. 일단 어서 이리 드시지요.”

나를 응접실로 안내하며 집사가 내 눈치를 봤다.

“그런데 어쩐 일로 방문을 해 주셨는지……?”

“비첸 남작님을 만나 뵙고 싶어요. 용건은 그분께 직접 말씀드리겠어요.”

“주인님께서는 곧 귀가하실 예정입니다. 잠시만 기다려 주십시오!”

응접실에 앉아 있는 내 앞으로 하인들이 온갖 향 좋은 차와 티 푸드를 내왔다.

그것들을 음미하고 있는데, 머지않아 응접실 문이 열렸다.

“정말 뜻밖의 손님이군요.”

에드워드 비첸이 한쪽 눈썹을 치켜뜬 채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약혼식 날 만났던 이후로는 처음이지, 아마.

그날 내게 펜던트를 쥐여 주며 비열하게 웃던 얼굴은 당연하게도 그대로였다.

암흑 길드의 수뇌부인 주제에 겉으론 이렇게 고매한 귀족 행세를 하고 있다니. 집사는 과연 제 주인의 정체를 알고 있을지 궁금했다.

“안녕하세요, 남작님.”

나는 빙긋이 웃으며 인사했다.

“급히 전해 드릴 용건이 있어 방문했답니다.”

“대체 성녀님께서 제게 무슨 용건이 있으셨을까요.”

에드워드가 내 뒤의 조안 경을 흘긋였다.

“그럼 조용한 곳에서 이야기를 나눠 볼까요? 단둘이 말입니다.”

조안 경이 조용히 말을 걸었다.

“아이린 님. 조금이라도 낌새가 이상하다면 즉시 신호 주십시오.”

“물론이에요.”

에드워드가 고개를 끄덕이자, 집사와 하인들을 비롯한 모든 인원이 응접실 밖으로 나갔다. 조안 경을 포함해서.

“하아. 그래서.”

모두 나가자 에드워드의 분위기가 돌변했다.

목을 조이는 크라프트를 끌어내리며 에드워드가 말했다.

“무슨 일이기에 여기까지 찾아온 거지? 당돌하기 짝이 없네.”

“노예로서의 본분을 다하기 위해서죠.”

나는 희미하게 미소 지으며 말했다.

“주인님들께 반드시 전달해야만 할 것 같은 소식을 알아냈는데, 저로선 떠오르는 연락책이 남작님밖엔 없어서요.”

“반드시 전달해야만 할 것 같은 소식이라?”

에드워드가 눈을 반짝였다.

“대어라도 물었나 보지? 아, 크리스털 귀걸이를 드디어 물들였나?”

이안의 피로 적시라던 크리스털 귀걸이 이야기가 나오자, 나는 순간 굳을 뻔한 표정을 간신히 갈무리했다.

“아뇨. 그건 아직 시도하지 못했습니다. 아시다시피, 경계가 워낙 삼엄한 인물이어서요.”

“그자의 인간 같지 않음이야 나도 잘 알고 있지. 하지만 그래 봐야 미인계에 홀리는 멍청이 아닌가?”

내 얼굴을 가판대 위 악세서리처럼 훑어본 에드워드가 픽 웃었다.

“그자가 이런 취향이었을 줄은 꿈에도 몰랐지, 우리도. 역시 고매한 성기사단장이라 해도 남자는 남자라 이건가?”

“이안 님에 대한 소식인 건 맞아요.”

에드워드가 조급한 듯 얼굴을 찡그렸다.

“무슨 일인데 그래. 괜히 간 보지 말고 당장 고하도록 해.”

“이안 님께서는 지금.”

숨을 한번 쉰 뒤 나는 이어 말했다.

“역모를 꾸미고 계세요.”

“……뭐?”

에드워드의 눈이 크게 벌어졌다. 뒤통수를 한 대 맞기라도 한 듯.

“다시 말해 봐.”

내 앞까지 성큼성큼 다가온 에드워드가 윽박지르듯 말했다.

“어서!”

“목소리를 낮춰 주세요.”

몸을 물리며 내가 말했다. 큰 소리를 듣고 조안 경이 들이닥치기라도 한다면 곤란했다.

“이안 님께서 반역 계획을 꾸미고 있다고 말씀드렸어요.”

“……틀림없는 정보겠지?”

에드워드가 이번엔 목소리를 잔뜩 낮춘 채 속삭였다.

“지금 네가 지껄인 말이 얼마나 무거운 건진 아무리 너라도 잘 알고 있겠지. 진실인가? 정말 이안 에스테반이 황좌를 노리고 있다고?”

“확실해요.”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매일 밤, 정예군을 꾸려 역모를 준비하고 있는 걸 두 눈으로 직접 봤으니까.”

“……하.”

에드워드가 헛웃음을 내뱉었다. 혼자만의 세계에 잠긴 듯 그가 정신없이 중얼거렸다.

“그래…… 그렇단 말이지. 그렇단 말이지?”

미친 사람처럼 에드워드가 한참을 그렇게 혼잣말했다. 그의 눈은 탐욕과 욕심으로 번들거리고 있었다. 내가 가져온 이 정보를 어떻게 유리하게 써먹어서 부와 권력을 거머쥘 수 있을지, 머리가 팽팽 돌아가고 있겠지.

“좀 더 자세히 말해 봐.”

에드워드가 돌연 내게 달려들 듯 가까워지더니 내 어깨를 부여잡았다.

“더 알고 있는 것은 없나?”

“물론 있죠.”

코앞에서 번들거리는 에드워드의 눈알을 바라보며 나는 속삭이듯 말했다.

“일주일 뒤, 이안 님의 개인 집무실을 찾아와 보세요. 아주 재밌는 걸 보실 수 있을 테니까요.”

“더 자세히 말해!”

“중요한 회의가 그날 집무실에서 열린다는 이야길 주워들었어요. 분명 반역 계획의 수뇌부들이 모이는 자리겠죠.”

에드워드를 똑바로 쳐다보며 내가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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