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88화 (88/161)

88화

그런 내 시선을 느끼기라도 한 걸까.

무심한 눈으로 엘리엇을 내려다보던 이안이 날 향해 고개를 돌렸다.

예상치 못하게 시선이 마주친 나는 순간 아는 체하는 표정을 지었다.

‘아니. 잠깐, 잠깐.’

생각해 보면 나와 이안의 마지막 대화는 그다지 좋지 않았다.

아니, 대놓고 분위기가 나빴지. 이안은 내게 차가운 말투를 일삼았고 난 거기에 노골적으로 화난 티를 냈으니.

나는 하마터면 반가운 표정을 지을 뻔한 것을 감추고 무심하게 고개를 까딱였다. 이안은 살피는 듯 묘한 눈으로 날 쳐다보더니, 이내 마주 고개를 끄덕였다.

“단장님과 성녀님이 눈인사를 나누시네요.”

“어쩜, 애틋해라…….”

“하아. 보는 것만으로도 달콤한 케이크를 먹은 기분이 들어요.”

대체 우리의 건조한 눈인사 어디에서 그리 다디단 기운을 느꼈는지 주위 사람들이 수군거렸다.

나는 이번엔 엘리엇을 살폈다. 오랜만에 보는 소년은 하마터면 몰라볼 뻔하게 달라져 있었다.

첫 만남 때와 달리 깨끗해진 얼굴은 소년다운 청량함으로 반짝반짝 빛이 났고, 지나치게 말라 있었던 몸에도 어느 정도 살이 붙었다. 왜 원작 주인공씩이나 해 먹었는지 알 것 같은 미모였다.

하지만 이안을 경계하는 눈빛만큼은 첫 만남과 그대로였다.

“검을 들어라.”

이안의 무심한 어조에 엘리엇이 흠칫 목도를 들었다.

“약속은 지켜 주시는 거겠지요?”

당돌한 물음에 이안이 서늘한 미소를 지었다.

“물론.”

뭔데. 무슨 약속이 오갔던 건데.

나는 궁금증을 참지 못하고 아네트에게 몸을 기울였다.

“아네트 양. 약속이라는 게 무슨 뜻이지요? 알고 있나요?”

“그게 말이에요, 아이린 님.”

아네트가 흥분한 목소리로 속닥거렸다.

“저 소년분이 단장님께 단 한 번이라도 공격에 성공한다면, 단장님이 친히 소년분의 스승이 되어 주기로 했어요.”

“아하……?”

“아이린 님도 아시겠지만, 단장님은 제자를 거두지 않는 것으로 유명하시잖아요? 절호의 기회이니 소년분은 엄청나게 절박하겠죠, 지금.”

아네트의 열정 넘치는 설명은 마치 프로 경기 해설진을 방불케 했다. 그녀가 계속해서 속닥였다.

“솔직히 지금 이 자리에 있는 사람 중 절반 정도는 소년분이 실패하길 바라고 있을걸요. 이안 님의 제자가 되는 건 누구나 바라던 일일 텐데, 아무도 그 자릴 꿰차지 못했을 때야 상관없겠지만 누군가 유일한 제자가 된다면 엄청 눈꼴이 시릴 테니까요.”

“오호라…….”

나는 고개를 갸웃했다.

왜 이 대련에 사람들이 이렇게나 몰려왔는지는 이제 알겠다. 하지만 아직 남는 의문이 있었다.

‘이안은 이미 엘리엇의 대부가 되어 주기로 나와 약속했었는데?’

대부는 스승보다 한 단계 더 높은 개념이니, 그게 알려지면 지금보다 반향이 더 클 터였다.

즉 이안은 이미 그러기로 결정 난 것을 가지고 엘리엇을 도발하고 있단 거였다.

그것도 모르는 엘리엇은 사생결단을 앞둔 표정을 짓고 있었다.

소드 마스터의 제자가 될 수 있는 기회는 결코 흔한 것이 아니니 당연할 테지. 엘리엇은 원작 공인 검에 대해 야심 강한 성격이었기 때문에 더할 터였다.

“그럼 대련을 시작하겠습니다.”

상급 기사로 보이는 기사 한 명이 긴장한 표정으로 말했다.

곧 그가 붉은 깃발을 들어 올렸다.

“시작!”

