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89화 (89/161)

89화

내 정신 상태를 묻는 목소리는 서릿발처럼 서늘했지만, 바닥에 깔린 채로 빈정거려 봤자 전혀 무섭지 않았다.

고작 나 같은 초보자의 공격에 무너지다니. 사상 최강이라는 소드 마스터여도 불시의 몸통 박치기 공격에는 당해 낼 수 없었던 모양…… 아니. 이게 아니라.

지나치게 당황한 나머지 뇌가 현실 도피를 하기 시작했다.

‘도대체 왜 대련에 끼어든 거야, 나.’

소설 속 삽화와 똑같은 자세로 이안을 공격하는 엘리엇을 보자, 강한 데자뷔가 나를 지배했다.

그 순간 내 머릿속은 그저 소설 속 결말을 되풀이해선 안 된다는 일념만으로 가득했다.

이안에게 부여된 최후를 되풀이할 순 없다는 일념만이.

‘미쳤구나. 이서연.’

나는 허탈히 헛웃음을 내뱉었다.

단지 그 생각만으로 나는 신성한 대련에 끼어들고, 이안이 가슴팍을 밀어 넘어뜨린 것이다.

‘단단히 미쳐 버린 거지.’

치료가 필요할 정도의 심각한 과몰입이었다.

더 소름 끼치는 것은, 지금 이 순간 연무장 바닥 위로 흐트러진 이안의 은색 머리카락을 멍하니 바라보며, 삽화와 달리 거기에 피가 묻어 있지 않음에 안도하는 나 자신이었다.

왜 이래, 이서연. 정신 차려.

그렇게 스스로를 다그쳐 봤지만, 머리 한구석은 이미 체념하고 있었다.

이젠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나는 이안 에스테반이, 소설과 똑같은 결말을 맞길 바라지 않는다는 걸.

비슷한 장면만 봐도 이렇게 몸이 먼저 반응할 만큼.

가장 좋아하던 등장인물을 그런 식으로 잃었던 것에 대한 트라우마일까?

모르겠다. 어찌 되었든 확실한 건, 이제 내게 이안은 더 이상 단순한 소설 속 등장인물이 아니라는 점이었다.

그는 언제부터인가 나에게 피와 살을 지닌 인간이었다. 그래서 나는 이제 그에게 어떤 비극이 기다리고 있는지 알면서도, 극장에 앉은 관객처럼 그저 관망할 수만은 없었다.

“대체 뭘 하는 겁니까.”

이안이 황당한 목소리로 말했다.

“부인의 돌발 행동은 갈수록 급이 달라지는군요.”

“잠시만 기다려 봐요.”

아주 중요한 결심을 하고 있던 참이니까.

나는 내 밑에 쓰러져 있는 이안을 내려다보며 꾹 입술을 깨물었다. 내 진짜 마음을 깨닫자 허탈감이 밀려왔다.

대체 내 신세가 어쩌다 이렇게 되었담.

일개 엑스트라에 빙의한 것으로도 모자라, 독자일 적 좋아하던 인물에게 정이 들어 어떻게든 살려 내야겠다는 다짐을 하게 되다니.

‘이래서 덕질이 유해하다는 건가.’

한탄하면서도 나는 내 결심을 되짚진 않았다.

우리가 처음 계약 결혼을 했을 때, 내 원래 계획은 다음과 같았다.

첫째, 일단 계약을 걺으로써 이안이 날 죽이지 못하게 한다.

둘째, 계약 기간 동안 이안의 비호를 받아 나인으로부터 나 스스로를 지킨다.

셋째, 계약만 끝나면 곧장 나인을 비롯한 그 누구도 나를 찾지 못할 곳으로 숨어 원래 세계의 집으로 돌아갈 방법을 찾는다.

이안에겐 우리가 이제 한배를 탔다고 말했지만, 사실 내 일만 해결되면 냅다 도망칠 생각뿐이었던 것이다.

하지만, 이제는.

나는 연무장 바닥 위에서 흐트러진 이안을 가만히 내려다보았다.

이젠 그를 결코 원작의 흐름대로 흘러가도록 내버려 둘 수 없게 됐다.

원작 작가는 이야기의 거대한 흐름을 위해 이안이라는 존재를 희생시켰지만, 난 그러지 않을 것이다.