시작을 알리는 외침과 함께, 구경꾼들이 약속한 듯 일제히 목을 길게 뺐다. 나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모든 사람의 기대와는 달리, 일은 너무나 순식간에 끝이 났다.

털썩.

엘리엇이 바닥에 엉덩방아를 찧었다.

‘어?’

나는 멍청히 눈을 끔뻑였다.

무슨 일이 일어난 거지?

분명 방금 전까지 이안은 느슨히 목도를 늘어뜨리고 있었다.

그러나 바로 다음 순간, 방금 전의 장면이 거짓말이었다는 것처럼 이안의 목도가 엘리엇의 목을 겨누고 있었다. 교과서처럼 완벽한 검술 자세로.

상황을 이해하지 못한 건 나뿐만이 아닌 듯, 좌중이 순간 침묵으로 고요해졌다.

침묵을 깬 것은 심판을 맡은 상급 기사였다.

“이, 이안 에스테반 님 승!”

상급 기사가 당황한 목소리로 외쳤다.

목에 검이 닿는 순간 승패가 결정 나는 모양이었다.

“일어나. 3선승제다.”

이안이 고저 없는 목소리로 말했다.

멍한 얼굴로 바닥에 쓰러져 있던 엘리엇이 이를 악물더니 몸을 일으켰다.

아직 소년의 얼굴엔 당혹이 서려 있었지만, 호승심까지 죽은 것은 아니었다.

“……추한 꼴을 보여 드려 죄송합니다. 다음은 다를 겁니다.”

“과연.”

이안이 희미하게 비스듬한 미소를 지었다.

“두 번째 시합, 시작합니다!”

상급 기사가 두 번째로 깃발을 들어 올렸다.

이번엔 아까와는 조금 양상이 달랐다.

먼저 튀어 오른 것은 엘리엇이었다. 땅을 박차고 크게 뛴 엘리엇이 이안을 향해 목도를 내리쳤다. 예리하게 깎인 나무 칼날이 이안을 향해 쇄도했다.

‘흡.’

나는 나도 모르게 양손으로 입을 틀어막았다.

그러나 엘리엇의 목도가 이안에게 닿는 일은 없었다.

물러날 곳이 없어 보였으나 눈 한번 깜빡인 새 이안의 몸은 엘리엇의 검 궤적을 벗어나 있었다. 순간 이동이라도 한 듯 가볍게 피한 이안이 엘리엇의 목뒤를 수도로 내리쳤다.

“허억!”

목뒤를 가격당한 엘리엇이 실 풀린 인형처럼 땅에 쓰러졌다.

“꼴사납군. 일어나라.”

쓰러진 채 부들거리는 엘리엇에게 이안이 차갑게 내뱉었다.

“기사라면 쓰러질 때도 등을 보이지 말아야지. 그러고도 신의 이름을 업고 검을 휘두르겠단 건가.”

냉정한 일갈에 엘리엇이 부들부들 떨며 몸을 일으키려 애썼다.

“풉, 잘난 척하더니.”

“그러니까 말이야. 결국 별거 없네.”

몇몇은 엘리엇의 추태가 고소한 듯 킥킥거렸다. 그들은 보나 마나 하수 중 하수들일 터였다.

연무장을 둘러싼 대부분의 기사는 알고 있었다. 엘리엇이 부족한 게 아니라, 이안이 지나치도록 압도적이라는 것을.

엘리엇을 비웃는 하급 기사들을 저 자리에 대신 보냈다면 단 일 초도 버티지 못했을 거다.

그걸 아는 자들이 대부분이기에 좌중은 찬물을 끼얹은 듯 고요했다. 하급 기사들도 서서히 분위기를 깨닫고 키득거림을 멈췄다.

마침내 몸을 일으킨 엘리엇이 형형한 눈으로 이안을 노려보았다. 그 눈빛은 소년다운 호승심만 가득했던 이전까지와는 어딘가가 달라 보였다.

“한 수, 더 부탁드리겠습니다.”

떨림을 억누르는 목소리로 엘리엇이 말했다.

심판이 세 번째 시합 개시를 알리고, 이번엔 둘 중 누구도 먼저 움직이지 않았다.

“…….”

좌중이 숨 막히는 고요로 뒤덮였다.

이안은 언뜻 한가로워 보이는 태도로 엘리엇을 직시하고만 있었다.

반면 엘리엇은 목도를 양손으로 쥔 채 뚫어지라 이안의 움직임 하나하나를 노려보았다.

문득 기묘한 기분이 들었다.

이 장면을, 언젠가의 꿈에서도 본 적 있는 것 같은 기분.

‘데자뷔가 아니야.’

단순한 데자뷔 현상이 아니었다.

난 이 장면을 실제로 책 속에서 읽은 적이 있으니까.

물론 정확히 같은 장면은 아니었다. 원작에서 이안과 엘리엇은 이런 식으로 대련한 적이 없으니까.

하지만 딱 한 번, 두 남자가 지금처럼 서로를 마주 보고 검을 세웠던 때가 있었다. 원작이 클라이맥스를 향해 달려들던 무렵이었다.

그때 이안은 이미 사술에 물들어 있었다. 복수에는 성공했지만, 그의 영혼은 이미 그의 것이 아니었다.

이성을 잃은 그는 닥치는 대로 제 수하들까지 해치웠고, 사상 최강의 성기사라는 그를 막을 수 있는 자는 아무도 없었다.

그런 그의 앞에 나선 것이 원작의 남주인공과 여주인공이었다.

여주인공의 성력을 보호막처럼 두른 엘리엇은 지금처럼 이안의 앞을 가로막았다.

제 실력으로는 이안을 막을 수 없다는 것을 알지만, 그럼에도 맞서야만 한다는 절박함을 담아.

내 머릿속에 그런 두 사람이 격돌하던 장면이 재생되었다.

그리고, 동시에.

“어엇……!”

주변 기사들이 하나같이 숨을 집어삼켰다.

시종일관 이안의 동태를 살피기만 하던 엘리엇이 먼저 지면을 박차고 뛰어오른 것이다.

두 번째 시합 때와 비슷한 동작이었으나, 각도가 조금 달랐다.

사냥감의 목덜미를 물어뜯는 맹수처럼 낮게 날아오른 엘리엇이 이안을 향해 검을 찔러 넣었다.

‘아.’

순간, 마치 늘어진 테이프를 재생하듯 눈앞의 광경이 느리게 흘러갔다.

양손으로 쥔 목도로 이안의 심장께를 겨냥하는 엘리엇.

저항할 의지라곤 없어 보이는 태도로, 가만히 그 검을 지켜보고 있는 이안.

‘이 장면.’

나는 이 장면을 알고 있었다.

엘리엇이 최종 보스로 흑화한 이안을 무찌르는 바로 그 장면이었으니까.

몇 번이고 몇 번이고, 삽화와 함께 되새김질했던 그 장면. 가장 아끼고 애정했던 이안 에스테반이라는 캐릭터가 영영 소설의 무대에서 퇴장하는 장면.

강렬한 데자뷔에 속이 울렁거렸다.

엘리엇의 검 끝이 이안의 심장을 두 동강 낼 듯 쇄도해 왔다.

동시에 소설 속 묘사가 생생히 되살아났다. 가슴을 찔린 이안, 붉게 피어오른 피 보라와…… 부하의 검에 베여 새하얗게 죽음을 맞아 가던 이안.

“안 돼!”

정신을 차렸을 때, 내 몸은 이미 연무장을 향해 뛰쳐나가고 있었다.

“성녀님?!”

“아이린 님!”

경악한 외침이 여기저기서 들렸지만 이미 때는 늦어 있었다.

“윽!”

불시의 공격에 밀려 나간 엘리엇이 허무히 땅에 쓰러졌다.

“서, 성녀님?”

엘리엇이 멍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러나 내 귀엔 들어오지 않았다. 손바닥 아래로 느껴지는 단단하면서도 따스한 감촉에 말문이 막혔으니까.

‘……뭐, 뭐야.’

무슨 일이 벌어진 거지.

왜 내가 이안 에스테반을 다리 밑에 깔고 앉아 있는 걸까.

그리고 왜 내 손바닥 밑에서 성인 남성의 가슴 근육이 꿈틀거리고 있는 걸까.

“부인.”

내게 깔려 바닥에 쓰러진 이안이 나를 올려다보며 말했다. 내게만 들릴 만한 목소리로.

“……미치셨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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