그렇게 결심하고 나자, 가슴이 신기할 만큼 가벼워졌다.

“그러고 아무 말도 안 할 겁니까? 좋습니다.”

이안이 아래쪽에서 빈정거렸다.

“이러고 밤을 새 보죠.”

“아뇨. 일어날 건데요.”

“아, 이제야 입을 열 마음이 드셨습니까?”

이안이 한쪽 눈썹을 치켜뜨며 나를 올려다보았다.

“그럼 설명 좀 해 보시죠. 이게 대체 무슨 짓인지.”

“그, 흠. 일단은 일어나 드릴게요.”

이안이 말할 때마다 내 손바닥 아래 깔린 그의 가슴 근육이 꿈틀거렸다.

그게 굉장히 묘한 기분을 불러일으켰기에 나는 황급히 손부터 뗐다.

연무장 안 사람들이 모두 경악한 얼굴로 나와 이안을 바라보고 있는 것이 느껴졌다.

그도 그럴 테지. 대련 중 성기사단장의 부인이 갑자기 난입해 남편을 덮쳐 들었으니.

“죄송합니다. 폐를 끼쳤네요.”

엘리엇에게 꾸벅 사죄한 나는 그대로 연무장에서 도망치려 했다. 모두 날 쳐다보고 있는 이 장소에서 더 뭉개고 있을 만큼 뻔뻔하진 못했으니까.

몸을 털고 일어난 이안이 내게 말했다.

“부인께선 이따가 저 좀 보시죠.”

“……네.”

물론 그냥 넘어가 줄 거란 생각은 안 했다.

사람들의 시선으로 피부가 따끔거렸다. 오늘이 지나면 또 나와 이안에 대해 무슨 소문이 불어닥칠지 생각만 해도 머리가 지끈거렸다.

‘이번만큼은 자업자득이지만.’

나는 민망함을 감추기 위해 최대한 도도한 표정을 지으며 연무장을 나섰다.

* * *

침실로 돌아온 나는 외출복을 완전히 갈아입지도 않고 침대에 대자로 드러누웠다.

“진짜 미쳐 버린 거지, 이서연.”

이제 앞으로 성당 사람들 얼굴은 어떻게 보냐.

대련 중에 남편이 털끝이라도 다치는 것조차 못 봐서 연무장 한가운데 난입한 부인에 대해 어떤 소문들이 나돌지 벌써 머리가 지끈거렸다.

그 상태로 십 분 정도 누워 있었을까.

나직한 노크 소리가 들렸다.

“들어가겠습니다.”

헉.

이안의 목소리에 나는 얼른 몸을 일으켰다.

벌써 대련이 전부 끝났나?

문을 열고 들어온 이안이 삐딱한 눈빛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해명이나 해 보시죠. 무슨 생각이었습니까, 아까는?”

이안의 눈빛은 마치 적을 심문하듯 날카로웠다.

순간 어이없는 기분이 들었다.

물론 누구도 이해 못 할 돌발 행동이긴 했지만, 일단 내가 한 행동은 엘리엇으로부터 이안을 몸으로 지켜 낸 것이다. 그런데 저 사람은 왜 자기를 온몸으로 지켜 준 날 저렇듯 골칫거리처럼 쳐다보는 것일까?

울컥 치밀어 오르는 반항심에 나는 이안을 똑바로 쳐다보며 대답했다.

“이안 님이 다치는 줄 알고 그랬어요.”

“예?”

“그 아이 검이 너무 매서워서, 순간 당신이 진짜 당하는 줄 알았거든요. 그래서 나도 모르게 뛰어든 거예요.”

이안이 주위를 둘러보았다.

“이 안에 시종이 함께 있습니까?”

“아뇨? 없는데요.”

“그런데 왜 그런 말도 안 되는 변명을.”

기가 찬 듯 이안의 미간에 주름이 잡혔다.

“그대가 나를 걱정했다고?”

“네. 정말인데요.”

천하의 거짓말쟁이를 보듯 이안이 나를 바라보았다.

하지만 놀랍게도 내 말은 모두 진실이긴 했다. 나조차도 믿기 힘든 진실이었지만.

“거짓말도 적당히 하십시오.”

“거짓말 아니라니까요.”

“백번 양보해서 그대가 날 걱정한 게 사실이라 해도, 내가 설마 그런 애송이의 검에 당했겠습니까?”

나는 대답 대신 이안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바보. 바로 그 애송이의 검에 죽음을 맞이할 운명인 줄도 모르고.

“말도 안 되는 이야기 말고, 제대로 된 이유를 내놓아 보시죠. 왜 끼어든 겁니까?”

“얘기하기 싫네요. 이안 님도 제게 숨기고 있는 게 많으시잖아요.”

“또 그 얘기입니까.”

몇 시간 전에 오간 언쟁을 떠올린 듯 이안이 얼굴을 굳혔다.

“대체 뭘 그렇게 알고 싶은 거죠. 내가 그대에게 뭘 숨기고 있다고 생각합니까?”

“많죠. 가령, 언령이라거나.”

이안에게 빤히 시선을 던지며 내가 말했다.

이안의 눈이 서서히 커졌다.

푸른 눈에 다채로운 감정이 담기는 것을 나는 가만히 바라보았다.

“……어디서.”

잠시 뒤, 이안이 눌러 참는 듯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어디서 알게 된 겁니까.”

“제게 언령이란 능력이 있단 사실을요?”

이안은 대답 대신 나를 고요히 노려보았다.

그 반응에 나는 확신을 얻었다.

내게 정말로, 그런 능력이 숨어 있었구나.

성기사단장인 이안이 침묵으로 나의 말을 긍정했기에, 그 이상의 증거는 필요 없었다.

“언제부터 알고 계셨어요?”

“아이린.”

이안이 대답 대신 내게로 성큼 가까워졌다.

“어떻게 알게 된 건지는 몰라도, 없던 일로 합시다. 이 이상 그쪽에 관심 갖지 마십시오. 지금이라도 관심을 끊으면―”

“부작용도 줄어들 거라고요?”

말을 빼앗긴 이안이 놀란 눈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네. 부작용에 관한 내용까지도 알고 있어요. 성녀 아그네스가 평생 이 부작용에 고통받았다는 것도.”

“알면서, 왜.”

혼란이 배인 눈동자로 이안이 말했다.

“왜 내 충고대로 하지 않는 겁니까. 위험한 능력입니다. 일상적인 단련조차 하지 않는 그대가 지니기엔 너무나도.”

이안이 갑자기 검 수련을 소홀히 하고 있는 나의 게으름을 지적했다.

움찔했으나 나는 티 내지 않고 맞받아쳤다.

“이유는 당연하잖아요. 위험한 만큼 강력한 능력이니까. 이안 님, 잘 들어요.”

나는 가볍게 한숨을 내쉬곤 이안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저는 이 능력으로 당신을 도울 거예요.”

이안이 순간 멍한 눈을 했다.

잠시 뒤 그가 얼음처럼 굳은 얼굴로 나를 추궁했다.

“그게 대체 무슨 소리입니까.”

“말 그대로예요. 이안 님이 준비하고 있는 계획, 내가 도울 거라고요.”

겨울 서리처럼 차디찬 눈이 나를 응시했다.

나를 피부밑까지 샅샅이 훑을 듯 날카로운 시선이었다.

나는 그 시선에 애써 움츠러들지 않고 그를 마주 바라보았다. 이안의 머릿속은 지금 숨 가쁘게 돌아가고 있을 터였다. 내가 왜 이런 말을 하는 것인지, 어디까지 알고 있는 것인지 파악하기 위해.

“……농담이 과하군요. 부인.”

이안이 비딱한 미소를 걸쳤다.

“아무리 언령이 강한 능력이라고는 하나, 검법 하나 익히지 못한 그대가 어떻게 날 도와 최전선에서 마물을 막아 내겠단 겁니까?”

나는 헛웃음을 머금었다.

내가 돕겠다고 말한 이안의 ‘계획’은 그런 것이 아님을 이안도 나도 잘 알고 있었다.

나를 떠보려는 모양이지.

나는 곧은 시선으로 이안을 올려다보았다.

“저, 실은 거짓말을 했어요.”

“……무슨 말이죠.”

“이안 님을 처음 만났을 때, 선황께서 어디 잠들어 있는지 알고 있다고 말했죠?”

“…….”

“사실은 그게 전부가 아니에요. ……실은, 누가 그분을 그렇게 만들었는지 역시 알고 있거든요.”

숨 막히는 정적이 침실을 뒤덮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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